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5) / 사람의 목숨 - 박재삼의 ‘노안’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5) / 사람의 목숨 - 박재삼의 ‘노안’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3.1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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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5) / 사람의 목숨 - 박재삼의 ‘노안’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5) / 사람의 목숨 - 박재삼의 ‘노안’ 

  노안(蘆雁)
  
  박재삼


  그 많은 기러기 중에
  서릿발 깃에 짙은
  애비도 에미도
  그 위에 누이도 없는 
  그러한 기러기놈이 
  길을 내는 하늘을!

  하늘은 비었다 하면
  비었을 뿐인 것을
  발치에 가랑가랑
  나뭇잎 묻혀 오는
  설움도 넉넉하게만
  맞이하여 아득하여.

  사람이 지독하대도
  저승 앞엔 죽어 오는
  남쪽 갈대밭을
  맞서며 깃이 지는
  다 같은 이 저 목숨이 
  살아 다만 고마워.

  그리고 저녁서부터
  달은 밝은 한밤을
  등결 허전하니
  그래도 아니 눈물에
  누이사 하마 오것다 싶어
  기울어지는 마음.

  ―『내 사랑은』(영언문화사, 1985)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5) / 사람의 목숨 - 박재삼의 ‘노안’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제목 노안(蘆雁)은 갈대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즉 외로운 처지에 놓인 화자 자신을 가리킨다. 이 시조가 실려 있는 시조집이 발간된 해는 1985년이었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해는 1956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화자는 전쟁통에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와 헤어졌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는데 문제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저 기러기는 이쪽 하늘과 저쪽 하늘을 오갈 수 있지만 사람들은 휴전선을 넘을 수 없다. 

  ‘사람 목숨만큼 지독한 것도 없다는데’ 생각하면서 화자는 누이를 기다린다. 대체로 우리 시문학사에서는 여성 화자가 남성을 기다리는 것으로 설정한 ‘그리움의 시편’이 많았는데 이 시조는 그렇지 않다. 오빠나 남동생이 누이를 기다리는 정황을 그리고 있다. 누이가 북에 있어서 못 내려올 수도 있지만 남쪽에서도 전쟁통에 헤어진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박재삼은 “남쪽 갈대밭을/ 맞서며 깃이 지는/ 다 같은 이 저 목숨”이라고 했으므로 남북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이산가족의 상봉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지만 연로하신 많은 이산가족의 소망은 같을 것이다.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노안(老顔)에 슬픔이 노안(蘆雁)처럼 내리고 있을 게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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