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톺아보기 01] 한국근대문학관을 가보다. 다이쇼로망과 역사의 재해석에 대해서
[문학관 톺아보기 01] 한국근대문학관을 가보다. 다이쇼로망과 역사의 재해석에 대해서
  • 이민우 기자
  • 승인 2020.07.31 20:02
  • 댓글 0
  • 조회수 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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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관, 내부 사진=이민우기자
근대문학관, 내부 사진=이민우기자

인천 중구 신포로 15번 길에는 ‘다이쇼 로망’이 있다. 거대한 중앙 돔에 석조 단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럽풍 건물이 서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는 일본 58은행 지점으로 사용한 건물도 있다. 두 건물 모두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생경하게 느껴진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길거리를 누비고 아시아와 서양문화가 묘하게 섞여  공존하던 개항기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천은 ‘다이쇼 로망’ 이었던 적이 있다.

​1880년 개항시대 인천은 청일 조계지였다. 일본인과 외국인들 모두 인천에서는 자유롭게 무역을 했을 뿐만 아니라 치외 법권 지역이었다. 덕분에  다른 나라처럼 인천은 조선과는 다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 1차대전의 승리와 함께 청일 러일 전쟁에 승리하며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도래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전게되었던  다이쇼 로망이 바다를 건너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이쇼 로망은 사전적 의미로 1911년 다이쇼 천황 시기의 일본의 문화와 시대상을 뜻한다. 이 시절은 한반도와 대만을 식민지화하며 일본의 경제 규모가 부풀려지고 군사력이 확충되어 세계에서 손에 꼽는 제국이 되었던 시기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자신의 황금기 시절의 문화와 시대상을 떠올리게 하기에 이 시기를  ‘로망’이라고 부른다.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다이쇼 시대는  문화적으로도 독특한 시기였다. 대중문화가 빠르게 발전했을 뿐 아니라 ‘황양 창출’의 이름 아래 일본과 서양의 문화가 섞였기 때문이다. 기모노를 입은 여성과 양복을 입은 남성이 공존하였고 두 문명의 충돌은 매력적인 소제 거리가 되었기에 많은 콘텐츠에서 이 시기를 다룬다. 한국의 드라마와 콘텐츠 역시 "다이쇼로망"의 영향으로 '미스터션샤인' 같은 개화기 시기를 배경으로 한 컨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인천시는 인천 개항장지구 테마파크를 조성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개화기가 일본인들에게는 낭만적 향수를 느끼게 해주지만 다른 반대로는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을 뜻하기에  피해자인 아시아권 나라에는 아픈 식민지의  역사다. 그렇기에 인천의 ‘다이쇼 로망’은 우리에게 ‘로망(낭만)’일 수 없다.​

역사는 어느 쪽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로망이 될 수도, 아픔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인천 중구 신포로 15번 길을 가보자. 그곳에는 한국 근대문학관이 있다. 일본의 창고 건물을 개조해 한국근대문학관을 만들었다. 이 문학관은 건물 그 자체로도 한국의 근현대사이다. 한국 근대문학관은 근대계몽기와 해방기, 즉 1894년부터 1948년대까지를 담고 있다. 왕조의 몰락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까지 근대 시기를 총체적으로 한국 문학의 변화를 담고 있다.​

개항기 시대의 인천만큼 근대 한국문학은 변화의 소용돌이에 서 있었다. 서양에서 넘어 들어온 자유로운 글 형식들에 당시 신체시, 신소설, 신극 등이 영향을 받아 등장했다. 다소 과도기적인 시절이었지만 그 뿌리가 서구의 문예사조 혹은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서 이식이 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더욱이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민족주의와 친일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 등 수 많은 담론이 계파에 맞춰 폭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를 다룬다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한정된 물리적 공간에 근대를 다 담기란 어려운 문제고 지금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은 이데올로기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한국근대문학관은 해석보다는 정리에 치중한다.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 문학의 계보도를 순서대로 이해하게 하기 쉽게 정리한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빼곡히 각 문학의 계보도가 적혀져 있었으며, 이도 부족해 키오스크와 태블릿 등을 통해 음악과 추가 설명을 듣게 해주었다. 특히 지향성 스피커는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노래나 설명을 들을 수 있어 타자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설명을 듣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복각본의 책을 직접 만져보고 뷰 마스터를 통해 당시의 사진을 살펴보게끔 해 당시의 시대를 재현했다. 이 재현은 근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근대문학관의 하나의 거대한 자습서처럼 느껴졌다. 공부하기 좋게 요약되어 있고 빼곡히 압축된 자습서. 필요한 요점들이 정리되어 있었으나 거기에 무슨 이야기와 이것을 왜 알아야 하는지에 내용은 빠져 있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인천 중구에서 '다이쇼 로망'을 느꼈으나 단순히 낭만적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그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제국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근원적 한계 앞에 문학은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지금에 와서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야 한다.

한국근대문학관 사진=이민우 기자

하지만 한국근대문학관은 절제되어 있었다. 예컨대 친일문인에 대해서 단순한 몇 줄 문장이 적혀 있을 뿐이다. 문학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파편적인 몇 줄의 글귀뿐이다. 

작년 6월 이승만포럼 100회 기념 세미나가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체시가 최남선의 소년에게가 아니라 이승만의 ‘고목가’라는 주장이 나왔다. 나는 이를 일종의 인정 투쟁의 일환으로 본다. 이것의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 나서도 누군가는 아직도 근대 문학을 통해 지금에 영향을 주려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대 문학을 해석하는건 다분히 정치적이고 문제가 생길 소지도 많다. 

그럼에도 근대는 재해석의 공간이며 이데올로기의 공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육사가 세상을 떠난 날짜가 아닐 것이다. 이육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며 이육사가 감옥에서 죽을 때 무엇이라 외쳤는가(이육사가 죽기 전 외친 말에 관해 밝혀진 바가 없다), 그것을 상상하는 힘과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차라리 논란이 가득한 문학관이라면 어땠을까?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문학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립적 정보가 아닌 재해석과 질문이다. 이미 일본의 창고였던 공간은 우리에게 문학관으로 재해석 되었다. 그곳에 있는 근대를 재해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지어질 문학관이 있다면 나아가 그것이 한 시대를 담게 된다면 다양한 해석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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