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61) / 상처에 대한 기억 - 김이안의 ‘종이에 베이다’
종이에 베이다
김이안
스윽-
종이 한 장이 스친 순간
손끝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비어져 나왔다
물고기 비늘처럼 돋아나는
비릿한 통증
오후 두 시의 나른한 날빛 속에
희끗, 그의 흰 등이 보인다
사라진다
뒤늦게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삼킨다
베인 줄도 모를 만큼 무뎠고,
무뎌야만 했을 것이다
나를 오랫동안 끌고 다닌 것은
모호한 실금들,
나는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했다
그리고, 질문하지 않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윽-
붉은 핏물을 닦아낸다
나는 하얀 종이처럼 스쳐 지나가기로 한다
―『제비무덤』(시와표현, 2019)

<해설>
여러분들도 종이에 손을 베인 적이 있었나요? 종이 한 장이 날카로운 칼인 양 사람 손에서 피가 나게 합니다. 사람이란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기도 하지만 그 얇은 종이에 손을 베어 “비릿한 통증”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그’는 누구일까요? 종이를 ‘그’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화자가 마음에 둔 사람이라고 가정을 해봅니다.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고 할까요? 등만 보이고 사라졌는데 화자는 혼자 아파하고 있습니다. ‘흰 등’이 눈치를 못 채게, 화자 혼자 아파합니다. 화자의 상처는 실은 ‘그’로 말미암은 것, 하지만 나는 “베인 줄도 모를 만큼 무뎠고,/ 무뎌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했으니, 짝사랑을 했다는 것일까요?
김이안 시인의 의도는 무엇인지 정확히 감지되지 않는데, 해설자 나름대로 해본다면 이렇습니다. 짝사랑의 이유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았고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시치미를 떼고, 붉은 핏물을 닦아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문장 “나는 하얀 종이처럼 스쳐 지나가기로 했다”에 이르는데, 이 영혼의 상처가 또다시 안으로 아물기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겠지요. 이 시를 연시로 이해한 것이 오독일지라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어찌하리오. 이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많지 않습니까. 혼자 가슴 앓는 사랑, 한 번은 하고 죽어야 할 텐데…….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