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52) / 40년 만의 귀환 - 장석의 ‘사랑의 처음’
사랑의 처음
장석
맨 처음
질그릇에 물을 끓여
고단한 나그네에게 마시게 한 사람
뼈바늘로 가죽을 기워
내 먼 조상에게 입혀준 사람
당신의 얼굴과 눈을 보며
사랑을 나눈 사람
첫 숫눈은
끓는 바다에 내렸으리라
숲에서 새가
새로 배운 휘파람을 불었을 때
당신을 일으켜
등에 붙은 흙과 풀잎을 떼어주고
다시 안았던 사람
흰 잇바디와
입술과 혀가 함께 불렀던
서툰 노래
세상의 첫 아침
그 이전의 미지
노래와 사랑과 흰 눈
흰 눈 내리던 그대
―『사랑의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강, 2020)

<해설>
1980년대 신춘문예 당선 시 중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작품은 1980년도 조선일보 당선작인 「풍경의 꿈」이다. 이 시를 거의 매년 학생들에게 복사하여 나눠주고 낭독을 시켰기에, 암송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한낮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 보았다. 나의 것인 뜨거운 꿈 하나가/ 그 근처에 벌써 앉아 있었다.”로부터 시작하여 “새여,/ 슬픔의 첨탑 위로 떨어지는 푸른 입술이여……”로 끝나는 이 시에 대해서는 예전에 논한 바 있으니 생략하고.
40년 동안 당선작 외에 1편의 시도 안 보여주던 시인이 150편의 시를 2권의 시집으로 묶어 출간, 장고처럼 석양의 시단에 등장하였다. 등단 직후, 홍안의 청년이었던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지금껏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2권의 시집으로 만나게 되었으니 반갑기가 황홀할 정도다.
이 시는 화자가 처음 사랑을 느낀 대상을 떠올리며 그 사람의 면면을 추억하고 있다. 그랬었지, 그런 인상이었지, 그렇게 처음 마음을 확인했지, 몸을 확인했지, 아직도 기억하지, 그 입술과 혀를……. 제6연이 절묘하여 무릎을 친다. 당신이 누운 것인가 당신을 눕힌 것인가. 흰 잇바디와 입술과 혀로 부르는 노래는 어떤 노래인가. 사랑이 ‘행위’로써 이루어진 그날은 세상의 첫 아침이었다. 그 이전의 일들은, 그 이전의 세상은, 내 몰랐었고, 알 바 아니다. 이 세상이 노래와 사랑과 흰 눈으로 그득했는데, “흰 눈 내리던 그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나 이제 죽어도 되는 것이다.
같이 나온 시집 『우리 별의 봄』을 읽고 있자니 왜 이리 심사가 아픈지 모르겠다. 그해에 많은 분들이 광주에서 돌아가셨는데 올해 또 이렇게 많은 이가 질병으로 작고하고 있다. 노아의 세 번째 비둘기는 황금빛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는데 세상은 과연 설레는 분만의 풍경을 보여줄까. 우리 별에 봄다운 봄이 하루빨리 오면 좋겠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