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49) / 어미의 죽음과 아들의 삶-박지현의 ‘문상’
문상
박지현
팔순 어미 잘 어르던 얼굴 까만 아들의
그 갈비뼈 눌린 아픔 곧잘 솎든 어무이가
불볕의 마른 장맛날
새벽녘에 떠났다
달맞이꽃 채종유가 가을 들판 익혀낼 때
깨알의 씨앗 틔운 어무이 해진 가슴은
그 사내 떠난 적 없던
이맛돌 구들이었다
평생 일군 농사가 씨알 굵지 않아도
엎드려 땅을 일군 불거진 손마디는
풋내 난 소복한 소반
칠흑 밝힌 기름종지였다
부의라고 쓴 봉투에 얼굴 까만 아들의
그 손 안 닿는 외로움 꽃물 들이던 어무이를
먹먹히 밀어넣었다
윤오월 보름이었다
―『2018년 통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해설>
두 사람의 생애가 정리된다. 팔순 어머니와 농사꾼 아들. 한여름 마른 장맛날 얼굴 까만 아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연로한 어머니와 가난한 농사꾼 아들은 사이가 참 좋았나 보다. “그 손 안 닿은 외로움”이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인가, 다른 형제가 없어서인가. 아니, 아들이 장가를 가지 않은 채 어머니를 평생 봉양하며 농투성이로 살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가야 할 길로 간 것이지만 아들은 이제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었다.
‘어무이’는 문맹이었을 것이다. 이 시조의 빛나는 부분은 “달맞이꽃 채종유가 가을 들판 익혀낼 때”나 “깨알의 씨앗 틔운 어무이 해진 가슴” 같은 은유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에 있다.
내 외할머니는 성경을 매일 읽으며 살아가신 인텔리였는데 친할머니는 한평생 문맹이었다. 글씨를 못 읽었지만 교과서ㆍ참고서와 소설책ㆍ시집을 구분하는 것이 신기했다. 전자는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좋은 책이고 후자는 성적을 떨어뜨리는 나쁜 책이었다. 나쁜 책을 몰래 감추곤 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40년이 되었다. 이 시의 모델이 된 분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갔으리라. 문상을 가서 시의 소재를 얻는 박지현 시인은 그해 큰 문학상을 받았다. 나도 문상을 많이 갔음에도 왜 그간 좋은 시를 못 썼을까. 가슴을 치며 후회한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로소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