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훈 칼럼]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 중세 유럽 길드의 탄생
[공병훈 칼럼]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 중세 유럽 길드의 탄생
  • 공병훈 교수
  • 승인 2020.04.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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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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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도시와 시민들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거듭된 십자군 전쟁으로 중세 유럽에는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돈이 필요해졌다는 사실이다. 자급자족 경제를 기본으로 하며 물물교환하던 방식이 없어지고 돈을 가지고 온갖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시장이 열리는 곳은 성벽이나 탑으로 보호된 성채 근처에 열렸다. 이곳이 와서 장사하며 사는 사람들은 봉건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은 시민들이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Stadtluft macht frei 또는 “1년하고 하루를 지내면 도시의 공기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장사를 하며 지내던 시민들은 왕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아도 되었다. 봉건 영주나 성직자가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제한적이었고 그들도 돈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중세 유럽에는 각 지역의 시장을 찾아다니던 상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곳에 정주하지 않고 무리를 지어 먼 거리에 걸쳐 이동하였다. 10세기 경에 그들은 성채城砦와 수도원, 교회 근처에 정착하여 부근에 있는 농촌에서 내왕하는 수공업자까지도 합쳐 시장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마을을 형성하면서 중세도시로 발전한다.

중세 도시의 시민들을 제3계급이라고 불리었다. 제3계급에는 11 세기부터 옛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의 해방 된 농노들도 가세하였고 유럽의 여러 곳에 새로운 정착지를 세웠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의 주민들은 당시 관습법에 의해 1년을 초과하는 날로부터 이전의 신분과 상관 없이 도시민으로 인정받았다. 가혹한 봉건 영주에 저항하던 농노들은 자유를 위해 도시로 탈주하는 이야기가 중세 유럽의 많은 기록과 문학 작품에 전해진다.

프랑스를 예를 들자면 프랑스 혁명 이전 프랑스 왕정 하의 계급은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제1계급은 성직자, 제2계급은 귀족, 제3계급은 평민이었다. 왕은 신분을 초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3신분은 성직자도 귀족도 아닌 도시민urban과 농촌민rural로 나뉜다. 도시민에는 프랑스 인구의 8%를 차지하는 부르주아지가 포함되어 있었고, 장인과 같은 임금 노동자도 이 분류에 속하였다. 농촌민에는 소작농과 농장 신분이며 이들이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15세기 독립적 도시였던 뉘렌베르크를 그린 목판화

제3신분에는 도시의 신진 부르주아지와 같은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3신분을 연대하게 해 주었던 것은 대부분 부가 축적되지 않았고, 다른 신분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높은 세금을 강요당하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는 가도를 통해 제국을 관리하였으며 가도의 허브와 같은 지역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동업자들은 일정 구역에 모여 ‘콜레기아collegia’라는 이름으로 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고대 로마 말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판단된다. 길드의 기원이 되는 콜레기아는 중앙 정부가 인가를 내리고 행정장관이 감독하도록 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이래로 제국정부는 공권력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이 길드들을 계획적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수공업과 상업을 자금 조달과 징세 목적으로 통제하려던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도 콜로기아에 대한 내용이 있다.

수도회인 예수회의 수도학원을 콜레기아라고 불러왔고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을 칼리지라고 부르는 것도 콜레기아에서 유래한다. 결국 동업자의 거리와 시장이 한 도시에 공존하던 풍습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파리에는 미장이 거리, 소금 거리, 푸줏간 거리, 마구 거리, 금은 세공 거리, 닭 거리, 모피 거리, 유리 제품 거리 등이 있었습니다. 환전상의 거리는 각 나라의 돈을 바꾸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출의 형태를 띤 거래도 해했던 흔적이 있는데 오늘날 금융 시장의 효시가 되었다.

브라반트 공국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1559년 작품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

동업자들의 거리와 중세 도시 풍경

브뤼헬(Pieter Brueghel de Oude, 1525-1569)은 농민의 화가라고도 부른다. 변장을 하고 현장의 한복판에 끼어들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앉아 관찰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고 한다. 중세에는 종교적 기념일에 한하여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장터를 허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중세 도시는 비좁은 골목과 협소하고 높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곳에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가족과 함께 모여 살았다. 교역의 범위가 넒어짐에 따라 상인들은 무장한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다녔고 성에 있던 기사들의 약탈에 저항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2세기에 문화적•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이 시대에서 찾고 있다. 경제력의 중심은 서서히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딕양식이 발전했다. 도시가 번창하고 여행과 교통은 더 신속하고 안전하고 손쉽게 되었으며 상인계급이 발전했다. 농업의 발전도 밑바탕이 되었다. 12세기에는 콩의 경작이 이루어져 사상 최초로 모든 사회계층이 균형 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것은 결국 낡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다.

13세기는 중세 문명의 절정기였다. 고딕식 건축과 조각의 고전적 정형이 확립되었고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사회적 단위 등이 생겨났다. 길드라든가 조합, 시회의, 수도회 등이 결성되어 각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적 대표 개념이 발달하여 자신들을 선출해준 공동체와 결부된 문제에 관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회의체가 생겨났다.

13세기에 겪은 유럽의 변화는 큰 변화를 겪으면서 강력한 힘을 가진 도시들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황제와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변는 십자군 전쟁 덕분에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진 독일과 북부 유럽에까지 확산되었다.

점차 상인들은 특정 도시를 생활터전 겸 영업활동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상품 운송 같은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게 되었다. 상인들의 조합은 곧 빈틈없이 조직화되었고 시정부의 인가를 받아 합법화되었다. 이들 상인 길드는 장거리 교역과 시내 거주민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영업활동에 있어서 회원들의 상업을 규제하고 보호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길드는 식품•의류를 비롯한 그밖의 필수품의 배분과 판매를 통제함으로써 지방의 상업을 독점하게 되었다. 외국의 상인이나 무역업자들이 어떤 지방의 상거래에 참여하려면 그곳의 길드에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어떤 외부 상인들은 그 상거래에 참여하는 것이 아예 금지되기도 했다.

네덜란드 화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Petrus Christus, 1410-1472의 <작업장의 금세공인>(1449)

하느님의 수공업과 상인들의 조합

상인 길드는 특정 마을이나 도시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의 전부 또는 대다수가 참여하는 조합이었으며, 조합원들은 지방 상인이거나 원거리 무역상인일 수도 있고, 도매상이거나 소매상일 수도 있고, 취급하는 상품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도 있었다. 국왕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사업을 독점하고 상품의 품질 저하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조합원 자격을 제한하도록 하였으며 품질 검사, 수출입 단속, 동업자들끼리의 쟁의 중재나 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장악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상인과 수공업자 들 사이에는 춘프트Zunft라는 동업자 조직인 상인 길드가 형성된다. 상인 길드의 발생은 북부 유럽의 상인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브레멘Bremen의 상인들은 965년 황제 오토 1세부터, 그리고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상인들은 975년 황제 오토 2세부터 제국 전체에서의 교역 자유와, 약간의 도시를 제외한 지역에서의 관세면세의 특권을 받았다. 프랑스 도시 발랑시엔Valenciennes은 1050~1070년 동안 길드 특허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생토메르는 1072~1083년 동안에 상인 길드 규약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바포드와 캔터베리, 독일의 쾰른과 민덴고스랄, 벨기에의 브뤼주 등에는 11세기 말~12세기 초엽에 상인 길드가 발생하여 그후 현저히 그 수가 늘어났다. 발랑시엔 및 생토메르의 길드 특허장에 의하면, 상인 길드 결성의 동기가 된 것은 길드 구성원의 상호 부조였다.

중세 유럽의 상공업은 길드가 주체인데 수공업자나 상인들이 상호 부조와 보호 및 직업상의 권익 증진을 위해 결성한 조합이다. 길드는 11~16세기에 유럽에서 번성하여 경제적•사회적 구조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었다. 길드는 회비를 내거나 기부한다는 뜻의 ‘Gild’ 또는 ‘Geld’가 어원으로 덴마크나 독일에서도 기부 행위가 선행되는 조합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길드가 동업자들끼리의 우호적인 모임에서 공업이나 상업의 동업 조합적인 성격으로 변한 것은 12세기 경부터이며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제조업 길드보다 상인 길드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 공업 길드는 특정 산업의 모든 기술자와 장인을 포함하는 직업 조합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모직업에는 직공織工•염색공•축융공縮絨工 등의 길드, 건축업에는 석공石工•건축기사 등의 길드가 있었고, 도장공塗裝工•금속세공인•대장장이•제과기술자•푸주한•무두장이•비누제조공 등의 길드가 있었다.

독일 상인 게오르그 기제의 초상화

독일 상인 게오르그 기제Georg Gisze의 초상화는 1532년에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작품이다. 한스 홀바인은 화가로서 기술과 역량이 한창 무르익은 나이였고 헨리 8세의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게오르그 기제는 한스 홀바인에게 높은 가격을 지불했을 것이다. 탁자에 있는 돈통과 생화를 담은 유리병은 그의 경제적 수준을 보여준다. 중요한 매매 계약서들로 보이는 문서들이 있으며 그의 복장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매우 단정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뒤에 보이는 매우 작은 저울은 그가 보석을 거래하는 상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한다.

길드는 주 폐쇄적인 집단으로서 기사단과 다름 없는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도제로 일해야 했고 직인이 되면 낯선 도시와 다양한 직업 방식으로 경험하기 위해 먼 거리를 떠나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고향 도시로 돌아왔고 때로는 장인을 필요로 하는 타향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길드는 일거리에 비해 많은 장인을 배출되지 않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예를 들어 재단사 직인은 자심의 솜씨를 발휘하여 멋진 외투 명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엄숙한 의식을 거켜 재단사로 임명되어 길드에 속할 수 있었다.

길드는 지역경제에서 여러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소재지에서나 특정의 산업에서 거래의 독점 체제를 수립하고, 상품의 질과 거래 관행의 보전을 위한 기준을 세우고 유지했으며, 거래 상품과 필수 일용품의 안정된 가격의 유지를 위해 힘쓰고, 조합원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그들의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읍이나 시 정부를 통제할 수단을 강구했다.

13세기까지 서유럽의 상인 길드에는 그 지방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시민들이 속하게 되었으며, 12~13세기에 많은 도시가 자치 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길드들이 그들의 시의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길드들은 모든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법안들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톨릭 교회

기사단처럼 길드는 나름의 규칙과 알록달록한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길드의 회원은 서로 도와야 했고 다른 회원을 흉보거나 손님에게 질 나쁜 물건을 제공해서는 안되었다. 자신의 직업과 도시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기사들이 하느님의 전사이듯이 길드는 하느님의 수공업자, 상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단들이 성지 탈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처럼 시민과 수공업자들은 도시에 교회를 세우는 데 자신의 재산과 노동력을 아끼지 않았다. 크고 아름답고 화려한 교회는 도시의 자랑거리였고 시민과 길드들은 유명 건축가를 초빙하고 석공길드는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들고 화가들은 제단 그림을 그리거나 교회의 창문을 채색했다.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의 교회 건축의 흐름과는 다르게 같은 시기인 13세기초에는 민중들로부터 떨어진 수도원의 넓은 토지 경작이나 교회와 귀족을 위한 책의 필사에 반대하고 무소유를 강조하며 탁발 수도회 운동이 확산되었다. 개인과 공동체가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거지처럼 떠돌면서 사람들에게 참회의 설교를 하고나 성경을 설명하는 일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카르멜회, 아우구스티노회 등이 여기에 속했다. 

대장장이와 금속 노동자의 수호 성인, 엘리기우스

길드와 관련하여 대장장이와 금속 노동자의 수호 성인, 엘리기우스Saint Eligius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엘리기우스는 7세기에 프랑스의 금속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금세공인이자 조폐국 책임자였던 암보(Abbbo)에게 아들을 보내내어 공부하게 한다. 엘리기우스는 도제 수업 후에 금속세공의 최고 전문가가 되어 조폐국의 최고 책임자까지도 되었지만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교회와 수도원을 짓는 일에 매진하였다.

길드는 장인들을 길러내고 일을 조정하고 그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모든 길드는 자신들만의 수호성인을 갖고 있었다. 길드는 수호성인에게 제단을 바치거나 교구에 성당 건립과 교회 행사, 그리고 자선사업에도 참여했다. 영적인 것과 일하는 현장의 사이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중세 길드를 신앙 공동체로 정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세의 그림에 묘사된 대장장이와 금속 노동자의 수호 성인, 엘리기우스

피렌체의 예를 들면 산조반니세례당은 포목상 길드가 운영을 책임졌고, 피렌체대성당은 모직업 길드가 책임을 졌다. 오르산미켈리성당Orsanmichele은 원래 도시의 비상 곡식 저장창고였다. 평소에는 이 주변에서 곡식 거래와 은행 업무가 이루어졌는데 성당 위의 목저건물이 1304년 화재로 소실되어 1337년에 석조 건물을 건립한다. 이 건축 주체는 비단 상인 길드와 금속 세공 길드였다. 외벽에는 14개의 감실이 있어서 피렌체를 대표하는 길드의 수호성인들이 들어 있다. 이 조각들은 키베르티, 도나텔로, 베로키오 등 최고의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어 당시 피렌체에서 길드들의 사회적 지위와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한다. 

수호성인은 특별리 보호자로 설정하여 받드는 성인을 뜻하는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출생할 때 사람들에게 혹은 지역의 주민에게 할당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신을 믿는 전통에서 유래했다. 수호성인은 영어로 “Patron saint”라고 하는데 수호신은 영어로 “genius”라고 한다. 엄청난 지적 능력이나 본능적인 최고의 창조적 능력을 가진 천재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훨씬 세월이 많이 흐른 뒤의 일이다.

롬바르디아 동맹과 신성로마황제의 전투를 다른 아모스 카실리Amos Cassioli의 1860년 그림

중세 길드가 탄생시킨 마크와 간판

도시의 발전은 황제•봉건제후와 도시 시민의 대립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시민의 자립의식이 높아졌고 이해를 같이하는 도시 사이의 결속이 시작되었다. 1167년 북이탈리아에서 성립한 롬바르디아 동맹Lombard League은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이탈리아 침략에 대항해 24개 도시가 동맹을 맺은 것으로 그 시민군은 1176년 황제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자치도시로 발전하게 만들었다.

중세시대에 길드를 중심으로 상품에 마크mark를 넣는 것이 일반화되는데 유명 마크를 모방한 가짜 마크도 유행했다. 12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상인 또는 길드 들은 타인이나 다른 길드의 마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마크를 칼에 새겨서도 안 되었다. 마크의 유행은 문맹 비율이 높았던 중세 유럽의 상황도 한몫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중재인이나 심판이나 재판에서도 엄격한 법령으로 기득권자를 보호했는데 이는 상표商標, trademark 권리 보호 법령의 효시가 된다. 길드의 마크와 휘장curtain들은 대개 상징하는 직관적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상점의 간판과 기업 로고, 상품 마크 전통을 만든다.

중세 길드를 상징하던 마크들

로마시대의 술집이 가게 앞에 관목의 가지를 묶은 다발을 내건 풍습은 중세까지 전해 내려왔다. 어떤 집에는 그림이 아닌 상품 실물을 내걸기도 했다. 처음엔 형태가 단순했지만, 나중에는 디자인 감각이 가미되어 볼 만한 것이 많았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그림 간판이 선호되었는데 상품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상점이 전문화되고 간판에 문자를 더러 넣기도 했다. 상점의 이름을 문자로만 쓰면 기억을 잘 못했으므로 이름을 그림으로 바꾸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간판으로 이어진 중세 길드의 마크들

여관은 여러 계층의 여행자나 지방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십자가 장식이나 이교도인들을 위한 태양과 달의 그림을 그린 경우도 있었다. 목로주점은 단속이 필요해서 반드시 간판을 걸게 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간판에 대한 기술도 발달하고 간판을 만드는 화가나 대행업자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유튜브 채널 : 공병훈 지식공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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