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용된 ‘표현의 자유’에 맞서는 진실의 기록 - 『그들의 5·18』
변용된 ‘표현의 자유’에 맞서는 진실의 기록 - 『그들의 5·18』
  • 이정현 에디터, 평론가
  • 승인 2020.07.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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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송희 에디터

 

[뉴스페이퍼 = 이정현 에디터, 평론가] 올해 광주민주화운동은 40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최근에도 극우들은 광주와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특히 과거 정권의 은근하고도 노골적인 비호 아래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를 중심으로 ‘5·18 망언’은 수위를 넘어섰다. 희생자들의 관을 ‘홍어택배’로, 광주지역을 ‘7시 멀티’, 전라도 시민들을 ‘홍어’라고 조롱하는가 하면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당시 광주를 진압한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을 ‘전땅크’로 추켜세우는 등 조롱과 멸시를 서슴지 않았다. 압권은 박근혜 정권 시기에 종편방송에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가 등장하여 “1980년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대거 침투했다”,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북한군 게릴라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상파 방송의 시사토론회에 등장한 극우논객 변희재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거론하면서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닐 수도 있다”고 당당하게 발언했다. 그가 내세운 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다. 그는 군사정권시절 작가들과 언론인들의 발언을 막을 때 저항의 표어였던 ‘표현의 자유’를 악랄하게 변용하면서 ‘사실을 왜곡할 자유’를 내세웠다. 

나치의 선정부 장관 괴벨스가 말했듯이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엄청난 문서와 증거가 필요한 법이다. 극우사이트에서는 현재도 잊을만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을 조롱하고, 북한 개입설을 주장한다. 한 시민군의 사진을 북한군 게릴라 ‘광수’로 지칭한 지만원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그런 거짓 선동을 믿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왜곡과 폄훼에 맞서서 비판하는 자들은 목소리도 커진다. 이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공방이 계속될수록 피로감을 호소하면서 그것을 진영싸움으로 치부하고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고 외치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는다. 진실을 진흙탕 싸움으로 왜곡하고,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을 얻는 자들은 늘 이런 방식을 선호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은 민간인을 잔혹하게 공격했다. ⓒ나경택.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선동에 반박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문서와 증거”를 모으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역사학자 노영기의 저서 『그들의 5·18』(푸른역사, 2020)도 이 작업의 일부다.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증언들은 숱하게 존재한다. 문학적 형상화 작업도 계속 진행된다. 이 책은 2010년대 이후에 제기된 왜곡발언들을 실증적으로 반박한다. 그동안 축적된 광주민주화운동의 자료들은 주로 항쟁의 주역들을 중심에 놓고 있지만 『그들의 5·18』은 군대를 중심으로 5·18을 재구성한다. 저자는 보안사령부 자료와 군부대의 일지를 비롯한 방대한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극우파들의 주장을 그들이 신봉하는 ‘군대’의 발언과 기록을 토대로 반박한다.

이를테면 당시 계엄사령부의 회의록을 통해 당시 광주를 진압하던 군부조차 “항쟁이 장기화되면 불순분자나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395쪽)고 우려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힌다. 1980년 5월에는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한미연합사와 육군본부에서도 ‘북괴 남침설’이 근거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외곽 봉쇄 기간에 군은 광주를 드나드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을 정도로 군은 광주 외곽을 봉쇄했을 뿐더러 해안 경계를 강화했기 때문에 북한군의 광주 침투는 불가능했다. 신군부 스스로 이를 주장하는 것은 경계 실패를 자인하는 행위가 된다. ‘북괴 남침설’은 대국민 기만행위나 ‘북풍 공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을 비롯해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5월 22일에도 남북회담 실무진이 판문각에서 접촉했다. 이후로도 두 차례나 더 만났으나 남북 실무 접촉에서 어떠한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면서 그 위협의 배후이자 당사자인 북한과 실무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와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전두환은‘ 결정적 시기’를 운운하며 군 동원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발표가 있기 전부터 군에서는 병력 투입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12쪽)

광주 외곽의 봉쇄와 함께 전남 해안의 경계태세 강화를 명령한 것이다. 실제로 전교사와 향토사단인 31사단에서는 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즉 당시 계엄군은 광주 외곽뿐 아니라 전남의 해안선을 봉쇄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북한군의 침투가 불가능했다. (314쪽)

그리고 보안사령부의 부마항쟁 평가와 육군본부의 보고서를 토대로 신군부에 저항하는 민간인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할 작전이 이미 1980년 2월부터 입안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학살을 은폐하려고 수없이 증거를 인멸한 뒤에 남은 ‘공식적인 자료’만 연결해도 극우파들의 주장은 힘을 잃는다.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는 4월 19일 이전부터 시위 진압에 대비한 공중지원 방안을 연구하여 「소요진압 공중지원 방안 연구」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공지空地 협동작전으로 조기에 소요 군중을 무력화하여 병력 및 장비의 피해를 방지하고 신속한 작전 종결을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됐다. 육군본부는 1항공여단에 중앙기동부대인 5개의 항공조를 편성, 대기하도록 지시했고, 특전사령부에는 공중 지원에 소요되는 화학탄과 화염방사기 및 병력을 1항공여단에 지원하며, 각급 부대는 500MD 운용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훈련을 실시토록 지시했다.”(90쪽)

북한군으로 몰린 시민군의 진실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김군〉의 출발점이 된 사진.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중앙일보 기자가 찍었다. 

안종훈 장군이 5월 17일 오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의 정치적 동원에 반대한 사실(104쪽), 박춘식 장군이 무력 진압(상무충정작전)에 반대한 사실(384쪽)을 밝히는가 하면 육군본부의 실탄 지급과 소모기록을 검토하여 당시 군대가 열흘간 51만발이 넘는 실탄을 소모한 사실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발포를 검토하고 명령한 군수뇌부의 회의록, 명령서 등이 누락된 경위를 추적한다.  
 
피해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자들은 줄기차게 ‘폭동’과 ‘북한군 개입’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신군부의 기록으로 근거를 상실한다. 저자는 주로 건조한 기록을 응시한다. 동사무소의 일지, 부대일지, 명령서, 회의록 등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던 기록―‘그들의 시선’―으로 5·18을 재구성한 귀중한 연구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5·18 당시 여성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누락되었다고 자평하면서 다음 과제임을 언급한다. 진압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정신적 상처도 연구 대상이라고 밝힌다.

왜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가. 진실을 지키는데 필요한 “엄청난 문서와 증거”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다. 역사는 자주 후퇴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겪은 수난사를 보라. 2009년 이명박 정권은 이 노래의 제창을 금지시키고 새로운 기념곡을 만들겠다고 통보했다. 그 후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주에서 다시 부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가.  『그들의 5·18』은 이 질문의 답변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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