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3) / 춘래불사춘 - 박수현의 ‘비인칭인 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3) / 춘래불사춘 - 박수현의 ‘비인칭인 봄’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3.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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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3) / 춘래불사춘 - 박수현의 ‘비인칭인 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3) / 춘래불사춘 - 박수현의 ‘비인칭인 봄’

  비인칭인 봄
  
  박수현


  비인칭(非人稱)의 봄이 걸어간다
  팬지꽃 심는 아주머니의 엉덩이를 지나
  지하도의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황사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지하로 밀려가는 카디건과 스니커즈들
  이어폰을 꽂은 뒤통수가 한결같다
  파미에 파크, 메가박스, 엔터 식스, 센트럴시티
  반품된 시간과 리필된 계절들이
  날마다 리모델링되는 곳
  입술 없는 얼굴들이, 문수 지워진 발들이
  풍선 인형처럼 건들건들 환승 통로를 건너간다 
  해석되지 않는 애인과의 거리는 
  내일의 쇼핑 목록에 유보해 둔다 
  불법 포획된 밍크고래가 대형 스크린을 비행하고
  총선 후보들이 유언비어처럼 깜박이다 페이드아웃된다 
  무빙워크 위에서 어깨를 부딪치다 
  동시다발 삭제되는 비인칭(非人稱) 봄들
   
  재생 버튼을 누른다
  지하의 어디쯤 묻힐 발아되지 못할 씨앗처럼
  신상 웹을 다운로드 받는 거북목들이 
  손가락 하트나 날리는 손목들이 
  다시 삭제된다

  ―『샌드 페인팅』(천년의시작, 2020)에서

 

  <해설>

  봄이 오면 몇 차례 꽃샘추위가 온다. 그때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구가 생각났는데 올해는 기온이 크게 내려가지 않음에도 매일 으스스하다. 오늘이 경칩이 지나고 일주일째인데 춘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사망자의 수에 눈을 부릅뜨게 된다. 

  비인칭인 봄이라니, 부를 이름이 없다. 따뜻한 봄, 포근한 봄, 눈부신 봄, 만개한 봄, 현란한 봄……. 그 어떤 수식도 맞지 않다. 불러도 대답 없는 봄이여!

  이 시를 쓸 때 시인은 “황사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지하로 밀려가는 카디건과 스니커즈들”을 보았겠지만 지금은 황사마스크가 아니라 코로나 방지 마스크요 생명 마스크다. 봄 풍경 묘사는 어디 가고 “반품된 시간과 리필된 계절들이/ 날마다 리모델링되는 곳”에 이르면 시의 색조는 더욱더 회색빛을 띤다. 봄이 되었으니 꽃가게와 옷가게 앞이 사람들로 붐벼야 할 텐데 웬걸, “입술 없는 얼굴들이, 문수 지워진 발들이/ 풍선 인형처럼 건들건들 환승 통로를 건너간다”. 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울하다. 홍준표ㆍ김태호ㆍ이주영ㆍ신창현……. “총선 후보들이 유언비어처럼 깜박이다 페이드아웃된다”는 것도 딱 맞다. 

  ‘비인칭 봄’들이 동시다발로 삭제된다면? 재생 버튼을 눌러도 재생되지 않는다면? 시의 제2연이 보여주는 비극적 현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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