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낭만적 비평가의 산문집 - 권성우,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어느 낭만적 비평가의 산문집 - 권성우,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 이정현 에디터, 평론가
  • 승인 2020.06.0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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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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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에디터
사진=한송희에디터

[뉴스페이퍼 = 이정현 에디터, 평론가] 문학평론가 권성우의 산문집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은 한 지성인의 메모와 일기장을 훔쳐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산문집에는 SNS의 올린 글, 일기장, 신문에 연재한 칼럼, 특정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지극히 개인적인 글들이 가득하다. 그의 개인적인 단상의 편린은 단지 “옛날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섬광과도 같은 순간”의 감성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만감독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1989)를 회상하는 아련한 감성과 함께 분단과 반공, 압축적 근대화로 얼룩진 대만과 한국 역사의 공통점을 떠올리는 식이다. 

저자는 문학 텍스트의 감상을 나열하면서 ‘고통과 슬픔의 역사’를 통과했던 무수한 개인들을 떠올린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이니치 작가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의 의미를 되짚으면서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4·3의 비극을 포개놓는다. 동시에 김석범의 소설을 지배하는 허무주의를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 언급한 ‘진보가 초래한 폐허와 야만’과 연결시킨다. 이런 식의 ‘연결’은 서경식, 최인훈, 김시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등의 삶과 작품들로 확장된다. 자이니치 문학가들과 발터 벤야민의 서간문을 들춰보거나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을 때 저자의 내면을 지배하는 감정은 바로 ‘연민’과 ‘슬픔’이다. 그는 연민과 슬픔이야말로 “고립을 견디며 책을 읽는” 원동력이라고 밝히면서 대학시절 은사였던 비평가 고(故) 김윤식 선생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2018년 작고한 김윤식 선생을 애도하면서 그는 글쓰기의 고통과 비평의 의미를 다시 되새긴다. 

이 산문집은 한 비평가의 내밀한 독서노트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의 개인적인 글들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신경숙 표절 사태를 수습하는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에게 쓴 공개적인 편지에는 칭찬으로만 가득한 비평의 폐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고,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편지에는 한국 사회에 산적한 부조리와 모순을 빼곡하게 나열한다. 하루키와 서경식을 독해하면서 에세이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글은 자연스럽게 대학 사회의 경직된 아카데미즘을 상기시킨다. ‘임화문화예술상’ 수상소감에서도 단순히 수상의 기쁨을 피력하는데 그치지 않고 최인훈, 기형도, 조세희, 김학영의 문학과 함께 임화의 슬픈 운명과 한국의 현대사를 거론한다.  

명동에서 보낸 유년기와 고등학교 시절 풍문으로 겪은 5·18의 기억, 1980년대에 입학한 대학시절을 담은 회상에서는 한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면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명동 거리를 뛰어놀던 아이가 대학에서 문학청년이 되고 김윤식과 김현을 만나 비평가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돌이키면서 그는 자신이 ‘읽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우리는 평생 성장한다. 그러다가 가끔 회한에 가득하여 과거를 돌아보기도 한다. 권성우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마찬가지로 ‘읽는 인간’이 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숱한 후회와 번민의 시간들이 스쳐갔다. 책을 읽으면서 그와 오래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산문집을 읽고 내게도 애틋한 추억이 깃든 영화 〈비정성시〉를 다시 보았다. 그가 2018년 3월 17일에 적은 일기의 한 구절처럼, 좋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세상과 인간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된다. 그러므로 여전히 읽고, 느끼고, 생각할 것이 참 많다. 인간은 자신이 읽고 경험한 것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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