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과 저항의 철도 이야기에 얽힌 한국노동운동사 난숙하게 구워내 - 황석영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읽다
수탈과 저항의 철도 이야기에 얽힌 한국노동운동사 난숙하게 구워내 - 황석영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읽다
  •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20.07.1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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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언젠가 한번은 유명하다는 갈비탕을 먹으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웬걸, 멀건 국물에 갈비 한 덩이 떠 있고 고기 몇 쪽이 있을 뿐이어서 기분만 상하고 돌아왔다. 기름덩이만 떴다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과 일전을 벌였던 시인 김수영의 소시민적 분개('어느 날 고궁을 지나면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야생사자처럼 으르렁대는 세상, 이왕 갈비를 뜯는다면 두세 개 정도 살이 듬직하게 붙은 놈을 사자처럼 맘껏 물어뜯으면서 육즙이 목안에 감기는 갈비만의 그 고유한 풍미를 맛보면서 떨어져야 제격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바쁜 시상에 누가 한가하게 소설을 찾아 읽것는가. 그래도 우리가 좋은 글을 찾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맛의 쾌감과는 그 퀄리티가 근본적으로 다른 정신의 쾌감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 때 좋은 글은 분명 글의 기본을 잘 지키고, 씹는 맛이 남다르며, 육즙처럼 목 안에 쩌르르 하고 감기는 그 난숙한 글맛 때문 아니겠는가.

인생의 난숙기에 접어든 노작가의 장편소설을 재미지게 읽으먼서 소설은 역시 인생의 맛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가 루카치(<소설의 이론>)는 소설은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 말한 적이 있다. 일본의 한국판 사소설私小說과 꾀죄죄한 소설 나부랭이들이 굴러다니는 독서시장에 그의 위치는 거대한 종탑에 비유될 수 있으리라. 난타하는 자유의 종으로서의 개인의 인생과 주변 이웃들의 삶과 파란의 역사에 대한 계몽적 각성으로서의...이런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조그조근 구워내 감성의 세포를 터트리먼서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주변을 새롭게 인식시키며, 궁극적으로 역사가 어티케 맹글어져 왔는지 지난 시절의 삶을 객화시키며 거기 대자적 여유와 공간, 소설적 관조 속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철도원 삼대>는 이백만-이일철-이지산 삼대에 걸친 조선철도노동사를 다루고 있는 600쪽 분량의 대서사다. 서사는 ‘이야기story’와 ‘화자teller'를’기본 요소로 하는데, 삼대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화자는 6.25당시 철도원으로 근무하다 다리를 다친 이지산의 아들 이진오다. 이진오는 25년 동안 노동자로 생활한 자로 지금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에서 노동자를 해고하고 해외로 먹튀하려는 회사를 상태로 농성중이다. 시간이 많으니 자연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성격을 띠고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첫번째는 할아버지 이백만이다. 그는 인천출신으로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손재주가 뛰어나 정미소를 거쳐 영등포 철도 공작창에 와 있는 직원이다. 여기, 개화기에 ‘영등포’라는 시공간으로서의 크로노토포스한 소설적 배경이 독자를 사로잡는 한국적 리얼의 실경의 맛이 있다. 그것은 그곳이 지금도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삶의 시공간적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등포가 철도 공작창으로 근대화의 상징인 기차를 수리, 정비, 제작하는 곳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먼서 들판이던 그곳에 갑자기 큰 마을이 들어서고, 시장이 생기고 교통의 결절점node이 되고 상업 중심지가 되먼서 지역의 변화를 유발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 생활사적 재미가 더해져 독특한 소설적 실경을 발하고 있는 것은 이곳이 바로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성장의 토대였기 때문이다.

"영등포가 원래 모래땅이고 여름이면 물이 드는 게 늘 있는 일이어서 겨울만 빼고는 언제나 땅이 질척거렸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영등포를 진등포라 자조하여 불렀다...영등포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만나는 지점이고 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경성의 길목이었다"

글쓴이는 신도림역에 ‘대성연탄’ 공장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구로 공구상가도 이와 관련이 있고, 좀 지저분한 인상을 주고는 있지만 영등포를 주변으로 많은 상가와 오늘의 여러 백화점이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그 기원과 내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근대 소설이 작가의 계획에 의한 구성의 결과로서 <철도원 삼대>가 일본의 사소설처럼 꾀죄죄하고 내밀한, 퇴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대 이웃의, 타자들의 불의한 삶에 일떠서는 건강한 삶에 앵글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1894년 청일전쟁 시 병력과 군수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울(최초-노량진)-인천 간, 서울-부산 간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하먼서 서민들의 토지가 강제로 수용되고 강제 노역동원으로 민족모순이 격화된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만의 계급적 시선이다.
 
이런 가운데 이백만의 큰아들 한쇠(이일철)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철도기관수가 되먼서 생활의 안정을 누린다. 반면 둘째 아들 두쇠(이이철)은 노동운동 연락책으로 활동하먼서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여기, <객지> 등 한국노동운동소설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그의 오랜 글쓰기 경험과 역사의식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러니까 1930년대 신경향파 이후 카프의 단골 소재가 되어 온 일제 하 노동운동사에 대한 진경이 매우 세밀하고 설득력 있게 그 전경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 한국노동운동사의 소설사적 복원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이 소설이 매우 세밀하고 설득력 있는 소설적 복원을 가능케 한데는 바로 영등포가 그 배경이라는 점인데, 왜냐하먼 영등포는 당시 활동가들의 주무대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각종 공장이 삼십여개나 밀집해 있으며 노동자도 이만여명이고 자유노동자까지 합치면 수만명에 가까운 산업지대였다. 노동자들은 거의 토착 원주민이 드물고 거의가 전국 각지에서 일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공장의 기숙사에 수용된 소수의 일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일반 민가에 방을 얻어 거주하거나 또는 함바나 토막 같은 가가에 거주했다. 따라서 주거의 영속성이 드물었고 직장의 이동 또한 빈번하여 경찰의 추적이나 감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점이 있었다. 영등포는 서울에서 운동의 중심이자 지하조직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활동가들에게 좋은 도피처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철도를 따라 이어진 서해안의 가장 큰 항구 인천을 불과 한나절 안에 내왕할 수 있었고, 그곳 역시 부두 하역장과 공장이 밀집해 있어서 노동자가 수만명이었다. 영등포는 사실 인천을 배후 기지로 두고 경성을 앞에 둔 전선이었다."

그리하여 거물 이재유를 비롯, 박헌영 등 경성콤그룹의 활동상이 하나의 실루엣처럼 그 실경이 포착되고 있거니와, 그 과정에서 갖은 고문과 악행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 그리고 이이철의 죽음, 그들의 죽음에 깊이 있게 간여한 최달영이라는 고등계 형사의 인물 창조는 을매나 전형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 특히 이 대목은 황석영 특유의 입담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소설의 진경 중의 하나다.

또한 기관사로 성공한 이일철이 동생 이이철의 부탁으로 만주에서 거물을 잠입시키기 위해 철도를 이용하먼서 펼쳐지는 모험과 스릴 넘치는 서술은 영화적 시퀀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글쓴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다성악'이라는 말처럼 이 소설은 모노스피크한 단조로운 서술 시점이 아니라는데 그 두드러진 그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고 보여진다. '거시키니...' 하고 자신의 어조를 잃지 않으먼서 그 독특한 개성을 발하고 있는 것은 할머니 주안댁이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뮤즈Muse'라고 볼 수 있을 죽은 할머니 주안댁의 등장은 저 <백년의 고독>을 연상케 할만한 데쟈뷰를 지니먼서 이 소설에서 매우 이채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조선적 리얼리즘'으로서의 전통적 목소리의 복원으로서의 그것이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A voice, 목소리! 다중적 시점으로서의 멀티플렉스mulplex한 그것은 이 시대, 대중이 주공인이 된 대중서사시대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바로 이 대중적 목소리에 발화자 대중의 꿈과 욕망, 이루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가 실려 있게 되는데, 바로 그곳에 서사 특유의 맛과 재미와 이채를 띠고 있는 대중적인 민족 작가로서의 황석영 그만의 색깔과 개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주안댁, 그는 분명 죽은 자다. 그런 그가 가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환영으로 나타나 가족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진다. 이것은 분명 헛것이고 도깨비고 귀신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상이다. 즉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이자 동화이고,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그 무엇의 세계를 함축한다. 이것이 바로 소설적 꿈이고, 서사적 비전이고, 역사의 환영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전복적 상상력을 지닌 노벨티novelty한 소설의 진기한 세계 아니것는가.

 거장 황석영이 마침내 도달한 하나의 서사적 결절점a narrative node으로서의 '조선적' 리얼리즘의 난숙한 서사의 세계...

<철도원 삼대>는 한국소설사에 떨어진 벼락같은 축복이다!


난 그렇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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