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27) / 불쌍한 고라니 - 김유석의 ‘세 발 고라니’
세 발 고라니
김유석
발자국 하나를 어디 두었을까.
간밤 텃밭을 다녀간
좀도둑의 흔적을 더듬는 노인의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우뚱거린다.
그놈 같은데.
서너 해 전
밤눈이 올무처럼 둘러치던 외딴집
철사줄에 발목 하나를 두고 간 그놈.
제 발모가지 물어 끊고
눈밭에 생혈 적시며 사라진 그 녀석이
발자국 하나 공중에 들고서
다시 사람의 집을 찾은 것은,
봄동 앞을 망설이다
뜯지도 않고 돌아선 것은
배고픔보다 곡진한
천식 앓는 노인의 기침소리였을까.
사람과 짐승 사이
텃밭과 야생 사이
사라진 발자국 하나
지팡이 절룩이며 찍어 넣는 노인.
―『붉음이 제 몸을 휜다』(도서출판 상상인, 2020)

<해설>
농부들에게 멧돼지ㆍ고라니ㆍ오소리 같은 야생동물이나 참새ㆍ까마귀ㆍ제비 같은 조류는 천적이나 마찬가지다. 애써 지어놓은 농작물을 한 순간에 망치고 만다. 새를 쫓기에 허수아비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야생동물은 철조망을 뚫고 밭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밀엽꾼들이 야생동물을 보신용으로 몰래 잡는 경우도 있지만 농부가 방어의 뜻에서 올무나 덫을 놓는 경우도 있다.
작은 사슴처럼 귀엽게 생긴 고라니가 올무에 걸려 발목 하나를 잃었다. 그래서 세 발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 시의 화자는 사실인지 상상인지 봄동을 뜯어 먹으러 온 고라니와 노인의 만남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라니가 의리가 있다, 봄동을 뜯지도 않고 돌아선 것이 천식 앓는 노인의 기침소리 때문이었다고 하니.
세 발로 이루어진 발자국에 노인이 지팡이로 발자국을 하나 만들어 놓은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노인은 그 세 발 고라니에게 너무나 미안한 것이다. 사람과 짐승 사이의 교감은 강아지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사람보다 더 잘 도리를 알고 의리를 지킨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