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속화하는 교회를 반대하고 청빈을 주장하는 프라시스코 수도회와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흑사병 등으로 권위가 무너져가는 교황청, 그리고 새롭게 권력을 키우던 유럽의 세속 군주들간의 갈등이 커지던 1327년. 교황과 교단들은 이탈리아 북부 베네딕트 수도원에 모여 청빈과 이단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기로 한다. 토론을 앞두고 수도원에 먼저 도착한 프란치스코 수사 윌리엄과 그의 제가 아드소가 책에 그림을 그리는 채식 수사 아델모의 시체가 발견되고 연이어 수도사들이 살해되면서 수사를 맡는 이야기이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은 14세기 베네딕토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에는 교황과 독일 황제간의 권력 다툼,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격렬한 갈등과 논쟁, 교황과 지역 군주들 틈에 양다리를 걸친 수도회들, 중세 민중들의 저항과 고통 등을 다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과 영화에 많은 독자들을 몰입시킨 내용은 중세 수도원에서 필경 수도사들이 책을 만들던 과정이었다.

책의 형태를 띤 최초의 필사본, 코덱스codex
종이를 만들어 인쇄하는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에 책은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부터 오랜 세월 두루마리 방식에서 만들어졌다. 책이라는 말은 라틴어 리베르liber와 그리스어 비블리온biblion에서 유래했다. 리베르는 목재와 표피 사이의 얇은 껍질을 뜻하는 말이며 비블리온은 파피루스를 뜻하는 비블로스biblos에서 파생한 말이다.
이집트의 벽화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필사 작업을 하는 필경사들이 자주 나온다. 고대 소아시아 페르가논 도서관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두루마리로 된 50만권이 넘는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책의 형태를 띤 최초의 필사본, 즉 낱장을 함께 꿰맨 코덱스codex가 처음 출현한 것은 기원 후부터이고 2세기에서 4세기까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일반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때까지 씌여진 많은 성서 사본들은 파피루스 두루마리였다. 기원 후 4세기경까지 성서 사본을 만드는 데 양피지를 사용하게 되어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일이 줄어든다. 구약성서의 부분인 이사야Isaiah서의 사해 두루마리는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이다. 1947년 양치기 소년들이 사해의 북서쪽 기슭에 있는 키르바트쿰란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한 필사본 두루마리들을 발견하는데 이 때 발견된 것들을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라고 부른다. 사해의 두루마리는 히브리 성서를 포함한 900여 편의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들을 아우른다.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 작성된 이 필사본들의 발굴은 고고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힌다. 이 사본을 복원하여 학자들은 히브리어 성서가 확립된 시기가 AD 70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BC 4세기부터 AD 135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와 유대인의 종교 전통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밝혀낼 수도 있었다.
성서의 경우, 두루마리 책 1권으로는 마태오의 복음서 하나 정도를 베낄 수 있었지만, 보통의 코덱스 한 권에는 사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모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코덱스 1권에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모두를 담은 것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코덱스codex는 지금의 책과 비슷한 형태로 낱장을 묶어서 표지로 싼 것이다. 코덱스라는 단어 는 “나무의 줄기”, “나무 블록”또는 “책”을 의미 하는 라틴어 caudex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식물의 줄기를 찧어서 두루마리 방식으로 책을 만들어 일던 방식이 낱장을 묶어서 만드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코덱스 이전에는 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밀랍판(蜜蠟板)이 주로 사용되었다. 글이 씌어진 페이지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점에서 책 형태를 띤 최초의 필사본인 코덱스가 존재했던 것이다.
양피지와 코덱스 기술의 발전
코덱스는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두루마리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이 있었다. 두루마리는 원하는 내용을 찾으려고 할 때 일일이 펼치고 감아야 했다. 하지만 코덱스는 원하는 페이지를 쉽게 펼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코덱스는 페이지의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단 1권에도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양손에 들고 읽을 수도 있었으며 보존도 쉬웠다.
파피루스가 아닌 양피지를 사용하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이집트가 경쟁국이던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 파피루스를 공급하지 않은 정책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아이사의 필경사들은 가죽을 사용했다. 양피지parchment는 그리스어 pergament에서 온 말인데 페르가몬에서 나온 가죽이란 뜻이다. 낱장은 양이나 송아지, 염소, 가젤, 영양, 타조 가죽이 사용되었다. 코덱스의 재료는 송아지나 염소의 가죽을 씻어 늘여 며칠 동안 석회에 담가 두었다가 가죽을 꺼내 문지르면서 남아 있는 살과 털을 제거한 후에 석쇠 프레임에 널려서 말린다. 바싹 말린 뒤 다시 무드질을 하여 냄새를 없애고 낱장을 제작하였다.

벨룸vellum은 최고 품질의 양피지를 말하는데 아주 어린 송아지나 사산된 송아지의 가죽으로 만든다. 벨룸은 잉크가 번지지 않고 원래의 색이 보존된다는 특징이 있어서 아름다운 채색화를 그려넣기 위해서는 주로 벨룸을 사용했다. 물론 양피지 코덱스 책은 매우 비싼 가격이었을 것이다. 중세의 책들 중에는 사람의 피부로 만든 책들도 발견되고 있는데 가장 최근의 것으로 17세기의 것도 있다. 양피지는 깃촉펜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과 여러장을 접어 묶을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다. 중국에서 개발된 제지법이 유럽에 전파되고 구텐베르크 인쇄기가 출현하기 전인 14세기 이전 시대에는 양피지에 필사하고 묶어서 제본하는 코덱스 방식을 통해 책을 만들었던 것이다.
코덱스는 그리스나 로마의 유물로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중세 이전에도 사용되던 방법으로 판단된다. 유럽의 코덱스와는 별개로 멕시코 아스텍인들도 1000년경부터 코덱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스텍 코덱스는 그림이나 상형문자들로 씌어졌는데, 점성술로 미래를 점치거나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세금 징수 같은 행정적인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코덱스 방법이 확산된 것은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의 중세가 교황청과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변화하던 역사적, 문화적 환경과 관련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한권으로 두툼하게 만들어진 성경책을 좋아한다. 수요자의 니즈needs가 생산 방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가톨릭이 고대 후기와 중세시대에 책을 만드는 활동이 지속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수세기 동안 경전을 경외시해온 유대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손상되지 않는 재료에 기록하려던 노력에 따라 파피루스보다 튼튼한 양피지 코덱스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양피지로 된 코덱스가 쓰였으나 그후에는 종이로 된 코덱스가 더 널리 쓰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코덱스는 1844년에 성캐서린수도원에서 발견된 4세기 경에 쓰여진 그리스어 성서 필사본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이다. 5세기경에 만들어진 또 다른 그리스어 성서 필사본인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Codex lexandrinus』는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코덱스 출판 방식은 개발되어 곧바로 두루마리 방식을 대체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미 6세기 이후에 두루마리 책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코덱스 아우레오스codex aureus라는 말이 있는데, 무렉스murex라고 하는 자주색 물감으로 물들여진 종이나 양피지에 황금색 글씨로 씌어진 책을 뜻한다. 코덱스 아우레오스로서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대체로 8~9세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15세기경부터는 종이에 씌어진 원본들도 흔하게 발견된다. 성직자나 연구자들이 성서를 인용할 때 여러 경전을 찾아 비교 연구를 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그런 면에서도 많은 양의 책들을 펼쳐서 비교할 수 있는 코덱스가 더 편리했을 것이다. 가톨릭은 전세계 전도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수많은 성서 코덱스가 계속 제작됐을 것이고 국교화된 로마 제국의 시기이던 수백년 동안 많은 곳으로 확산되었다.

수도원 필경 작업장 풍경
5세기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 비잔틴 제국은 장서가 많은 도서관들이 번창했지만 유럽은 연이은 야만인들의 약탈로 책 보존은 크게 위협받았다. 로마의 지식이 안전하게 보존될 유일한 장소는 가톨릭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사회 혼란 속에서도 서적을 제작하고 도서관을 세우는 일을 맡았다.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성 골룸바노과 성 보니피키우스에 의한 아일랜드와 영국 선교와 수도원 건립 이후 수도원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된다.
대부분의 수도회들은 수도사들에게 독서와 율법, 성인전과 교황의 저술 등을 읽고 연구하고 기도와 노동하는 것을 평생의 의무로 강조했다. 수도원마다 도서관 가까운 곳에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생드니 수도원과 생마르탱 드투르 수도원, 독일 풀다 수도원, 스위스 생골 수도원처럼 규모가 큰 수도원들은 양피지 제작 과정에서부터 제본에 이르는 책 생산 공정 전체를 감당하는 시설이 내부에 있었다.

5세기에 로마가 멸망한 후 거의 1000년 이상 필경 기술은 수도사들이 독점했다. 중세 유럽에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필경사 수도사들은 창작자도 권력자도 아니었다. 글을 배꼈을 뿐 스스로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경사 수도사들은 서예와 그림을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 텍스트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품들을 베껴 쓰고 삽화를 그려 넣었다. 책의 편집과 제작을 통괄하는 스크리토리scritori와 필사를 담당하는 코피스티copisti로 구성되었다. 수도원들은 도서관과 필사실인 스크립토리움에서 끊임없이 서적을 필사하였다. 구술을 통해 여러 필경사가 동시에 같은 내용을 복사하던 로마 시대 상업적 출판 행위와는 달리 수도사들은 내용을 1부씩 베껴쓰는 방식이었습니다. 베껴쓰기가 끝나면 교정을 보면서 제목이나 주석 등을 달았고, 그후 채식자彩飾者의 손으로 넘어가 그림이나 기타 장식적인 부속물들이 보충되었으며, 마지막 단계로 제본이 이루어졌다.
수도원에서 필경 작업은 매우 조직적이고 엄격하게 분업화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기도시간에만 중단되었다. 종종 수녀들도 참가했으며 수련수사, 도제, 초심자들은 줄 긋는 일부터 했다. 11세기 『실로스 베아투스Beatus of Santo Domingo de Silos』를 필사했다고 알려진 콜로폰이 필경 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쓴 다음 글이 전해진다.
“필경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것은 눈, 척추, 위장, 옆구리, 아랫배 등을 모두 상하게 한다. 아니 온몸을 상하게 한다. 마지막 문장을 필경할 때의 심정은 오랜 항해 끝에 항구로 돌아온 선원의 해방감과 영원한 은총을 받는 느낌이다.”
필경 작업은 수도원의 주요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의 값비싼 주문은 재능있는 필경사들이 맡았을텐데 일부 수도사들은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아서 수도원에서는 그의 필경 작업을 중단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작업하려면 수도사의 재능을 하느임과 수도회를 위해서만 사용하겠다는 각서를 써야만 했다.
수도사들의 번역 저술과 스크립토리움의 활동으로 성경이 으뜸으로 많이 출판되었지만 성가집, 선인전, 교황들의 저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작품들이 번역, 출판 되었다. 12세기 즈음부터 도시들이 부흥하고 13세기에는 대학들이 계속 생겨나면서 책에 대한 수용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책 특히 성경을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판매하여 수익을 얻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수도사들의 필사 작업은 수도원의 중요한 활동이자 선교 활동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자용 기도서 모음인 성무일도서聖務日禱書는 14세기에서 15세기까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가장 유행하는 작품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보물, 켈스의 서Book of Kells
중세 그리스도교 예술 작품으로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는 가장 아름다운 책인 『켈스의 서Book of Kells』는 아일랜드의 가장 소중한 역사적 보물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서기 800년경에 제작된 이 책은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예수의 생애를 담은 『마태오의 복음서』, 『마르코의 복음서』, 『루가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등 4복음서와 예수의 전기, 그리고 몇몇 보충적인 텍스트가 680장의 최고급 양피지에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바깥의 세속과 격리된 아일랜드 수도원 필경사들의 이루어낸 예술의 절정이다.
『켈스의 서』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보관되어 있어서 매년 약 500,000명의 이 책을 보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 수많은 세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켈스의 서』를 구성하고 있는 아름다운 채색 그림과 장식들 덕분이다. 이 그림과 장식들에는 중세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하고, 그리고 예술성 높게 반영되어 있다. 다소 복잡한 장식 문양들은, 문단의 첫 글자나 초상화 주위로 배치되어 페이지 전체를 구성하는 경우로부터 시작해서, 글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는 아주 세부적인 부분에까지 이르고 있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 장식들은 페이지마다 빠지지 않는다.
이 책은 언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게 밝혀져 있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이러한 의문들은 연구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어떤 신비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프랑스의 예술사가 프랑수아즈 앙리Françoise Henry는 1974년에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켈스의 서』는 중세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 서양에서 작성된 가장 빼어난 필사본이다. 복음서의 텍스트 사이에는 채식이 들어간 커다란 페이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 채식은 화려한 색상의 장식 문양과 거의 기하학적인 직물 주름 속에 감싸인 종교적인 낯선 피조물이 서로 얽힌 것이다. 텍스트가 있는 페이지에서는 환상적인 피조물의 길게 뻗거나 휘어진 몸을 표현한 채식으로 만든 첫 글자의 다채로운 아라베스크가 즐비하다. 이 놀라운 문양의 탐구에 몰두한 연구자는 곧 힘과 신비한 느낌에 한꺼번에 빠져든다.”(프랑수아즈 앙리, 『켈스의 서』, New York: Alfred A. Knopf, 1974.)
『켈스의 서』는 장식 문양의 풍부함에 의해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필사본들과 구별된다. 양피지에 필사된 작품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첫글자, 이슬람 미술을 닮은 듯한 기하학적 무늬들로 구성되어 있다. 빨강, 노랑, 보라, 검정 잉크들을 주로 사용한 텍스트는 성상화 스타일의 지극히 미묘한 이미지들에 의해 장식되는 동시에 살아서 용솟음치는 느낌을 준다. 중요한 단어와 문장들은 두드러지게 만들어져 있으며, 텍스트는 세밀하게 만들어진 첫 글자들과, 고갈되지 않는 창의성을 증명하는 행간의 그림들로 인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채식이 이루어진 큰 페이지들은 각 복음서들의 도입부에서 복음서 저자들의 상징과 초상, 예수의 초상과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의 초상, 예수가 사막에서 사탄에 의해 시험에 드는 장면 및 예수가 체포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삽화를 보여 준다.
채색이 이루어진 큰 페이지들은 상당히 복잡한 구성과 성상 표현법을 보여 준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미사 전문표典文表(폴리오 1뒤-6앞), 복음서 저자들의 상징들을 모아 놓은 페이지(폴리오 1앞, 27뒤, 129뒤, 187뒤, 290뒤), 천사들로 에워싸인 아기 예수와 성모의 그림(폴리오 7뒤), 성 마태오(마태)의 초상(폴리오 28뒤), 예수의 초상(폴리오 32뒤), 성 요한의 초상(폴리오 291뒤),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복음서 관련 필사본에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예수가 사막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는 장면과 예수가 후일 로마 군사들에게 체포되는 장면(폴리오 114앞, 202뒤), 말타 십자가croix de Malte와 8개의 원형 초상(médaillons)을 나타내는 장식이 테두리에 들어 있는 페이지(폴리오 33앞) 등이다.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모노그램(monogram, 이 모노그램은 그리스어 ‘그리스도’의 첫 두 글자 카이(C)와 로(R)로 이루어진다)이 들어 있는 유명한 페이지는 예수 탄생에 대한 성 마태오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도입부 역할을 하고 있다(폴리오 34앞). 각 복음서의 첫 단어는 많은 장식이 이루어져 있다. 본문에는 매듭 무늬로 장식된 테두리와 물결모양으로 그려진 동물들이 나온다. 화려하게 꾸민 대문자들은 작게 쓴 본문들과 그림으로 표현된 글자들로 이어진다. 이 글자들에는 아일랜드 필경사들만이 표현한 둥글둥글한 글꼴이 적용되어서 각진 모양의 글자들을 좋아하던 유럽 대륙의 글꼴과도 구분된다. 원래 로마의 저술가들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아일랜든 필경사들은 글꼴을 둥글둥글하게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잔어들 사이에 뜨어쓰기를 적용하여 책을 읽는 이들을 배려한다.
바이킹, 아름다운 성서 출판의 막을 내리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복음서 제작은 7세기와 8세기에 바이킹들이 도착하면서 막을 내린다. 『켈스의 서Book of Kells』가 만들어졌을 시기의 아이로나섬에 806년에도 바이킹이 도착하여 수도사 68명이 살해당하고 825년에는 수도원장이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후에 아이로나 섬의 종교적 보물들은 아일랜드 해안에서 내륙으로 조금 떨어진 켈스Kells 지방 수도원으로 옮겨져 보관된다. ‘켈스의 서Book of Kells’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생긴 것이다.
바이킹에 대한 이야기는 중세의 민중들의 세계관과 판타지와 연관된다. 뿔이 달린 투구, 곰이나 늑대의 털을 뒤집어쓰고 싸우는 야만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바이킹Vikings은 게르만족 노르드인이고, 노르드어를 사용하며, 고향 땅인 스칸디나비아로부터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 북유럽과 중앙유럽까지 항해하며 교역하거나 약탈로 활보한 바닷사람을 부르던 말이다. 그들은 변장술을 통해 짐승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바이킹들이 썼던 원형 철모는 칼로 나무리 내리쳐도 끄떡 없었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바이킹을 무적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항해술이었다. 793년에서 850년에 이르는 시기 바이킹은 이교도, 강도, 약탈자로 악명을 날리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잉글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정보과 약탈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은 바이킹들이 만든 도시이다. 당시의 역사적 기록을 간단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793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의 수도원을 공격. 794년 잉글랜드 해안의 수도원들을 공격. 795년 아앨랜드 바다의 섬들을 공격. 799년 프리슬란트, 프랑스 해안 지역을 위협. 820년 아일랜드 정복. 843년 바이킹이 67척의 배를 타고 루아르강을 올라와 낭트 약탈. 845년 120척의 배를 타고 세느강을 올라와 파리 점령. 840척의 배를 타고 스페인을 지나 북아프리카로 감
애니메이션 <켈스의 비밀_The Secret of Kells>
2009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는 『켈스의 서Book of Kells』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형식과 책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낸 <켈스의 비밀The Secret of Kells>이 선보였다. 희망과 절망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애니메이션은 환상적 감동의 느낌을 공유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바이킹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에보트 수도원장은 다른 수사들과 함께 수도원 주위를 에워쌓는 벽을 짓는이야기로 애니메이션은 시작된다. 이때 아이오나섬에서 위대한 책을 기록한다고 알려진 에이단 수사가 고양이 핑거 반과 함께 바이킹을 피해 도망온다. 주인공 브랜든은 <켈스의 서>의 위대함을 깨다고 에이단을 도와주게 되고 책의 잉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열매를 얻지 위해 금지된 숲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산의 주인이자 짐승과 어린 여자아이로 변신할 수 아이슬링을 만나 우정을 나눈다. 바이킹은 도착하고 <켈스의 서>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위기가 발생한다.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