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1) / 두부는 굳는다 -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1) / 두부는 굳는다 -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3.1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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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1) / 두부는 굳는다 -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1) / 두부는 굳는다 -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두부를 건너는 여자
  
  이영식


  피랍 365일째
  어머니는 두부처럼 앉아계시다
  요란했던 구급차 울음소리로부터 시작된 
  격리, 
  머리맡 수북이 쌓인 약봉지 펼치듯 
  사계절 돌아온 홍매가 충혈된 눈을 떴다
  오늘도 어머니는 두부처럼 앉아계시다
  세상 건너는 법 알려 주마는 듯
  두부처럼 소리 없이 웃으며 고요하시다
  반복의 틀에서 찍어지는 하루
  5인실 병상 커튼과 링거 병에 둘러싸인 
  두부는 생각도 하예지고 있다

  내가 파먹고 버린 두부 
  내가 속을 썩여서 식용도 못 되는 두부
  노인 병원 철제침대 모판에 갇혔다
  두부는 무엇을 도모하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오늘도 어머니는 끝물 두부처럼 앉아계시다
  두부를 건너고 있는 저 가슴속
  연분홍 치마 휘날리는 처녀가 남아있는지
  ‘봄날이 간다’를 불러 달라신다
  백발 나날이 흑발로 갈아입고 
  텅 비었던 잇몸에 다시 이빨이 솟는다
  식어버린 순두부 같은 계절이다

  입술에 붙었던 이름 하나 둘 떼어놓으며
  오늘도 두부는 파킨슨 씨와 놀고 있다
  내, 어머니를 건너가고 있다


  ―『꽃의 정치』(지혜, 2020)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1) / 두부는 굳는다 - 이영식의 ‘두부를 건너는 여자’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화자의 어머니는 파킨슨씨병 환자다. 이 병은 뇌의 신경세포 손상으로 손과 팔에 경련이 일어나고, 다리는 보행이 어려워지는 마비현상이 오는 질병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몸이 두부처럼 굳어져 간다.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말년에 이 병으로 고생하였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고 자랑하던 그 날렵한 알리가 손을 벌벌 뜨는 모습은 많은 팬을 안타깝게 했다. 

  두부처럼 앉아계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했는데 “두부처럼 소리 없이 웃으며 고요하시다”와 “노인 병원 철제침대 모판에 갇혔다”란 시행에서 의문이 풀린다. 보행을 못하게 된, 즉 병원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비통할까. 하지만 아들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어머니의 부탁이 있자 병실에서 노래나 한 곡조 뽑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콩콩, 학교 운동회 때 운동장을 뜀박질하던 콩의 나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 팔리고 남은, 식용도 못 되는 끝물 두부인 어머니. 그 어머니의 뇌리에서는 사람 이름도 하나 둘 사라지고 추억도 결국 다 사라질 것이다. “백발 나날이 흑발로 갈아입고/ 텅 비었던 잇몸에 다시 이빨이 솟는다”는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상징적인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기적이다. 굳어지지도 못한, 그나마도 식어버린 순두부 같은 이 계절에, 화자는 속으로 울고 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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