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리셰
배우들에게 사랑을 들으려 할 때
그들의 육체는 젊고 아름답다 나는 노트에
“꽃”이라 쓰고
헐겁고 여린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쥐었던 처음을 생각한다
배우들에게 사랑을 말하려 할 때
무대의 그늘은 풍성하고 싱그러우며
말들의 갈기는 건강한 윤기로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오줌 냄새가 나는 벨벳 의자에 앉아
영사기가 토해내는
뿌연 빛무리의 슬픔을 그리는 수밖에 없다
배우들처럼 사랑을 이해하려 할 때
그 때의 사랑은, 내가 배우들이 나누는
사랑을 훔쳐보며 후회하는 것
많은 것을 놓쳤던 억센 손가락 사이로
둥지를 틀던 여린 제비들에 대해 생각한다
희고 푹신푹신한 팝콘 속으로,
흐드러진 메밀밭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겹쳐졌을 때
갈기 없이 말로 달리는 것
스크린 속의 배우들이 우리를 보며
환호하는 것
고개를 돌리고 빙긋하자,
네가
싱긋하는 것
시작노트
배우가“좋았나요?” 나는 끄덕인다. “좋았어요.”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느낄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느낌에 대해, 우리는 무수한 가짜들을 기워 누더기 같은 문장으로 전한다.“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말이죠. 손가락을 까닥인다거나, 속눈썹이 떨리는 걸 느낀다거나, 땀을 맺는 땀샘을, 꽃을 쥔 것처럼 느끼게 될 때가 있잖아요.”그들은 내 말 앞에서 곰곰하다가 “해볼게요” 하고는 그것을 예쁜 눈과 성긴 머리칼과 붉은 볼의 씰룩임으로 그려낸다. 언어에 갇힌 사랑이 다시 언어로부터 탈옥한다. 스크린 앞에 나란히 앉은 당신의 손을 쥔 채,
우리가 이미 사랑을 알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아직 사랑을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김재현시인
1989년. 경상남도 거창 출신.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