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4) / 전화기는 나의 메신저 - 정병근의 ‘나와 나타샤와 전화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4) / 전화기는 나의 메신저 - 정병근의 ‘나와 나타샤와 전화기’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3.1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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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4) / 전화기는 나의 메신저 - 정병근의 ‘나와 나타샤와 전화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4) / 전화기는 나의 메신저 - 정병근의 ‘나와 나타샤와 전화기’

  나와 나타샤와 전화기 
  
  정병근


  아름다운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 있거나 안 받습니다. 그녀는 일단 안 받고 난 뒤에 전화를 되겁니다. “혹시 전화하셨어요?”

  나의 전화기는 고요합니다. 어쩌다 휘파람 소리를 열면 제발 돈을 준다거나 ‘비아+씨알+죽음’ 같은 문자들입니다. 나는 전화를 걸 때마다 혼신을 다해 안 받힐 각오를 합니다. “행복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아름다운 그녀는 나를 앞에 두고도 바삐 손가락을 놀립니다. 나는 그녀의 손 안에 전폭적으로 사무칩니다. “방금 올렸어요.” “지금 댓글 달게요.” 

  아름다운 그녀는 바쁩니다. 전철은 핑계고 다른 곳에서 새벽까지 마실 참입니다. “홍대 앞으로 가주세요.” 택시 안에서도 그녀의 전화기는 바쁩니다.
 
  나는 위대해지리라 다짐합니다. “미안해요. 먼저 일어나볼게요”라든가, “바빠서 오늘은 어렵겠네요”라는 말을 아름다운 그녀에게 꼭 돌려주고 싶습니다. 나는 나다운 것이 도무지 싫어서 “야야, 어이… 엇엇” 중얼거리며 늦은 집으로 기어듭니다.

  “잘 들어갔어요? 어제는 취해서 미안해요.” 아름다운 그녀에게 문자를 띄우고 하루 종일 대답을 기다립니다. 오늘은 눈이 왔다고 하얀 풍경을 찍어 올리며 벙긋벙긋 전화기를 열어봅니다.

  ―『눈과 도끼』(천년의시작, 2020)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4) / 전화기는 나의 메신저 - 정병근의 ‘나와 나타샤와 전화기’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정병근 시에는 크나큰 장점이 있으니 유머센스다. 위트가 있어서 입가에 미소를 머물게 할 수 있다. 백석의 대표작인 「나와 나타샤외 흰 당나귀」를 변용한 이 시도 읽는 내내 환상의 여인(?)인 ‘아름다운 그녀’의 언행이 우스꽝스럽고 귀엽기도 해 미소를 입가에서 지울 수가 없다. 그녀는 화자보다 술을 더 잘 마신다. 새벽까지 예사로 마시니 술꾼인가 보다. 

  화자는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다. 스마트폰에다 문자를 띄워놓고 하루 종일 대답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얼마나 설렐까 짐작이 간다. 나와 아름다운 그녀 사이에서 내 마음을 전해주는 메신저인 전화기가 없다면 나는 자살할지도 모른다. 장정일은 젊어서 샴푸의 요정에 사로잡혔지만 정병근은 내일모레가 환갑이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심히 걱정된다. 홍대 앞에서 술을 마신다면 그녀의 나이가 시방? 나이 차이는? 하하, 시인과 시적 화자를 동일인으로 착각했다. 

  사실 이번 시집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고백이 종종 나온다. 아내에게 무슨 책잡힐 일을 했나 보다. 술을 마시면서 그의 진심을 들어보아야겠다. 술 권하지 않는 세상, 정병근 시인의 주사가 나는 그립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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