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부터 정우신 시인, 조율 시인, 이병국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07_569.jpg)
[뉴스페이퍼 = 송진아 기자] 지난달 인천의 동네책방 ‘서점안착’에서 세 명의 시인이 만났다. 서점 인근에 사는 조율, 정우신, 이병국 시인은 각각의 생애를 담은 시편들과 시시콜콜하고 진솔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마주했다.
![낭독을 들은 후 박수치는 조율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08_5640.jpg)
본명으로 동화를, 필명으로 시를 쓰는 조율 시인은 작년 2019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에 선정된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속 표제작을 첫 번째 낭독시로 소개했다. 20대 초반 첫 출근을 앞두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그녀가 파견직 노동자로서의 힘든 삶을 지낼 때, 유일한 돌파구는 ‘글’이었다.
이제껏 비가 왔던 모든 날들을 수납한다
욱여넣을 문갑 한 칸 찾을 수 없다
당분간 엄마가 아침 드라마를 괜히 끊는다
햇볕 찾아오는 어느 날 가사까지
지어올 리 없다
오늘을 오늘처럼 사는 처세술서
한 권쯤 갈아 마셔야 가늘게 산다
마르지 않은 수많은 어제들 말리느라
건조해져 어제조차 건너올 수 없다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중에서.
“쓰는 행위가 내겐 치유이자 타인의 삶을 향한 관심이다.”라고 말하는 조율 시인의 어린 시절 ‘지하 단칸방’의 기억이 담긴 시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는 말실수에서 착안한 독특한 문장으로 시집의 타이틀을 겸했다. 시인은 “지하방에서 본 흐린 하늘과 무언가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서늘한 시간의 기억을 담았다.”는 말로 시를 설명했다.
![시를 읽는 정우신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09_5932.jpg)
인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정우신 시인은 ‘밀항’이라는 시로 자신이 만나 온 인천의 바다, 월미도, 지하철역의 풍경을 재현했다. 시인이 “인천에서 자라면서 나이에 따라 쌓인 여러 기억을 층층이 겹쳐놓고 이미지로 구현”한 시 ‘밀항’의 출발선에는 세월호 아이들을 기리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더 살아야 한다
생각하면
모든 비유가 쓸모없는 것 같다
냉동 창고에 떨어진 생선 눈알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
나는 거짓말을 한다
바닷속 풍경이 풀어지는 것 같지?
너희처럼 아른거리는 것 같지?
-‘밀항’ 중에서.
정우신 시인은 “항구의 반짝이는 빛과 항로를 보며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며 “육지도 바다도 아닌 경계에서 유랑하는 아이들을 이야기하려다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책방 ‘서점안착’의 한 정거장 거리에 산다는 그는 최근 ‘차세대 예술가’로 선정되어 “도넛 시티”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낭독회 당일에는 시집 “비금속 소년”으로 독자들을 찾았다.
![이야기를 전하는 이병국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10_334.jpg)
시와 평론을 쓰는 이병국 시인 역시 인천 출신으로 고향을 다룬 시 ‘강화’를 통해 어릴 적 기억의 파편을 겹쳐놓았다. 낭독을 마친 시인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강화에서의 삶, 어렸을 때의 삶이 문학적 자산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의 기원을 돌아보고 조합하고자 쓰인 시다.”라는 말로 작품을 소개했다.
페달을 돌리면 시간이 자꾸만 거꾸로 갔다 담 너머로 둘둘 말린 신물을 던지며 골목을 누비던 나는
멀찌감치 떠돌고
한 달 이만 오천 원을 받으면 오천 원은 적립금이라고 돌려줬다 점장은 받은 돈을 자기 뒷주머니에 넣고
도둑질은 나쁜 일이라 배웠다 나도 따라 뒷주머니에 수금한 돈을 넣었다 영수증은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점장이 오 학년 일반 교실 뒷문을 열었고 나는 삼층에서 뛰어내렸다
(중략)
생각하는 사이,
나는 나이를 또 먹어 곧 아버지보다 형이 될 거였다 곧장 형이라고 대거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환마마보다도 무섭다는 비디오 경고문을 빨리감기하듯 내 속에서 비워진 말들이
지금에 쌓여 있듯이
귀갓길에 뒤를 돌아보며 허둥댔다 쫓아올 이 없는 여기가 한 걸음 앞에서 헛돈다
단단해져야지,
말하는 나는
잃어버린 자전거에 앉아 있다
그러고 보면 발이 닿지 않아서 좋았다
- ‘강화’ 중에서.
그는 “국민학교 시절 신문을 돌리고 2만 5천원을 벌면, 적립금이라는 명목으로 5천원이 공제됐다. 이를 직접 수금한 돈으로 몰래 채웠다. 그때의 기억과 그 무렵 아버지의 모습 등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며 창작에 얽힌 사연을 밝혔다.
이병국 시인은 이어 “1년에 한 번 아버지 기일에 강화를 찾으면 산이 사라지고 대형 교회가 들어섰다. 그런 변화를 보니 나라는 존재의 기원이 없어지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단단해져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화’란 중의적 표현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낭독회 중인 서점의 모습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11_429.jpg)
세 시인의 세심한 이야기에 서점에 모여앉은 독자들은 저마다 소감을 밝히거나 특히 인상 깊은 시를 골라 ‘앵콜’ 시 낭독을 요청했다. 희곡을 쓴다는 한 관객은 ‘글을 쓰다 길을 잃을 때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이병국, 정우신, 조율 시인이 각각 자신의 비법을 전하기도 했다. 그중 시 10년, 평론 20년의 습작기를 거쳐온 이병국 시인은 과거 글을 쓰다가 벽에 부딪혔을 때를 회상하며 ‘잠시 멈추고 쉬어가기’를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했다.
자신을 국어 선생님이라고 밝힌 관객은 “사실 처음 시집을 펼쳤을 때는 ‘어렵다’, ‘해석이 잘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시인의 목소리로 배경을 들으니 문장, 단어 하나하나가 더욱 잘 와닿아 마음이 울컥했다.”라며 “아이들의 교과서에도 시인의 해설이 있으면 좋겠다. 혼자 읽을 때는 몰랐던 걸 알게 되고 그 순간부터 집중하게 되는 감사한 시간이었다.”라는 말로 낭독회의 의미를 되짚었다.
![낭독회 중인 서점의 모습 [사진 = 이민우 기자, 편집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12_456.jpg)
이날 ‘서점안착’에서 열린 낭독회에는 동네를 거닐다 통유리창 너머의 모습을 보고 들어온 주민을 포함해 다양한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봄날, 시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시간을 채워나갔다.
![정우신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13_519.jpg)
![이병국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news/photo/202004/75178_47215_66.jpg)
“저에게 ‘시’는 ‘곁의 문학’이에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변혁의 가능성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서정의 형태로 다른 이에게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줄 수도 있죠. 제가 생각하는 ‘시’는 어떤 상황에서든 누군가의 곁에 나란히 앉아있는 존재예요.”
-낭독회 중 시 ‘토렴’을 소개하는 이병국 시인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