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에 묻어나는 “제주 4·3사건”과 역사청산의 필요성 (3) -‘빨갱이’란 말이 탄생한 배경
영화 “지슬”에 묻어나는 “제주 4·3사건”과 역사청산의 필요성 (3) -‘빨갱이’란 말이 탄생한 배경
  • 김규용 기자
  • 승인 2020.04.3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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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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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장면 중 고중사
영화장면 중 고중사

▽‘빨갱이’란 말이 탄생한 배경

이 말은 원래 당시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당시 신문기사 오보가 만들어낸 사건이 발단이 되며 정치적 성향이 분리되며 생긴 말이다. 그 기사의 오보가 바로 3상회의(미국·영국·소련)에 대한 내용이다.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내용이다. 이 내용은 실제 3상회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기사가 실렸다. 이 사건으로 나라는 정치적 이분법으로 나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대한민국은 일본에게 강점기를 맞으며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해방군이라 믿었던 미군과 소련군이 신탁통치를 결정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국민정서는 즉시 독립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지나 독립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국민정서가 ‘신탁통치’라른 말에 경기를 하듯 반응할 것이란 것을 친미파들에 의해 미군정은 알았을 것이란 예측이다.

1947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과 당시 발행되던 대다수의 신문은 3상회의 하루전날 이미 결과에 대한 기사를 냈다. 아래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헤드라인 타이틀을 낸 내용이다.  

 "外相會議에 論議된 朝鮮獨立問題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문제-
蘇聯은 信託統治主張 蘇聯의 口實은 三八線 分割占領 米國은 卽時 獨立主張"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이 기사는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하지만, 소련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미군정이 당시 발행되는 신문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내용에 대해 전혀 제제에 대한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 실제 밝혀진 정황들은 이와 정반대였다. 그리고 3상회의에서는 미군이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소련이 반대하여 아래와 같은 협정이 맺어진다. ①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②공동위원회와 정당 및 사회단체 협의 후 임시정부 수립권고안 작성 ③4개국의 심의 ④임시정부 수립 ⑤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 협정에 임시정부 작성 참가 ⑥4대국이 임시정부를 통해 최장 5년간 신탁통치 ⑦총선거 ⑧독립국가 설립. 이런 수순의 협정이었다.

사실 이를 두고 당시 미군정과 이에 편승해 권력을 잡으려던 사람들의 조작설도 있다. 왜냐하면 이 오보사건으로 결국 이분법적인 정치적 사상으로 구분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서로 자국과 우호적인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처음 소련은 한반도에 새로 수립될 국가가 타국이 자국을 침략하는 발판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렇지만, 미군은 최초 맥아더의 한반도 제1호 포고령을 통해 한반도를 점령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미군정이 한반도에 들어서며 한반도의 정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건국준비위원회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이 식민통치를 위해 사용하던 조선 총독부를 통해 한반도를 관리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을 다시 등용하며 친일파가 득세하게 했다는 점 등 많은 증거가 산재한다.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 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것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준수가 필요하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항을 발표한다.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제6조 - 추후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이 오보가 나자 한반도의 모든 당들은 즉각 성명서를 내고 신탁통치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로동당은 실제 발표된 신탁통치안에 대해 살펴보며 수뇌부의 회의 끝에 불리할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강대국의 원조를 받으며 5년 안에 독립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로동당은 친탁을 수용하는 의사를 밝히며 친탁을 찬성했다. 이에 격분한 민족주의적이었던 당에서는 조선로동당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까지 말하며 당시 ‘백의사’와 같은 여러 집단에 의해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좌파와 우파간의 싸움이 시작되며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북쪽을 소련에 친하다하여 “빨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렇게 등장한 정치적 이분법이 각자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며 정적을 죽이는 수단이 되며 나라는 격랑기에 휩싸였다.
    

끓고있는 솥에 지방에 타고 있다.-영화장면 중
끓고있는 솥에 지방에 타고 있다.-영화장면 중

- 소지(燒紙)           

소지(燒紙 : 신위(지방)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의 장면으로 영화는 막바지로 전개된다. 군인을 유인한다던 상표가 군인에 의해 잡혔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같이 갇히며 두려움에 죽기 싫다며 동굴로 군인들을 이끌고 온 것이다. 먼저 동굴 근처에서 망을 보던 만철과 상표가 대치했다. 군인들을 데려온 상표에게 총을 겨눈 만철은 “혼자 살아 뭐하겠니? 같이 죽자.”며 총을 쏜다. 이어 상표의 밀고에 동굴 위치를 파악한 군인은 만철을 사살한다. 마침 땔감을 구하러 나왔던 동굴의 한 사람이 만철이 사살되는 것을 보고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동굴사람들은 군인들이 좁은 동굴입구로 들어 오려하자 말린 고추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워 군인들과 대치한다. 매운 연기로 인해 진입이 어려워지자 군인들은 무작위로 총을 난사한다. 그러나 맵고 자욱한 연기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국 실패한다. 영화의 장면은 이때 자욱한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정길의 부릅뜬 눈으로 초점을 맞춰간다. 이를 통해 정길을 통해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받는다. 동굴 입구에서 결국 군인들은 진입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동굴입구를 돌로 막고 일단 퇴각한다. 이내 땔감 구하러 가며 피했던 사람이 돌을 들어내며 굴로 들어간다. 그리고 연기에 기절하다시판 한 사람들을 깨워 동굴 밖으로 피한다.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마른 고추를 태우는 장면-영화장면 중
동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마른 고추를 태우는 장면-영화장면 중

사람들이 동굴을 빠져나가지만, 무동의 처는 임신으로 배가 불러 좁은 동굴입구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무동이 안타까움에 어떻게든 처와 같이 나가려하지만 무동의 처는 남은 아이를 위해 제발 먼저 가라고 무동에게 사정한다. 어쩔수 없이 무동은 어머니에 이어 다시 처를 두고 가게 되자 한없이 울며 길을 떠난다. 이후 군인들이 다시 왔지만 열려진 입구를 보며 고 중사가 화를 낸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김 상사를 찾으며 고 중사는 “김 상사는 어디 갔어.”라며 부하에게 묻는다. 그리고 부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폭도들의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부하의 말에 이를 악물 듯 “다 죽여 버리겠어.”라며 잔혹하게 말한다.  

장면이 바뀌며 정길이 솥뚜껑을 돌과 함께 묶어놓은 숱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때 들려오는 김 상사의 처절한 목소리가 “한번만 살려 주라.”며 들린다. 김 상사를 정길이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정길은 김 상사의 최측근으로 온갖 수발을 든다. 그리고 참혹한 상황을 모두 목도하며 가끔 화면에 얼굴이 크로즈업 된다. 잔혹한 상황이 생길 때면 정길을 화면에 비추며 그를 카메라가 정조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길은 영화 막바지에 김 상사를 끓는 솥에 넣고 단죄한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김 상사에게 잔잔하게 “이제 그만 죽이세요... 잘가요 형”이라고 말하며 표정이 없다.

정길이 김상사를 단죄하고 있다.-영화장면 중
정길이 김상사를 단죄하고 있다.-영화장면 중

감독은 “처음부터 김 상사는 죽어야 할 인물로 설정했다.”고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 있다. 특이한 점은 영화 속 남자처럼 보였던 정길은 실제로 남자가 아니라 군복을 입은 여성이라는 것. 그러나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도저히 관객은 짐작도 할 수 없다. 이는 정길을 통해 제주설화 속 설문대할망을 형상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불을 지핀 가마솥에 김 상사를 넣어두고 죽인 방식은 설문대할망의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제주 설문대할망은 500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자식이 너무 많아 식량이 없자 자식들에게 식량을 구해오라고 밖으로 내보낸다. 

뉴스페이퍼 기자가 찍은 도틀 굴 설명 사진= 김보관 기자

그리고 할망은 백록담에 솥을 걸고 죽을 쓰다 그만 발을 헛디뎌 솥에 빠져 죽고 만다. 499명의 형제가 밖에서 돌아와 할망이 끓여놓은 죽을 보고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가 죽을 먹으려고 젓자 그 안에 뼈가 발견된다. 막내는 그것이 할망의 뼈 인줄 알고 결국 아무 말 없이 형들에게 떠나 혼자 다른 섬으로 간다. 뒤늦게 형제들은 그 사실을 알고 통곡한다. 그렇게 형제들은 모두 목매어 울다가 돌이되어 버린다. 이런 신화처럼 감독은 제주설화의 할망처럼 김 상사의 죽음을 솥에 맡겼다. 이것은 제주 학살사건에 대한 심판을 형상화 한 것이다. 지금도 진상조사가 더 필요한 제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며 신에게라도 심판을 부탁하는 것이다.

영화는 장면이 바뀌며 눈 덮인 산을 헤매는 사람들 뒤로 화면이 서서히 페이드아웃(화면이 점차적으로 사라짐)되며 화면이 이번엔 하얗게 변한다. 다음순간 갑자기 어두워지며 총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감독은 이후 상황을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그러나 이내 등장하는 지방문(신위)들이 불타는 장면에서 모두 사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어 동굴 입구로 빛이 내리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빛 무리 밑으로 앵글이 옮겨가며 죽어있는 무동의 처와 아이가 보자기에 싸여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침내 아이의 울음이 그치자 지방이 떨어지며 불이 붙는다. 그리고 죽어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붙은 지방이 떨어지며 망자를 위로한다. 감독은 솥에 죽은 김 상사에게 불붙은 지방을 내려준다. 아마도 이미 신에게 처벌을 받은 김 상사의 영혼이 불쌍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감독은 제주학살로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로하며 ‘소지’를 마쳤다.

오멸 감독이 남기 메시지-영화장면 중
오멸 감독이 남기 메시지-영화장면 중

오멸 감독은 영화를 마무리하며 자막을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당시 제조 북서부 중산간에 위치한 ‘큰 넓궤’라는 동굴은 토벌을 피해 온 인근 마을 주민들 120여 명이 50~60일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다. 그러나 결국 토벌대에 발각되어, 보초를 서던 마을 청년들의 도움으로 탈출을 하며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한라산 근처에서 대부분이 붙잡히고 만다. 그들 대부분은 1948년 12월 24일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총살되어 바다에 버려졌다. 4·3당시 학살된 제주도민은 3만 여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이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이었다. 대량학살은 미군정(1945~1948)에서 시작되어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까지 1년에 가까운 ”초토화 작전“의 시기에 발생했다. 민간인 학살의 배후에는 미군정과 미군고문관이 있었고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이 학살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라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기자는 오멸 감독과 전화인터뷰를 진행했다.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은 자식과도 같아서 관심을 가져주면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로 만나 오멸 감독은 ‘지슬’ 영화에 대해 언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미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감독은 인터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불이익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한몫을 한 것이다. 그리 오랜 시간을 통화하지 않았지만, 통화내용에서 묻어나오는 아픔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멸 감독은 지난날의 역사를 다시 현재로 소환해서 아픔을 나누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역사가 바로서길 바라는 것이다. 지난 역사의 잘못은 사과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잘못된 정보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는 비양심인에게 일침을 날리고 있다. 사과할 것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하고 주장할 것이 있다면 정당히 주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 역사는 특정인을 헐뜯거나 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난날을 청산하고 새롭게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다. 이러한 역사청산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미래를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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