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기 넘치는 장마당, 통일거리시장
판문점에서 200km를 달려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에 돌아왔음을 실감 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인터넷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해외동포들과 카톡으로 계속 잘 소통하다가, 평양을 벗어나자 인터넷 연결이 끊어졌다. 원래 계획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해외동포 연대의 평화의 메시지를 판문점에서 라이브로 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평양 안에서는 빠른 속도로 잘 터지던 인터넷이 평양을 벗어나자 전혀 잡히지 않았다.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에서도, 개성 시내에서도 인터넷은 잡히지 않았다. 판문점에 가면 남측의 데이터가 잡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내원의 말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판문점에서도 인터넷은 연결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시로 해외동포 채팅방에 생생한 평양의 일상을 전했었다. 개성과 판문점에서의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단체소통방의 해외동포들을 생각하니 나도 속이 탔다. 이 경험을 통해 평양 시내에서는 데이터 이용이 가능하고 평양을 벗어나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다. 꼬박 한나절을 인터넷 연결 없이 지냈다. 이는 나와 같은 외부인이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에 해당되는 듯하다. 안내원은 자신의 휴대전화로 개성에서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다.
평양에 들어서자 바로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카톡이 터진다. 다시 북과 남, 북과 전 세계 재외동포들 사이의 담이 무너진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다시 하나로 연결된다. 평화활동가들의 질문과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한나절 동안 전해지지 못 했던 개성과 판문점에서 담은 사진과 영상을 전 세계 해외동포들에게 전송했다. 보스턴 아줌마의 평양 카톡은 다시 시작되었다.

뉘엿뉘엿 여름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여명거리를 달린다. 여명거리 안에 있는 ‘통일거리시장’이라는 장마당에 가는 길이다. 저녁 무렵에 활기가 더 넘친다는 장마당이다. 북녘동포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빠뜨릴 수가 없는 방문지다. 장마당에 곧 도착 예정이라는 메시지를 카톡 라이브방에 전했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재외동포 활동가들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온다. 장마당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그곳 분위기는 어떤지, 가격은 어떤지, 장마당에 대한 관심이 크다. 장마당의 생생한 모습을 많이 찍어 보내달라고 당부한다.
살림집(아파트)이 즐비한 거리를 지닌다. 마치, 남측의 아파트촌에 온 듯한 느낌이다. 여기가 평양인지 서울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서울에서, 인천에서 보던 그런 아파트촌의 풍경이다. 드디어 통일거리시장에 도착했다. 여명거리 살림집 바로 옆이다. 몇 미터 밖에서 ‘통일거리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이자마자 거의 습관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시장 입구에서는 교통정리와 시장을 안내하는 여성교통보안원이 보였다.
사진을 한두 장 찍자, 안내원이 제지한다.
“리 선생님, 여기부터는 사진을 못 찍습네다.”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이유가 궁금했다. 안내원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무엇보다도 상인들이 싫어하고, 장마당 사진들이 외부에 유포되어 북의 사회와 체제를 좋지 않게 표현하는데 악용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장마당 사진촬영을 안내원이 불허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해되기도 한다. 상인들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무례하고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남과 북의 동포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기 위해 북을 방문 중이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예의를 지키고 북녘동포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
장마당에 들어섰다. 수천 평 되어 보이는 넓은 공간이다. 내 눈앞에 셀 수 없이 많은 매대들이 보인다. 매대가 정말 간격 없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수천 개는 되어 보이는 매대 앞에는 상인들과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로 뒤섞여 있다. 시장 안이 시끌벅적하다. 왁자지껄. 웅성웅성. 상인들과 손님들의 흥정과 대화로 벽이 없이 탁 트인 넓은 공간이 웅웅 울린다.
사람들도 빽빽이 서 있다. 매대 하나가 1m 남짓 될까. 작은 매대에 정말 오밀조밀 없는 게 없이 다 진열되어 있다. 어떤 물건이 있는지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싶다. 물건들을 제대로 보려면 촘촘히 서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가야 한다. 그 정도로 장마당에는 사람들이 많다.

장마당 입구에 과자, 찐빵, 서양빵, 만두, 떡, 닭튀김을 파는 매대가 수십 개 이어져 있다. 다른 한편에 과일, 채소, 쌀과 곡물, 고기와 생선을 파는 매대도 보인다. 몇 걸음을 옮기자, 50대 중반 정도 되는 여성이 돼지고기를 들고 내게 다가온다. 목청을 높여 내게 사라고 권한다.
“이거 사 가시라요. 막 잡아서 싱싱합네다. 보시라요!”
갓 잡은 신선한 돼지고기가 2kg에 미화로 3불이다. 너무도 착한 가격이다. 선명한 분홍빛의 살코기. 비계가 거의 없다. 정말 막 잡았는지 싱싱해 보인다. 이 여성은 적극적인 호객행위를 한다. 안내원과 함께 걷는 나를 따라와 계속 사라고 권한다. 돼지고기를 사 요리를 할 수 없는 나이기에 다음에 사겠다고 하고 다음 매대로 이동했다.
과일 매대로 갔다. 복숭아, 풋사과, 수박, 참외, 포도… 여러 가지 제철 과일들이 보였다. 과실이 여물고 실하다. 신선해 보인다. 남측의 시장에서 그러듯이, 지나가는 나에게 포도 몇 알을 떼어 권한다. 적극적인 시식 권유에 포도 한 알을 입 안에 넣었다. 포도알에 입 안에서 터진다. 와! 정말 달고 싱싱하다. 입 안 가득 다디단 과즙과 과육의 느낌이 전해진다. 한국의 거봉 맛이다. 포도알도 실하고 당도도 높다. 최근에 먹어 본 포도 중 제일 맛나다.
푸른빛의 사과도 깎아서 권한다.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다. 게다가 신맛이 거의 없고 아주 달다. 복숭아까지 권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과일이다. 한입 베어 먹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새로운 복숭아 과육의 세계를 체험한다. 꿀을 입 안에 넣은 듯 달고, 부드럽고 싱싱하다. 잘 영근 백도다.
북에 와서 처음 먹어보는 과일이다. 그 높은 당도와 싱싱함에 감탄할 정도다. 상인에게 물어보니 평양 인근의 농장에서 재배한 과일이며 다 조선 농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농법으로 재배하기에 과일이 이렇게 달고 맛있는지 궁금해졌다. 제재로 인한 비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싱싱하고 달콤한 과일을 시식하고, 그 맛에 반해 과일을 다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과, 복숭아, 포도, 참외, 옥수수를 샀다. 사진에 보이는 모든 과일과 옥수수를 합해 9불 정도 지불했다. 정말 부담 없는 가격이다.
장마당은 마치 남측의 현대화된 재래시장 같았다. 냉방이 안 되어 더운 것 말고는 남인지 북인지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빼곡히 늘어선 매대에는 정말 없는 게 없었다. 음식은 물론 옷, 신발, 가방, 못, 걸레, 가전제품, 남측에서 유행하는 손선풍기까지… 수백, 수천 가지의 온갖 종류의 물건을 다 팔고 있었다.
대북제재로 여전히 대다수 시민들의 삶은 어려울 것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농산물처럼 자립경제로 자체 생산이 되는 품목은 종류도 다양하고 신선했다. 상인들과 물건을 사러온 사람들로 그득한 장마당은 활기 그 자체였다. 이런 장마당의 활기찬 모습은, 북한의 경제가 제재로 어렵지만 내수 시장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변화와 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평양
내가 묵고 있는 해방산 호텔 근처는 일상의 분주함과 활기가 항상 느껴지는 곳이다. 아침마다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은 도심의 소음이다. 창문을 열면 바로 건너편에 로동신문사 사옥이 보인다.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일터로 향한다. 호텔 바로 옆 버스정류장에는 출근길 평양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 있다.
거리의 스피커는 씩씩한 행진곡을 쏟아내며 간간이 선전구호를 외친다. 내가 오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곳이 서울도 아니고 보스턴도 아닌, 평양임을 실감하게 해주는 풍경과 소리다. 북녘에서의 네 번째 맞는 날을 힘차게 시작한다.
8월의 아침 햇살을 가르며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쭉쭉 빵빵 시원하게 뻗은 왕복 8차선 도로를 달린다. 평양의 신시가 중 하나인 창전거리다. 60층의 족히 되어 보이는 원통형의 고층건물이 도로를 사이로 마주보고 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자태를 뽐낸다. 3차선에는 무궤도전차가 달린다.
밝은 회색의 거대한 조형물 앞에 차가 멈췄다. 평양 개선문이다. 안내원에 의하면, 개선문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 운동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2년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개선문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섰다. 꽤 많은 중국관광객과 서양관광객 사이에 뒤섞여 엘리베이터 앞에서 차례를 기다린다. 평양과 개성의 관광명소는 이렇게 외국인 관광객으로 언제나 붐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선문 꼭대기전망대에 올라간다. 화사한 한복을 차려입은 안내원이 환한 미소를 나를 맞는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평양 시내를 바라본다. 평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회색빛의 우중충하고 어두운 평양에 대한 나의 잘못된 이미지는 이미 첫날 다 깨어졌다. 평양 시내를 한눈으로 내려다보니, 변화하고 도약하는 평양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산뜻한 색감과 다양한 건축양식의 묘미를 살린 건물들이 오밀조밀 어우러진 시가다.
멀리 유난히 높이 솟은 건물이 보인다. 피라미드를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건축양식이 눈길을 끈다.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류경호텔이다. 평양의 스카이라인에서 단연코 도드라진다. 류경호텔은 1987년 착공하였으나, 대북제재로 건축자재와 설비의 조달이 원활하지 않아 완공되지 않은 건물이다. 101층으로, 완공된다면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호텔이 될 것이다. 류경호텔이 완공되면 저곳에 투숙하고 싶다.
고개를 돌려 시가의 다른 한쪽을 바라본다. 화사한 색감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려명거리다. 2017년 4월13일에 완공된 신도시다. 수십층 고층아파트들이 여러 동 늘어서 있다. 서울이나 뉴욕의 마천루를 방불케 한다. 쭉쭉 뻗은 고층빌딩은 지구촌의 일원으로 세계경제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북의 바람을 표현하는 듯하다. 나의 해석이다. 도시 한쪽에서는 수십층 빌딩 건설이 한창이다.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공사와 건축의 현장을 자주 보았다. 도시 전체가 건설과 건축에 매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평양시민들조차도 아침마다 눈을 뜨면 변화하는 평양의 모습에 놀란다고 한다. 내가 만난 평양시민들도 매일 새롭게 들어서는 건물과 공공시설물을 보고 평양은 날마다 변화하고 도약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회색빛 콘크리트의 어둡고 활기 없는 평양은 없다. 바삐 움직이는 평양의 모습을 보고 있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평양 도심에서 마주한 시가의 풍경에서 생동하는 도시, 평양의 오늘을 본다.


주체사상탑 꼭대기에도 올랐다. 주체사상탑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기념비라고 한다. 내리쬐는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170m 높이에서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주체사상탑도 평양 정경을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도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리스와 독일에서 온 관광객과 한두 마디 주고 받았다. 평양은 아름다운 도시라고 평양 관광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평양의 모습을 다시 한번 즐긴다. 저 멀리 5.1경기장과 다른 공공시설이 보인다. 차와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는 활기가 넘친다. 살아 숨 쉬는 평양을 여기서도 느낀다.
개선문과 주체사상탑의 안내원들은 모두 한복을 곱게 입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정적인 안내를 해 준 안내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평양의 유적,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대동문, 평양종, 련광정
<대동문>
우리의 평화자동차는 평양 도심의 역사유적으로 향한다. 첫 방문지는 대동문. 대동문은 북한의 국보 제4호로 고구려 시대 축성된 문루이다. 안내원에 의하면, 대동문은 고구려에서 6세기 중엽에 평양성 동문의 내성으로 건축되었으며, 그 후에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다가 1635년에 재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한국전쟁 시 미군의 폭격으로 심히 훼손되었으나 1959년 원상복구했다고 한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대동문을 둘러본다. 19 m 높이의 다소 아담한 느낌의 성문이다. 촘촘히 견고하게 화강암으로 쌓은 돌축대 위에 이층으로 된 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일층과 이층 각각 서체가 다른 <大同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서로 쓴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안내원에게 누구의 작품인지 물었다. 조선시대 4대 명필 중의 하나이며 한석봉과 필적할 정도로 출중했던 양사언의 작품이라고 한다.
다른 한쪽에 <읍호루 挹灝樓>라는 현판도 발견했다. 무슨 뜻일까? 뜰 읍挹. 넓을 호灝. 대동문 문루에서 손을 뻗어 대동강 물을 떠 올린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이름이다. 대동문 바로 옆에 초록빛의 대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대동강 옆에 운치 있게 자리 잡은 대동문. 이 둘은 아주 잘 어우러지는 조합이다. 이 아름다운 현판에서 선조의 풍류와 지혜가 느껴진다.
1500년 세월을 대동강을 바라보며 함께 한 대동문. 오늘은 21세기로 도약하는 평양과도 호흡하는 듯 하다. 대동문은 주변의 고층빌딩과 잘 어우러지며, 고전과 현대가 만나는 나름의 멋을 연출한다. 이곳은 옛 멋과 현대의 세련됨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평양종>
대동문 옆 평양종으로 이동한다. 평양종은 북한의 국보유적 23호이다. 이 종은1726년 (영조 2년)에 청동으로 제작된 것으로 1890년대까지 평양시민들에게 시간과 비상경보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밤 10시와 새벽 4시에 종을 울려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었고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는 비상경보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육중한 범종이다. 높이 254㎝, 지름 163㎝, 무게 12t이다. 개성의 연복사종,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 동종, 경주의 성덕대왕 신종, 천안의 성거산 천흥사 동종과 함께 우리나라 5대 명종의 하나라고 한다.
평양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300년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고 재해나 전쟁을 대피하도록 했던 종이다. 종은 6등분으로 나누어져 단마다 각각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천왕상, 팔괘 문양이 보인다. 제일 하단에는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예술품이다. 평양인민위원회가 세운 안내문은 평양종을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주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유물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조상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북에도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세운 <력사유적지에서 지켜야 할 리용질서>라는 안내문에 눈길이 갔다. “력사유적지 안에서 자전거를 타지 말며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그 밖에 몇가지 규칙이 더 안내되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벌금을 물게 된다. 북에서도 벌금제도가 있음을 알았다. 남이나 북이나 역사유적을 잘 보존하려는 노력은 다름이 없다. 역사유적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호하기 위해서는 관뿐만 아니라 시민의 참여도 필수적이다. 유적 보존을 위해 시민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련광정>
대동문 근방 련광정으로 향한다. 련광정은 국보 16호로, 조선 시대에 지어진 정자이다. 대동강 기슭 바위 위에 지어진 이 정자는 관서팔경(평안도에 있는 명승지 8곳)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그 경치가 수려하다고 들었다. 과연 듣던 대로 관서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하다. 푸르른 대동강이 바로 코앞에 흐른다. 대동강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동강의 풍광과 잘 어울리는 정자다. 정자에는 몇몇 평양시민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무더운 한여름 더위를 피해 강바람을 쐬러 나왔나 보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눈다.

돌계단을 올라 정자에 들었다. 고개를 들어 천장과 기둥을 보았다. 화려한 단청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붉은빛이 강한 단청이다. 남쪽에서 보던 단청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다. 더 화려하고 강렬하다. ‘천하제일 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중앙에 걸려 있다. 명나라의 명필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안내원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다. 그가 어떻게 평양까지 와서 현판에 글씨를 남겼는지 그 사연이 궁금했다. 주지번이 이곳 련광정의 풍경에 반해 남긴 글이 아닐까 혼자 상상해 보았다. 명나라의 명필도 반할만한 천하제일의 빼어난 경치다.



<계월향비>
련광정의 수려한 경치에 취해 한때를 보내고, 근방을 둘러보았다. 대동강변의 역사유적지에는 계월향의 비도 있다. 남쪽에서는 들어보지 못 했던 이름이다. 명기 계월향. 평양시 인민위원회의 유적지 안내문에 의하면, 계월향은 임진왜란 때 평양에 침입한 왜장을 평안도 부장어사 김응서와 함께 기묘한 계책으로 목을 베고 왜적을 물리치고 평양을 해방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명기이다. 남쪽에 ‘논개’가 있다면 북쪽에는 ‘계월향’이 있다. ‘계월향’의 애국심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1835년에 계월향비를 세웠다고 한다.
외세에 맞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드높은 애국심은 남이나 북이나 우러르는 가치이고 이를 실현한 애국자는 높이 추앙하고 존경한다. 남과 북이 70년 세월 갈라져 살았어도, 우리는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남이나 북이나 우리는 외세의 침략에 의연히 맞서 싸운 위대한 선조의 후손이다. 우리는 동족이고 운명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 기생의 몸으로 민족과 나라를 구한 위대한 계월향에 대해 배우며, 남과 북은 운명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대동강 주변 유적지는 일반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평양시민의 휴식공간인듯하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나오신 어르신들은 나무 그늘 아래 부채질을 하며 담소를 나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부의 모습도 보인다. 데이트하는 남녀까지 다양한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적지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동문, 평양종, 련광정 등 둘러본 모든 유적지의 보존 상태가 좋아 보였다. 유적지 주변은 휴짓조각 하나 떨어진 것 없이 깨끗했고 잘 관리되어 있었다. 입장료는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어른 300원, 어린이 150원, 외국인은 1유로. 대동강변 역사유적지에서도 우리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양시민의 일상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