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38) / 철조망 근처의 로맨스 - 배종환의 ‘철조망’
철조망
배종환
철조망은 무섭지 않았다 그보다 여군 중사 출신이 한다는 대폿집 불빛이 어른거릴 때 당직 사관이 침투해 이 이병이 죽을 만큼 코피를 쏟았다는 말이 무서웠다
누구든 불빛만 보다가 발소리를 죽인 완장에 걸리면 소대원 전체 낮은 포복, 일렬종대로 게양대 둘레를 팔꿈치로 기어가야 했다
탈영하였다 남은 복무 기간 채우던 박 상병은 삼십 대였다 아이들과 말 섞는 일 없다 그러나 부탁하면 해결해주는 보급계다 코피를 쏟아낸 이 이병 보초 근무 때 막걸리 주전자 든 아가씨가 왔다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기생들은 여름밤 철조망을 좋아했다 불빛 아래 오줌 싸는 아가씨를 불러 단숨에 마신 반 되의 트림 냄새를 쉽게 잊지 못했다 생라면 부셔 씹는 입맛을 그리워했다
무서운 소문은 큰 달이 뜬 날, 애인 얼굴이 떠올라 총을 메고 철조망을 넘었다는 이 일병을 보지 못했다 내무반 지키던 박 상병 빼고 소대원 전체 따갑게 욱신거리는 엉덩이를 들고 선착순으로 먼지와 함께 기어다녔다
가을이 오도록 잡혔다는 소식 없어 계속 기어다녔다 그렇게 철조망 너머 불빛이 가물거릴 때 중고참으로 보초 순번이 좋아진 동기생과 영창에 있는 이 일병, 탁 터진 엉덩이 살도 굳어 갔다
―『향기로운 네 얼굴』(서정시학, 2020)

<해설>
예전에는 군복무 기간이 3년이었다. 복무 기간이 길다보니 탈영병도 간간이 있었다. 바깥세상의 애인이 마음을 바꾼 경우, 병사는 탈영할 확률이 높아진다. 너를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새 고무신을 바꿔 신어? 담판을 지어야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병사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탈영했다가 다시 입대, 남은 복무 기간을 채운 박 상병의 사연이 딱하다. 총을 갖고 탈영한 이 일병은 오래 숨어 있어서 그 동안 소대원들이 매일 얼차려를 받는다. 꽤 오래 탈영했기에 이 일병은 영창에도 오래 있었을 것이다. 엉덩이도 많이 맞았을 테고.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무진장 하고 싶어 한다. 아주 힘겨운 통과의례였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해도 밤새 할 얘기가 남아 있다. 지금 병사들은 철조망 근처의 러브스토리를 알 턱이 없다. 깨면 머리가 무진장 아픈 주전자 막걸리를 알까? 생라면을 부수면 안주가 되는데 스프랑 함께 부숴 먹는 그 맛을 알까? 송병수의 「쇼리 킴」을 읽는다면 이 시의 분위기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철조망 근처에서의 로맨스에 대해서는 시인을 만나 물어보아야겠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