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훈 칼럼] 고대와 중세 도시국가들의 전성시대
[공병훈 칼럼] 고대와 중세 도시국가들의 전성시대
  • 공병훈 교수
  • 승인 2020.07.2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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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하여 더 많이 모이는 곳, 고대 도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도시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산다. 하지만 인류가 역사에서 처음부터 도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105,000년 전부터 야생 곡물을 수확한 흔적이 있으며, 11,500년 전 초기 농부들이 나타나 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이와 같은 초기 농경은 세계 11곳에서 따로따로 일어났다. 염소, 양, 소 등의 가축은 약 10,000년 전에 가축화되었다. 따듯한 집에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들인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여야 한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이 생겨났다. 농사에 계속 성공하여 먹을 것이 풍족하여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지리와 기후 환경이 안 좋아 사람들이 굶주리고 더 좋은 다른 땅을 찾아 떠나거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지역도 있었다.

고대 도시들이 자주 범람하여 토지가 비옥했던 나일강(Nile R.)이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그리고 황하(黃河)의 언덕에 주로 생겨나고, 대부분 성벽을 쌓아서 지켜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쳐들어오는 적들을 훤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시기에는 강과 바다를 이용하여 물자를 이동시키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발달할 수 있었다. 나일강은 많은 비가 내리면 범람하고 다시 물이 빠지면 곡식이 무럭무럭 자랐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을 신처럼 숭배했다. 테베(Thebes)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기원전 2100년과 1500년의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였다. 나일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자주 범람하여 주변 토지가 비옥했던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 언덕에 형성된 도시들
자주 범람하여 주변 토지가 비옥했던 나일강이나 메소포타미아 언덕에 형성된 도시들

인간 무선 통신과 뉴스 전달 체계의 시작

인류가 처음 말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지구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사회집단은 자신들의 구두 뉴스 전달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공지성이 지배하는 2020년 지금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의 오지의 원주민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연구 덕분이다. 선교사의 딸로 살았던 줄루족과 함께 살았던 사무엘슨(L.H. Samuelson)은 300마일이나 떨어진 것으로부터 사람들의 입을 통해 줄루족 왕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구두 뉴스 체계는 수만 년에서 수십만 년 전 언어가 발달하는 기초적인 수준에서도 작동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구두 뉴스 전달 체계의 작동은 사회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상호작용이 활발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줄루족이 큰소리를 내는 슬픔의 표시를 새뮤얼슨은 인간 무선 통신(human wirless telegraphy)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죽음을 대하는 다양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큰소리를 내는 공통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슬픈 소리를 내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따른  자신의 슬픈 감정을 전달한다. 그뿐만 아니라 연기를 피우거나 북을 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까지 소식을 알렸다.

큰 마을일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최근의 뉴스가 흘러넘쳤을 것이다. 모닥불 주변이나 우물가, 마을 광장, 시장 등. 지금도 그렇지만 문자 이전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소문에 열광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움직이면 뉴스도 움직인다. 특히 시장은 광범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 커뮤니티 밖의 사람들도 모이는 곳이다. 돈을 주고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뉴스는 더욱 무작위적으로 빠르게 전달되고 확산하면서 스스로 가치를 생산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뉴스는 공공재로서 태어났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많은 뉴스가 상품 거래와도 관련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곳은 가뭄이 들어서 수확이 어렵고, 어떤 작물이 풍년이고, 사냥의 결과는 어떠하며, 누가 만든 물건이 아주 편리하게 사용되며, 누구는 경사가 나고 누구는 어려운 일을 겪었다는 내용이다. 뉴스는 상인이 판매 전략을 세우고 거래되는 상품에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뉴스와 상거래의 공생관계가 시장에서 형성된다. 안정된 사회는 여행자를 환대하는 풍습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상거래는 여행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면서도 뉴스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 부족인 줄루족의 1900년 사진
남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 부족인 줄루족의 1900년 사진

규모가 큰 사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뉴스 전달 체계가 필요했다. 사회 커뮤니티에 위협이 될 만한 외부 소식과 수확 현황을 알고 부족장이나 왕은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려고 했을 것이다. 새뮤얼슨의 연구에서 줄루족은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을 도용하여 왕의 뉴스를 전달하게 했다고 한다. 뉴스 전달자인 메신저(messenger)들은 왕의 뉴스를 가지고 왕궁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는 추장들에게 파견되었다. 메신저들은 각 가정의 가장들에게 줄루족 왕의 뉴스가 분명히 전달되었는지는 확인했다고 한다.

시장과 광장에서 전달되는 뉴스는 흥미롭지만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을 테지만 이야기와 정보는 민주적으로 공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메신저에 의한 뉴스 선택과 전파는 지도자와 지배 계층에게는 매우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뉴스는 권력에 기반하며 권위와 규율을 가지고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시장과 광장 뉴스와는 차이가 있다. 전투에서 패배한 소식은 전하지 않고 승리한 소식만을 전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은 전달되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 있었다.

미국의 아메리칸 원주민들은 20세기 초까지도 공인된 뉴스 전달자가 있어서 메신저들이 죽음, 부족회의, 협약 등의 사건들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 메신저들은 1년에 2회에 걸쳐 봄과 가을에 뉴스를 수집하기 위해 부락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메신저들은 시장과 광장에서 지도자의 전파하고 싶은 뉴스를 큰소리로 외치며 전달했는데 이들을 뉴스 크라이어(news crier)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잘하고 목소리가 크고 또렷한 이들이 지배자와 비지배 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해주었다. 문자가 발명되고 파피루스와 양피지가 널리 사용된 이후에도 문자를 읽을 수 없는 대다수의 피지배 계급을 위해 뉴스 크라이어들이 활동한 기록들이 있다. 이 기록은 광범한 대중에게 소리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라디오가 등장하여 대중화된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문자의 출현과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의 성장

BC 8,000년경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점차 좋아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종류가 많아졌고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다. 석기 도구가 복잡하고 섬세해지면서 신석기 시대가 출현하고 주변 환경에서 더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인류는 목축과 농경 생활 시작하여 정착 생활을 시작한다. 인구의 증가로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최초의 도시가 나타난다. 정책 생활을 하는 농경사회가 본격화되면서 세분된 분업이 이루어져 높은 효율의 기술적 진보를 가져왔다. 노동 분업과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교환방식이나 상업이 필요했다.
 

부조된 함무라비 법전과 함무라비. 함무라비는 BC 1792년부터 1750년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빌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키웠다.
부조된 함무라비 법전과 함무라비. 함무라비는 BC 1792년부터 1750년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빌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키웠다.

함무라비 법전과 공중정원

바빌론이 유명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며 또 하나는 공중 정원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빌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되었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교역과 도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협약이자 규칙이 지닌 특징을 지닌다. 아카드어가 사용되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남무 법전 등 100여 년 이상 앞선 수메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바빌론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사회적 관계와 교역이 얼마나 활발하고 복잡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흥미로운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만 두 번째로 나쁜 짓을 하면 아들을 내쫓을 수 있다.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 중 하나라도 훔쳤더라도 그 값의 열 배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돈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의 손은 잘릴 것이다.
건축가가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무너져 주인이 죽임을 당하면 건축가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집주인의 일가족이 죽었을 경우에는 목수의 가족 중 해당하는 이가 죽어야 한다.
강도가 어떤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면 그 구멍 앞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만하다고 하여 고소하고도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고소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궁중의 남녀 노예 혹은 자유민의 남녀 노예를 성문 밖으로 도주시킨 자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새로이 아내를 들이고도 그에대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인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노예라도 그가 주인에게 "이 자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주인은 자기 소유의 노예임을 입증하고 그 귀를 자를 권리를 가진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두 손을 자른다.

6대 왕인 함무라비(Hammurabi, BC 1792~1750)는 재위 초기에는 유프라테스강의 치수 사업에 집중한다. 이 작업은 하류 지역 도시국가들과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주변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부와 아시리아의 일부를 합한 왕국을 건설해 바빌론을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남은 재위 기간 내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도시국가가 영토 국가로 성장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바빌론 공중정원은 왕궁 안에 높이 25m, 5단 계단으로 된 테라스에 흙을 묻은 다음 물을 끌어올려 아래로 흘려 보내는 식으로 물을 공급하며 나무, 풀,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바빌론 공중정원은 왕궁 안에 높이 25m, 5단 계단으로 된 테라스에 흙을 묻은 다음 물을 끌어올려 아래로 흘려 보내는 식으로 물을 공급하며 나무, 풀,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공중정원은 바빌론 왕궁 안에 높이 25m, 5단 계단으로 된 테라스에 흙을 묻은 다음 물을 끌어올려 아래로 흘려보내는 식으로 물을 공급하며 나무, 풀, 꽃을 심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유적으로 판단하면 가장 윗단의 넓이만도 60㎡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많은 물을 끌어오려 공중정원을 유지했을까 하는 점이다. 전설에 따르면,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인류의 영광'이라 불리는 궁전 바로 옆에 세워졌다. 이는 당시 왕비였던 '아미티스'가 고향의 울창한 녹음과 수목들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그녀를 위해 지었다고 알려졌고, 이런 설화는 바빌로니아 신관 베로수스에 의해 기록되어 후에 유대인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되었다.

바빌로니아인이나 훗날의 아시리아인들은 태양과 달, 그리고 여러 별들을 신으로 모셨고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별이 일정한 궤도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어떤 행성들은 행운이나 불행을 하죠 온다고 믿었고 몇 개의 신성한 행성들에 하루씩을 헌정한다. 신성한 별들은 태양과 달을 포함하여 7개였다. 해의 날(일요일), 달의 날(월요일), 화성(마르스), 수성(메르쿠리우스), 목성(주피터), 금성(베뉴스), 토성(사투르누스)라고 불렀다. 우리가 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바빌로니아인과 아시리아인들이 별을 관찰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도시국가 시대와 뉴스

고대시대의 중국 한(漢)나라, 로마, 이집트같이 거대한 지역을 왕이 통치하는 나라를 제국(empire)이라고 한다. 로마의 사례처럼 고대 제국들도 처음에는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여 다른 지역과 민족을 점령하여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는 국가를 만든다. 하지만 모든 도시국가가 제국으로 발전해간 것은 아니었다.  로마와 중세,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적고 많은 도시국가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지역은 도시국가들의 무대였으며 도시국가들이 상황에 따라 연맹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역할을 감당했다.

고대시대에는 유럽, 중근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 광범하게 도시국가들이 활동했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도시국가들에는 공통으로 도심 한복판에 신전(神殿)이 있으며 성벽과 도시 시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도시국가로서 중요한 점은 자유로운 권리를 지닌 시민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도시국가라는 것은 말하자면 세계 역사상 하나의 특수한 예라고 볼 수 있다. 도시국가는 고대의 씨족과 부족 사회가 국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작은 지역의 독립된 국가를 이루었으며 성벽에 둘러싸여 상업의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은 자유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모여 재판, 집회, 사교, 공연을 위해 사용되던 광장이었다.
그리스의 아고라 광장은 자유 권리를 가진 시민들이 모여 재판, 집회, 사교, 공연을 위해 사용되던 광장이었다.

그리스 도시국가를 기준으로 볼 때 폴리스는 ① 외부에 대한 정치적 독립, ② 내부에서의 자치, ③ 경제적인 자급자족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이 조건들을 완전하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지키고 있던 전형적인 도시국가가 스파르타, 아테네, 로마 등이었습니다. 시민은 국내 재류외인(在留外人), 노예, 피지배공동체와 명확히 구별되는 존재였습니다. 

BC 5세기 중엽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인(人)의 자식이 아닌 자는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정한 것과 BC 5세기∼BC 4세기 아테네에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는 것은 도시국가의 폐쇄적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시민들은 토지와 노예를 소유하였으며, 전쟁과 정치에 전념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시민의 총회인 그리스의 민회(民會), 로마의 병원 회(兵員會)와 평민회(平民會)야말로 도시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학문의 기반은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고대 도시국가의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평등사회는 아니었다.

고대 도시국가 전성시대의 종말

도시국가는 주변의 영토를 넓혀 발전하기도 하였지만, 고대 그리스는 원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 같은 모양의 지중해의 다른 지역에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토 국가로 성장한 로마와 달리 그리스의 식민시는 모시(母市)로부터 독립한 도시국가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어떤 도시국가도 영토 국가로서 발전하지 못했으며, 토지를 소유한 시민층이 몰락하고 시민병제가 붕괴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국가들은 분리주의와 배타성이 강하여 도시국가들 간의 연맹도 지속적인 것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영구적인 연합이나 동맹을 만들지 못해 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BC 4세기 후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Philip II of Macedon)에게 점령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주로 문자 메시지와 메신저를 통해 정복한 국가와 연락을 유지했다. 그는 자신이 건설한 광활한 제국을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페르시아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에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지만 많은 한계가 있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중해의 다른 도시국가들은 같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영토 국가로 빠르게 성장한 페니키아인의 카르타고(Carthago)와 라틴족의 로마(Rome)에 점령되면서 그리스의 도시국가 전성시대는 끝나기 시작했다.
 

1세기경 실크로드
1세기경 실크로드

하지만 유럽과 지중해 지역의 고대 도시국가들의 전성시대 끝난 것이지 도시국가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사용되고 투르크 민족 등 북방 기마 민족들이 중국에서 페르시아와 유럽 지역까지 개척한 실크로드(Silk Road)는 그 길로 이어진 작은 도시국가들이 활동 덕분에 가능했다. 실크로드의 도시 국가들의 유적에 대한 연구에서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결합한 다양하고 개방적인 형태로 발전해왔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크로드는 역사를 통해서 더 다양한 교역품들을 전달하는 통로로 확대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와 뉴스가 유통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실크로드의 유럽 지역에 존재했던 베네치아 또한 도시국가의 중요한 사례이다.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기원전 10세기까지 이 곳에 살던 '베네티인'들에게서 유래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로마가 훈족의 침입으로 무너지던 시기에 117명이 그들만의 충족을 뽑고  훈족이 쳐들어올 수 없는 갯벌 지역에 터전을 잡으면서 시작된다. 베네치아는 중세와 르네상스 기간 유럽의 해상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레판토 해전에 휘말리며 유럽의 중앙 정세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도시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비단, 향료, 밀을 거래하는 주요 창구였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중세 도시국가들의 부활

고대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또다시 중세 도시국가들의 시대가 부활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베네치아와 같은 시대에 탄생한 중세의 도시국가로서 라구스 공화국(Respublica Ragusina)이 있다. 라구스 공화국은 현재 크로아티아의 역사적 지역인 달마티아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작은 공화국이다.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으로 1808년에 멸망할 때 총 인구는 3만 명 가량이었으며, 그중 약 5000명이 라구사 시를 둘러싼 울타리 안에 살았다.

라구사 공화국의 기원은 615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바르족과 슬라브인들에 의해 로마의 도시 에피다우름(Epidaurum)이 파괴되자, 그곳의 거주민들이 대략 7세기에 라구사를세웠다고 한다. 이 침략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일부가 북쪽으로 25Km 정도를 올라가 해안 근처의 섬에 정착하였고, 그 도시는 곧 라우사가 되었다. 그것이 슬라브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두 차례의 공격을 통해 656년에에피다우름을 완전히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이 포함된 슬라브인들이 7세기에 이곳 해안에 정착했다.
 

1400년대 북부 유럽 도시국가들의 한자동맹 영역 지도
1400년대 북부 유럽 도시국가들의 한자동맹 영역 지도

노브고로드 공화국(Novgorod Republic)은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발트 해에서 우랄 산맥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점유했던 중세 루스인들의 공화국이다. 공화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존엄한 대(大) 노브고로드라고 불렀다. 공화국은 한자 동맹의 동쪽 끝으로서 번영하였다. 10세기부터 충성스러운 노브고로드 시민들에게 상당한 자유권과 특혜를 보장해 주었다. 이 때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본다. 여전히 키예프 루스의 한 지방이었지만, 노브고로드는 점점 힘을 키워 거의 독립적인 강력한 지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한자 동맹(die Hanse)은 13~17세기에 독일 북쪽과 발트 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연맹이다. 주로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동 방호와 상권 확장 등을 목적으로 했다. 1370년에 전성기를 맞은 한자동맹은 북유럽의 무역권을 지배하고 런던, 브뤼헤, 노브고로드 등에도 재외 상관을 두었다. 라인 강에서 발트 해, 북해에 걸쳐 수상 교통과 운수, 무역에 종사했으며, 갑판이 넓고 가운데가 큰 대형 선박을 이용해 북해와 발트해 방면에서 목재, 모피, 철 따위와 대구 같은 수산물, 곡식과 맥주 등을 저지대와 서부 독일로 운송하고 동양의 향료와 영국의 양모나 기타 가공품을 북방으로 운반했다. 후에는 동유럽의 산업 원료를 중계하여 서유럽의 수공업자에게 공급했다. 이러한 무역 발전에 따라 해상운송의 확보와 독점을 취해 군사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유튜브 채널 : 공병훈 지식공유

공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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