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간담회] 등단 제도와 문예지 시스템, 이대로 괜찮을까? (2)
[기획 간담회] 등단 제도와 문예지 시스템, 이대로 괜찮을까? (2)
  • 김보관 기자
  • 승인 2020.08.26 16:47
  • 댓글 0
  • 조회수 4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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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간담회] 등단 제도와 문예지 시스템, 이대로 괜찮을까? (1) 과 이어집니다.

* 본 행사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 이전(8월 15일)에 진행되었습니다.

[사진, 편집 = 김보관 기자]
[사진, 편집 = 김보관 기자]

 

사회: 이민우 뉴스페이퍼 대표
참여: 문종필 평론가(2017년 데뷔), 우다영 소설가(2014년 데뷔), 이소연 평론가(2008년 데뷔), 한의연 작가(반년간문학잡지 비릿 be:lit 에디터), 한소리 작가(웹진 아는사람 기획자)

 

민우: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건 문단 시스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부조리를 많이 겪는다는 거죠. 작가노조 등 대안 권력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지만, 거기에 대한 걱정이나 자기검열의 문제도 있어요. 현재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문학계에만 저작권 신탁 단체나 이권 단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이권 단체나 새로운 대안 권력이 나와야 하는 시기가 맞는데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소리: 얼마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운영하는 “아는사람”은 웹진이라고는 하는데 플랫폼이 돼 있어요. 원하는 누구든 언제든 올리고 삭제해도 상관없고요. 공지사항에 ‘다른 매체에서 여기에서 작품을 보고 청탁할 수 있으니 연락 가능한 주소를 남기라’고 적고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실제로 청탁 메일이 왔다고 해요. 등단제도를 거치지 않으신 분인데도 다른 매체에서 보시고 청탁을 드리고 싶다고 연락이 온 거죠. 저는 그거에 되게 놀랐거든요. 여기에서 아주 조금의 희망을 엿봤어요. 비슷한 일들이 많이 생겨나면 ‘우리가 얘를 발굴하고 이 사람만 실을 거야’, ‘더 좋은 걸 실을 거야’ 등의 생각이 아니라 차차 공생 관계와 생기지 않을까.

웹진 아는사람의 문학광장: 소리
웹진 아는사람의 문학광장 [소:리]

종필: 그러면 이제 자본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립 문예지들이 생존하고 이길 방법은 뭘까요? 팀들끼리 뭉쳐서 넷플리스처럼 클릭하면 다 연결되는 서비스나 묶어줄 수 있는 플랫폼이 있다면 어떨까요? 독자들이 좀 더 손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대중이 생각하는 문학은 대형 출판사에 그쳐요. 하지만 분명 그 외의 곳들도 존재하죠. 우리가 독자 접근성의 측면을 고민해야 할 때인데, 문제는 그런 걸 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수반되어요.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아요. 지원금을 받아도 눈치 봐야 하고요. 딜레마 속에서 여러 독립 매체를 하나로 묶을 것을 만들면 연대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소리: 유운 시인이 하는 시대의 사랑이나 다른 작가진 또는 기획진들이 준비하는 웹진 소식을 들을 때 그런 독립적인 웹진이나 문예지가 생기면 그 사람들과 꼭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로 중복투고를 눈치 보는데, 독립 매체끼리는 중복투고 해도 된다는 규정을 만들어도 좋고요. 
 
종필: 광고나 문구를 싣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소리: 매체를 운영하다보면 피드백을 받고 싶은 순간이 있는데 받을 데가 없어요. 독립적인 웹진이나 문예지 등을 운영하는 사람끼리 모여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소연: 하나의 협의체를 만들 수 있지 않나요?

종필: 아무래도 누군가 자기 시간을 빼서 해야 하는 일이라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민우: 언론사의 경우를 예시로 들면 네이버, 다음 검색 엔진에 들어가지 않으면 고립되기 쉬워요. 특히 인터넷 세계에서 더욱 그렇죠. 독자들이 굳이 사이트 주소를 알아내서 볼 이유가 없으니까요. 해결을 위해 포탈과의 제휴 후 독자 접근성을 높이는 건데, 제휴를 맺는 일이 쉽지 않아요. SNS로 만드는 독자 접근성에는 한계가 있고 네이버, 다음 제휴도 어느 정도 규모와 시스템을 갖춰야 받아줘요. 연대체가 필요한 이유죠. 연대체가 나와서 다 같이 맞춰 준비할 때만 가능한 일이에요. 

소리: 최근에 애플리케이션 제작 견적서를 뽑아봤어요. 오늘의 운세처럼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직은 기획 단계에 있는데 개인적으로 제가 디자인, 사진, 웹 관리 등을 하고 있어서 고려 중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영: 시요일의 경우에는 창비의 시만 볼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어요. 하나의 어플로 다양한 지면을 다 볼 수 있으면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요? 넷플릭스만 해도 항상 영화를 많이 보지 않더라도 가입된 상태로 매달 돈을 내잖아요. 중요한 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

종필: 이런 몽상을 하곤 해요. 잘 때 보곤 하는 유튜브의 경우 채널 종류가 많아요. 영화도 있고 먹방도 있고 재밌으니까 계속 보게 되죠. 단순한 원리에요. 문학도 그럴 순 없을까요?

소리, 소연: 맞아요. 재밌어야 해요.

종필: 지금은 문학인들도 다양한 걸 시도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대형 출판사의 라인에 못 들어가면 밀려난다는 이야기까지 있잖아요.

다영: ‘SF는 정말 끝내주는데’라는 책 제목을 보고 너무 좋아서 ‘그렇지, 바로 이거지’라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문학이 무엇이든 우리는 속으로 ‘문학은 정말 끝내주는데’라고 생각하잖아요. 내가 아는 이 끝내줌을 알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향유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늘 속이 타죠. 지금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들에는 그럴 기회도 딱히 없고 그럴 여유도 없어요. 결국,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서 위안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소연: 장르문학의 경우에는 보편 독자에 호소하지 않고 마니아와 팬을 겨냥하고 있어요. 이들이 한 번에 수십 권씩 구매하기도 하죠. 사실 자기 팬만 거느려도 먹고 살 수 있는데, 지금은 문학판은 너무 얇아서 내 팬만으로 먹고살 수 없는 구조 같아요.

종필: 작가들도 이런저런 노력이 필요해요. 한편, 심사제도도 객관적이지 않아요. 심사위원의 개인적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선배들도 그렇게 말하고요. 물론 잣대를 보유하겠지만,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아요. 작가 개인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죠. 이런 딜레마에 어떻게 부딪혀 뚫을 수 있을까요?

소연: 재미만 잘 추구해도 가능하다고 봐요. 우리가 흔히 넷플릭스를 선망하지만, 소설 원작인 작품들이 많아요. 소설 아니면 웹툰 원작인 경우도 종종 보이죠. 원작이 없으면 플롯이 약하기도 하고요.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선비적 구조를 바꾸어야 해요.

이미 좁은 시장을 더욱 좁게 만들고 있어요. 다른 나라는 영화, 드라마 다 하는데 우리는 ‘외도한다’고 하고요. 2020년에 셰익스피어가 살았으면 넷플릭스에 입사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어요. 관련 시장을 우리의 영역으로 끌어 와야 하지 기존의 관성적인 것들만 문학이고 ‘인생의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관념에 묶여 있으면 안 돼요.

소리: ‘재미’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게 요즘은 ‘나만 아는 인디 밴드’처럼 혼자만 알고 싶어 하는 추세가 조금 바뀌기도 했어요. 무언가를 추천하고 공유하는 콘텐츠도 많이 보이고요.

소연: 저는 그래서 작가들이 글을 쓸 때도 이게 어떻게 미디어 믹스가 될 수 있나 고민하고 작법의 변화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품에 상을 주고요. 젊은작가상이나 신춘문예 수상작은 대체로 문체로 승부를 보는 것 같아요.

종필: 세대 간 문학을 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기존의 선배들은 한국 전쟁, 식민지, 민주화 운동 등을 겪어 왔죠. 그런 걸 겪은 세대가 해온 문학과 지금의 문학은 또 다를 거예요. 겪어 온 삶이 다르고 생활패턴이 다르죠. 새로운 문학을 할 시대라고 생각해요.

소연: 맞아요. 이건 제로썸 게임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문제에요.

소리: 그러고 보면, 문학판은 방송이 없어요. 다른 분야는 있는데 말이죠.

다영: 예전에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긴 했죠. 그런데 그때 방송에 나온 책이 지금도 베스트셀러에요. 오래전 방송 매체가 만든 파급력을 상쇄할만한 힘이 이 안에 없었다는 거예요. 슬픈 일이에요. 사실 많은 이들이 문학에 대해 잘 모르고 학교에서 수동적으로 문학을 배울 뿐 직접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만드는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성인이 돼요. 운이 좋아서 어느 날 ‘나도 독서를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딱히 좋은 책을 찾는 방법을 모르니 손쉽게 검색을 택할 테고, 그러면 모범답안은 그런 프로그램의 추천 도서거나 대형 출판사의 책들이죠.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되었던 도서

종필: 문학동네에서 몇 년간 퀴어문학을 많이 다뤘죠.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고요. 그런데 문예지 뒤편에 소개된 시집을 보면 문학동네 시집이 다수에요.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아쉽고 신뢰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소리: 비 오는 날 유튜브나 멜론에 뜨는 ‘비 오는 날 듣고 싶은 플레이 목록’을 듣다 보면 뜻밖의 명곡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문학은 그렇지 못해요. 재미있는 걸 새로 접하기 어려워요.

소연: 결국은 큐레이션 문제네요. 넷플릭스가 잘 된 게 큐레이팅이거든요.

다영: 그러려면 아카이빙을 해서 알고리즘을 형성해야 하는데, 결국 이 또한 자본과 인력이 소요돼요. 저는 이 부분이야 말로 지원금을 주고 있는 나라가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민우: 예술위에서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해요.

소연: 우리끼리 하는 걸 만들어야 해요.

종필: 청탁을 거부하는 문화도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새로운 걸 하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요. 이름 있는 작가들이 먼저 시도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민우: 이런 문제가 있어요. 저희가 취재할 때 항상 4, 50대 중년 작가 목소리 듣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나는 이미 문단 시스템의 기여자다. 동료를 어떻게 욕하냐.’하는 반응이에요. 문학계 내에서 자리를 잡은 분들의 목소리가 필요한데 다들 내키지 않아 해요. 대세나 힘이 기울지 않으면 안 할 것 같아요. 생태계를 새로 만드는 데에는 자본, 노력, 시간이 들어갈 것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해요. 현대에 남아 있는 이런저런 문학 사조들을 포용할까요? 새로운 단체나 집단을 만든다면 어떤 방식이 되어야 할가요?

의연: 조금 거칠게 말하면 저는 문학 시장에서 남은 재미, 가능성 있는 재미는 ‘쓰는 재미’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작가와 독자를 빗금으로 구분 짓는 구조, ‘작가/독자 체제’에서 일방향의 읽는 재미를 수치화한다면 아마도 현재가 최대치이지 않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단순히 읽기만을 원하는 인구가 더 늘어날 일은 없을 거예요. 말하자면 ‘나는 쓸 테니 너는 읽어’의 구조인데, 친구랑 대화할 때도 일방적으로 듣는 일은 쉽지 않잖아요. 소비자들은 더는 일방적 수용자에 머무르지 않아요. 사운드 클라우드, 유튜브, 웹소설 등의 플랫폼을 보면 기본적으로는 소비자의 자리에서 시작하지만 언제라도 창작자로서 이력을 쌓기 시작할 수 있게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죠. 

시대의 요구가 이처럼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문학·출판계는 조그마한 창작자로서의 권력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분산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분산되기 시작하면 의외로 더 큰 판이 될 수도 있고요. 서로 윈윈이 될 수 있는 그림도 영 불가능한 그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저는 진지하게 (문예창작 제도권 바깥에 있는) 학생들이 오늘날의 한국에도 여전히 작가와 시인이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서 자신들 또래의 작가, 시인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어요. 문단 안팎에서 현대 한국 문학을 체감하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한국 문학이 없는 오늘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있어 2020년의 한국문학은 말 그대로 아예 ‘없는 것’일 수 있거든요. 

문학은 인간의 기본적인 특질 중 하나인 언어로 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무엇임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거죠. 저는 교육에 큰 문제가 있다고 봐요. 입시 학원에서도 몇 년 일했는데 문예창작 전공자임에도 예술로서의 문학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미 말끔히 가공된 지식을 전달하는 데 급급했어요. 역사와 다를 바 없었죠. 한국의 문학교육은 국가에 의해 도구화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예체능 분야 교과목처럼 예술로서의 문학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젊은 시인과 작가들이 교육 현장에 투입될 수 있다면 좋겠죠. 그런 식으로 사람들 마음에 내재된 ‘쓰는 욕구’를 건드려주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더 좋은 글, 더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서라도 읽게 되어있다고 생각해요.

간담회 현장 [사진 = 이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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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 그렇다면, 지금의 문예지 시스템이 유지될 거라고 보시나요?

소연: 없어져야 하고 없어질 거로 생각해요. 등단제도도 폐지 돼야 하고요.

종필: ‘등단제도’라는 게 그 명칭에서 이끌리는 정서는 없어질 수 있어도 기존에 무엇인가를 선정하는 형태는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소연: 담론의 형태로 드린 말씀이에요. (웃음)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무시할 필요는 없죠. 영토화, 재영토화, 탈영토화가 이루어질 텐데 지금은 탈영토화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기존의 것이 너무 낡았어요. 지금도 좀비 같은 상태라고 봐요.

다영: 현 등단 제도를 인위적으로 폐지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각 문예지의 신인상과 신춘문예는 그들이 원하는 오랫동안 굳어진 틀이 있어요. 단점이라면 오직 그 틀을 통과한 글들만이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고, 장점이라면 그런 방식 안에서 어느 정도 기본적인 역량을 공정하게 검증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는 작가를 딱 잘라 근절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문제는 현재 거의 모든 등단작가가 이런 비슷비슷한 기대와 요구에 응한 작가들뿐이라는 거예요.

조금 안온하긴 하지만, 현 등단 제도를 유지하며 다른 방식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데뷔 방법이 생기고, 그렇게 시작한 작가들이 함께 활동하게 되면 당연하게도 그들이 하는 것이 곧 문학이 될 거예요. 기존의 등단 제도는 결국 그 새로운 문학에 영향을 받을 겁니다. 기존의 방식도 새로운 방식도 상호작용하며 자연스럽게 변할 거라고 믿어요. 다만 그들이 비슷비슷한 이상으로 한데 뒤섞이는 건 종국에 현재의 등단 제도와 다를 바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요. 지금 등단 제도의 변화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맥락은 다양한 작가가 다양한 문학을 울분 없이 할 수 있는 생태계의 확보인 것 같아요. 서로를 밀어내지 않아도 충분한 의자를 확보하려는 모색이 등단 제도의 변화와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 등단이라는 제도 자체가 공중분해 되어 사라지면 기존 방식으로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 입장에서는 허망하고 막막하지 않을까요?

소연: 등단하고 청탁이 안 오면 어차피 막막하죠.

종필: “베티 블루”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남자 주인공이 소설가인데 계속해서 글을 투고해요. 결과적으로는 출판사에서 선택하겠지만, 투고 중심으로 가고 등단제도를 없애도 나쁘지는 않을 듯해요.

소리: 그렇게 되었을 때 편집자의 노고나 노동이 과중하진 않을까요? 쌓인 원고를 출판사가 감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민우: 신인상이나 등단제도가 사실 추후 청탁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현재 통용되는 청탁 DB가 없어요. 각자의 감식안에 따를 수밖에 없죠. 공적 청탁 DB와 같이 스스로 어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의연: 등단제도를 운영하는 신문사나 매체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소설의 경우 ‘200자 원고지 기준 몇 매 이상’과 같이 분량이 정해져 있잖아요. 대체로 80매에서 100매 정도로 기준을 정해두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의 단편소설이 오늘날의 시간 감각으로 읽기에는 다소 길다고 생각해요. 단편은 단편이기 때문에 한 번의 호흡으로 읽었을 때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고 보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전에, 단편소설의 분량을 일정하게 맞춰 놓는 것 자체가 너무 이상한 규율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특히나 단편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데 그 틀과 형식이 지나치게 규격화되어 있어요. 

소연: 문예지 적정성에 맞추느라 그럴 거예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중에 원고지 50매도 안 되는 작품들도 많죠.

의연: 그쵸. 공감하는 게, 카버 소설 보면 ‘어라? 이 사람은 소설을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내네?’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거든요. 거기서 느껴지는 건 미적 자율성이에요. ‘아,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낼 자유가 있구나.’ 그동안 한국의 소설가들에게 미적 자율성이 보장된 적이 있기는 한지, 이게 요즘 자주 생각하는 주제예요. 조심스럽지만 매수로 단편 원고의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시처럼 편수로 고료가 책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다영: 저 같은 경우에는 고료를 똑같이 받아도 작품에 따라 길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길게 쓰고 짧아져야 하면 짧게 썼어요. 지면의 분량이 정확하게 정해진 글이 아니라면 문예지에서 관습적으로 제시하는 소설 분량 기준을 허물 필요가 있어요. 많은 작가가 정해진 분량을 쓰도록 훈련되어 있지만, 소설마다 의도에 알맞은 분량이 다르잖아요.

소리: 한국에만 단편집 문화가 특히 활성화되어 있어요. 문예지에 실린 작품을 모으는 형태로요.

다영: 그마저도 갈수록 단편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줄어들어서 앤솔로지 작업이 대안으로 나오고 있기는 해요. 대개 테마를 정해 주기 때문에 문예지만큼 자유로운 창작 작업은 아니지만 바로 책으로 출간되어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결국엔 소설집으로 엮이는 단편 활동 안에 있어요. 단편 등단 이전에 책을 낼 수 있는 제도는 장편소설상인데 많은 상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출판사 입장에선 상금만큼 판매 수익 회수가 안 되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일 거예요. 현재 문학 활동 구조가 단편에 익숙해져서 퀄리티를 갖춘 장편소설이 나올 역량이 형성되기 힘든 것 같아요.

의연: 저는 작가 개인의 역량이 없다고는 생각지 않고, 애초에 일정한 분량의 단편만을 상상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근육이 굳어진 느낌이랄까요? 그마저도 분량이 대부분 비슷하다 보니 작품들의 전반적인 골격 또한 닮아 온 것 같고요. 하여간 단편 양식에 드리워진 분량이라는 기준은 제게는 근본 없는 규칙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에요. 기원을 따져 묻고 바꿔야 하지 않나 싶어요.

소연: 한때는 단편의 미학이 상찬받고 빛나는 성과도 있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해요. 문예지가 기존의 근대적 구조 이어지게 만드는 핵심 장치라는 생각이 들어요.

소리: SF 장편 시나리오 공모전의 경우에는 장편으로 확장할 수 있게 멘토를 매칭해서 도와주기도 해요.

*

종필: AI가 이제 글도 쓰잖아요. 일본에서는 AI가 플롯을 짜고 세부 내용은 작가가 쓰기도 한 대요. 제법 괜찮다는 이야길 들었어요.

소리: 일종의 협력 같기도 하네요.

소연: 애플리케이션이 있어요. ‘스토리 플로터’인데요. 스토리를 만들어 주기도 해요. 비슷한 앱이 많아요. 한글화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요. 로버트 매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고전 도서가 있는데, 그 내용이 집약돼서 앱에 있어요. 20가지 마스터 플롯을 가지고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지 분량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선택하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줘요.

‘스토리 플로터’ 사용 예시

소리: 로봇이 쓰는 시대네요.

소연: 제가 말한 이런저런 폐지론이 사실은 명분 싸움이에요. 실제로 이뤄지기를 주장하기보다 그 명분을 바탕으로 선언하고 창작하는 거죠. 길이든 뭐든 그 명분 아래서 자유자재로 글을 쓸 수 있게요.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과 함께 어떤 명분 아래서 기존의 것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문학판을 짜겠다는 의지에요.

의연: 최근에 트위터에서도 ‘순문학’과 ‘장르문학’ 플로우가 있었잖아요. 뭐 돌고 도는 플로우지만. 둘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문법’의 유무를 따지는 시각도 있었는데, 2020년 현재로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기준 같다고 생각했어요.

소연: 맞아요. 순문학에도 문법이 있죠.

의연: 일정한 수준의 분량을 단편의 기준으로 두고 쓰면 문법이 없을 수 없어요. ‘말’ 이전에 ‘형식’이 먼저 오니까요. 의견이 분분하지만 저는 신춘문예 타입의 소설이 있다고 보고요. 시 역시도 문법이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은 차라리 경향이나 사조에 가깝다고 봐요. 말하자면 더 다양하죠. 그토록 이야기되어온 형식적 자율성을 처음부터 다시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소연: ‘작가 자율성 선언’ 같은 걸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선언이요.

종필: 우리가 제도권 교육 아래 훈련을 받아 쓰는 부분도 있죠. 다만 작가는 어느 순간 훈련으로 익힌 것을 버린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전 단계에서 조금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소연: 미술의 경우에도 입시를 준비할 때 계속 비슷한 그림을 그리잖아요. 재밌는 건, 그런 그림을 그리다 외국의 미대에 들어갔더니 ‘왼손으로 그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기존의 틀을 깨라는 거죠.

소리: 저는 비교적 최근까지 백일장을 다녔을 것 같은데, 대부분 외워서 가요. 어떤 시제에도 끼워맞출 수 있게요. 그래서 백일장이 외워가는 싸움, 암기의 과정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연: 시를 잘 쓰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망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네요.

의연: 순수문학이니 순수예술이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순수하지 않죠. ‘순수예술’의 관점에서 순수문학이 불가능한 개념은 아니라고 보지만, 적어도 현시점의 한국 문학을 가리켜 ‘순수문학’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봐요.

소연: 과거에 황석영 작가가 문예창작과를 없애자고 해서 반향이 있었잖아요? 이후 사과도 했지만, 원성이 엄청났죠. 하지만 그 맥락은 무엇이었을까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소리: 생각해보면 현재 표현의 자유도 안 지켜지고 있고 자유의 표현도 어려워요. 늘 정해진 형식이 있고 무슨 자유를 말하는지 뚜렷하지 않죠.

다영: 모두가 자유롭게 글을 쓴다고 생각할 테지만, 과연 진짜 자유롭게 쓰고 있나? 하고 반문해보게 돼요. 여기저기 영향을 받고 틀 안에서 쓰게 되니까요. 그 틀을 깨려곤 하지만 도리어 내 안에서 발견하기도 하고요.

문종필: 자유를 잘못 쓰면 방종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참 쉽지 않네요.

 

이후 문예창작과 교육 과정과 등단 제도, 문예지 시스템, 독립 매체 등에 대한 폭넓은 대화가 이어졌으나 분량 관계상 이하의 내용을 줄입니다. 간담회에 모인 분 중 일부 인원은 추후 새로운 자리를 마련해 실질적인 방안과 관련한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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