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호 시집 『기타와 바게트』, 페루 해류를 타고 도착했다 
리호 시집 『기타와 바게트』, 페루 해류를 타고 도착했다 
  • 유수진 에디터
  • 승인 2020.07.13 23:20
  • 댓글 0
  • 조회수 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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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뉴스페이퍼=유수진 에디터]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이리 산다느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어서 요 모양으로 산다느니 하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어제가 텅 비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혹시 간밤에 ‘값을 잘 쳐서 팔아먹’(「툰드라의 눈」)지는 않았는지 꿈속을 샅샅이 뒤져 본다. 다시는 같은 물에 발을 담글 수 없는 강물처럼 시간은 불가사의한데, 그것을 만지고 싶고 헤아려 보고 싶고 어딘가에 꼭꼭 채워 두고 싶은 출근길은 허기지다. 

유명한 빵집 앞에서 22분을 기다려 바게트를 샀지 
비스듬히 칼집 넣은 중간중간에 오후를 채워 넣었어 
빠삐용의 죄수복에도 붉은 칼집이 들어간 것을 아나? 
찢긴 나비의 날개 조각들이 채워져 있던 걸로 기억해 

-「기타와 바게트」 부분 

자신을 적도 펭귄이라고 자꾸 주장하는 리호 시인의 첫 시집은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거절을 꿈꾼다. 펭귄하면 추운 곳, 아주 추운 곳, 남극의 얼음 들판이 떠오르지만, 열대 지역에도 펭귄이 산다. 적도 부근,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펭귄의 조상은 오래전 해류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펭귄이 살 수 있는 건 페루 해류 때문이다. 갈라파고스 펭귄은 해안의 저지대에 살면서 낮에는 찬물로 몸을 식히고 밤이면 육상으로 올라가 그늘을 찾는다. 적도의 밤 자락이 나눠 준 그늘에 기대 뜨거웠던 하루를 식힌다. 리호 시인은 한대성 해류를 타고 열대의 섬에 도착한 시인이다. 열대의 땅을 딛고 시를 쓰는 시인이다. 

리호 시인의 자리는 뜨겁고 리호 시인의 시는 차갑다. 뜨거운 자리에 발을 대고 온도가 낮은 시를 쓰는 리호 시인은 ‘심장의 체온에 훨씬 못 비치는 눈빛’으로 인하여 ‘은둔자로 오해 받’(「툰드라의 눈」)았다고 고백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것들은 자주 기다릴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제 몸에 칼집을 넣기까지 했을 땐, 별 수 없다. 이십이 분 아니라 그보다 더 긴 시간도 기다릴 수밖에 도리 없지 않은가. 나를 을로 만드는 상황은 도처에 존재한다. 

시간은 공간과 함께 할 때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십이 분이라는 시간은 바게트를 기다리는 줄과 함께 순서쌍을 이룰 때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바게트를 기다리는 간절하고 신성한 시간이 된다. 시간은 바게트를 굽기 전에 미리 집어넣은 칼집이고 그 자국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의 공간화이다. 그러므로 ‘비스듬히 칼집 넣은 중간중간에 오후를 채’울 수 있다. 그렇게 채워진 오후는 ‘소원이 무거워 잠 못 드는 밤’, 마음속에서 ‘깨지지 않는 것만 골라 집어 던지는’(「다리와 꼬리의 일교차」) 지혜를 준다. 

리호 시인은 2014년 『실천문학』, 제3회 <오장환신인문학상>으로 데뷔했다. 리호 시인이 페이지와 페이지에 채워 놓은 오후는 인과관계가 자주 생략된다. 낱말과 낱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도약의 보폭이 때로 넓어서, 마법적이고 환상적으로 읽힌다. 붉은 표지 안에 채워 둔 차가운 온도는 이 여름을 서늘하게 해 준다. 

성수를 부어 물의 문을 연다 

조금 늦게 오는 중이라고 하네, 예의 있는 것들은 다르지 

-「들어 봐, 갈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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