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1인 문예지 ‘시를 읽는 아침’에 대한 단상 
월간 1인 문예지 ‘시를 읽는 아침’에 대한 단상 
  • 문종필 에디터, 평론가
  • 승인 2020.07.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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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손톱이 자란다 내 두 손 당신에게 닿지 않으므로 자라서 메꾼다 당신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 손톱이 자란다 나 여기 있어요 톡톡 인사하고 싶은 마음 손톱이 자란다 일 분도 쉬지 않고 짙은 어둠 속에서도 손톱이 자란다 간절함은 쉬는 법이 없다 잠이 없다 너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 살아있는 동안 숨을 쉬는 동안 죽어서도 손톱이 자란다 끝끝내 너에게 닿을 때까지

내 간절함 간절함 손톱으로 자란다(「손톱이 자란다」 전문)  

[뉴스페이퍼 = 문종필 에디터, 평론가]새로운 것은 좋은 시일까. 그렇다 새로운 것은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임팩트를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작품으로 평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누군가에게 충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믿어왔던 인식을 의심하게 만든다. 인식의 부정은 내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으니 소중하다. 누군가는 도덕이 틈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엄격한 도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도덕보다 더 도덕적인(윤리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채운다. 어떤 이는 ‘삶’ 자체를 온 힘으로 밀고 나가 기교를 무력화시킨다. 이들은 온몸으로 대상을 밀고 나가기 때문에 무게가 육중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집을 손쉽게 놓지 못한다. 누군가는 환상 속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재생해 이곳의 부조리를 문제 삼는다. 현실을 재현하는데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이들의 낯선 발화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지 않다. 멀게는 미래파의 시작과 끝을 보더라도, 가깝게는 페미니즘 문학의 독보적인 흐름을 보더라도, 어느 한 입장이 불변(不變)한다기보다는 그 시대가 선택한 담론이 ‘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따라서 ‘시적인 것’은 하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구름과 같다. 지금 당장 움켜잡던 나중에 움켜잡던, 잡는 그 ‘순간’만이 기억되고 그것이 역사로 기록될 뿐이다.  

다름을 전제로 서두에서 ‘시적인 것’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은 독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한 시인과 그가 간행한 월간지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쉬운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사람’으로 소재를 한정해 서정시를 쓰는 행위를 어떻게 쳐다봐야 할까. 다소 거칠게 말해 실험 정신이 값지게 인식되는 당대의 흐름 속에서 쉬운 시를 쓰는 행위는 이득 볼 것이 없다. 주류 담론에서 벗어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낡은 시를 쓰는 창작자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발언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이와 같은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산문 「우려되는 몇 가지」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제가 쓰는 서정시는 시인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특히 사랑시는 더더욱 그러하죠. 어쩌면 저는 시인들에게 배척받기 위해 노력하는 시인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시인들과의 거리감은 더 멀어질 것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니, 불편한 아이러니죠.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가는 것이 ‘불편한 아이러니’라고 말하는 이 목소리를 듣고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시인의 행위는 무의미한 것일까. 대중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위안 삼으며 고독하게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해나가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위의 인용문이 어이없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으로 ‘고독’이라는 측면에서 주영헌 시인도 매한가지다. 인정을 받고 싶은 대상이 다를 뿐, 위의 문장처럼 그도 고독하게 싸우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싸움의 방식이지 않을까. 그 누구도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하진 않는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비극의 주인공이나, 부조리한 세상과 싸우는 용감한 전사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함부로 싸움을 청하지 않는다. 싸움 속에는 새싹 같은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담보로 질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쥐고 있는 한 줌의 희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Social Network Service’와 ‘1인 문예지’이다.  

1인 월간지 『시를 읽는 아침』 5월호, 6월호 

SNS를 무기로 시인은 싸움을 시작한다. 이 움직임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말한 데, 그 이유는 새로운 매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체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목소리는 매장되었을 테고, 나 또한 그에 대해 글 쓸 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와 용기가 인연(因緣)을 만든 셈이다. 그런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주영헌 시인의 시작 스타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주류 담론과는 벗어나는 시작을 한다. 보다 더 깊게 제도권에 편입하기 위해 SNS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SNS를 한다. 이 차이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가 완전히 기를 꺾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하는데요, 냉정해 보이지만, 현실입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우리 곁에 ‘SNS’가 있기 때문입니다. SNS를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잃는 만큼 얻는 것도 있는데, 잃는 것이 한 줌도 되지 않은 시인으로의 자존심이라면, 얻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입니다. 저는 ‘소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어떤 특정 단체에 매여서 활동하기보다 게릴라처럼 활동하려고 합니다.  

그가 잃은 것은 한 줌의 자존심밖에 없다고 했지만, 시인에게 자존심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가난해도, 배가 고파도, 외로워도, 고독해도, 죽을 것 같아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운명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자존심을 ‘한 줌’이라고 표현했으니 역설과 가깝겠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자존심보다 더 가치 있는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것이 독자와의 ‘소통’이라고 적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가감 속에서 생기는 즐거움일 수도 있겠다. ‘소통’이라는 단어에 얽힌 여러 사연이 짐작되지만, 이 맥락에서 우리는 ‘좋은 시’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과연 좋은 시는 무엇인가. 

주영헌 시인은 ‘사랑’과 ‘사람’에 대해서 탐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손톱이 자란다」, 「사랑을 시로 배운 사람의 합병증」, 「이인분 식당」, 「원망은 혼자 큰다」, 「아침엔, 샴퓨」 등의 작품이 그의 발언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4월호에 실린 「손톱이 자란다」는 반복되는 구절만큼 간절함도 동시에 자라나는 것 같아 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함께 읽어 보고 싶다. 

아내와 함께 만든 책갈피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은 ‘사랑’을 소재로 무거운 창작이 지속해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가 박은영 시인의 『구름은 울 준비가 되었다』를 소개하면서 “시인을 보기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화자의 삶’을 읽어가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창작자의 살갗에 묻은 흔적은 작품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창작자가 환상에서 뛰어놀던 몽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쓰러지던, 작품 속 활자들끼리 서로 피 튀기며 아우성을 치던, 작품은 주체의 몸과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영헌의 시가 고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령, 사랑 시와 관련해 최근에 읽은 「빛의 허물」(『현대시』 6월호)의 경우, 시 읽기의 즐거움을 동반하면서 절박한 그 무엇이 내 치아를 건드렸지만, 장현 시인의 『22: Chae Mi Hee』에 수록된 「십이월, 당신을 파괴하는 순간」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쓰인 일기의 형식이 참신하면서도 즐겁게 다가왔지만, 『시를 읽는 아침』 4월호와 6월호에 실린 그의 시는 「손톱이 자란다」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촉촉하게 다가왔을 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덜 묵직한 시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덜 묵직한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시인의 살갗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론 촉촉함 자체가 보다 더 무겁게 다가올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다름대로 의미 있고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된다. 시가 꼭 절박하고 고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소통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나’ 자신마저도 속이게 될까 봐 걱정된다. 이러한 방식이 자신의 살갗과 큰 차이가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를 잃어버리고 소통‘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된다. 또한 시 쓰는 데 있어서 소재를 특정한 것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 삶이 정해져 있지 않듯이, 시의 길도 정해져 있지 않다.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 기괴한 대상도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애정 없이도 매력을 뽐내는 작품이 있다. 소통을 전제로 “어떤 특정 단체에 매여서 활동하기보다 게릴라처럼 활동”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기묘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시인 역시 이러한 상식적인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애정을 담아 그의 싸움을 응원하기 위해 짓궂은 발언을 덧붙인다. 
         
아무튼, 내 손에는 16쪽 분량의 1인 월간지 두 권(?)이 놓여있다. 독자들은 내 표현을 읽으며 무슨 소리냐고 황당해할 수 있겠지만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월간지이다. 두 권 중에 경자년 6월호를 펼쳐보자. 핑크색의 예쁜 표지에는 오규원 시인의 책(『날이지미와 시』) 한 구절이 옮겨져 있고, 날개 뒤편에는 발행인, 편집위원, 편집장, 기타 잡일을 도맡아 하는 주영헌 시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ISBN에 등록되지 않았으니 이 월간지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유통된다. ‘SNS'을 무기로 싸우는 의지의 연장선에서 월간 『시 읽는 아침』도 같이한다. 인상적인 구절은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탄생했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당신이 나를 믿어주는 것만큼 의미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내의 힘을 무기 삼아 출판(?)된 월간지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얇은 이 책에 손길을 보낸 것은 ‘아내’에 대한 시인의 사랑 때문이다. 

아쉽지만 『시를 읽는 아침』은 7월에 쉰다고 한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준비 때문이다. 그는 어떤 시를 품고 ‘대중’들에게 다가올까.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글쓴이: 문종필 인천에서 태어났다. 산책하는 것과 영화(만화) 보기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바다 수영에 도전해 무사히 완영했다. 잔잔한 사연이 있는 인디음악을 좋아한다. 2017년 《시작》 신인상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평론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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