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기획 인터뷰 03] 박형준 시인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이 주는 잔잔한 물결
[추석 기획 인터뷰 03] 박형준 시인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이 주는 잔잔한 물결
  • 김보관 기자
  • 승인 2020.09.30 19:26
  • 댓글 0
  • 조회수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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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변치 않는 순간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

[뉴스페이퍼 = 김보관 기자] 가을에 어울리는 단 한 권의 시집을 추천하라면 나는 아이러닉하게도 여름의 초입 우리를 찾아온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을 떠올릴 것이다. 비의 향기와 오후 서너 시의 산책길, 겨울의 눈 쌓인 들판을 만날 수 있는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에는 사계절을 넘어선 창밖 거리의 구석 구석이 고루 담겨 있다.

특히 벤치에 앉은 노인과 전철 출입문에 얼굴을 대고 우는 여인은 물론이고 잠 못 드는 나비와 죽은 매미의 날개로 뻗어 나가는 박형준 시인의 기민한 시선은 우리가 쉽게 지나친 세상의 테두리를 섬세하게 전달한다.

여느 때라면 삼삼오오 모여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을 추석 연휴. 뜻하지 않은 이유들로 훌쩍 멀어진 우리지만, 언젠가 다시 들이킬 일상 속 선선한 공기를 기대하며 박형준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과 함께 마음 속 산책을 나서보자.

(시인 영상)

Q. 지난 6월,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발간 이후 근황은 어떻게 되시나요? 간단한 소회와 안부를 전해주세요.

이번이 일곱 번째 시집인데 시집을 낼 때마다 설렘이 있어요. 물론 불안한 설렘이지만요. 청년 때는 막막함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비유하자면 막막한 들판에 책을 한 권 떨어뜨린 것처럼, 그래서 누군가 지나가다가 그 보잘것없는 시집을 발견하고 읽어줄 것을 기대하는 설렘이 있어요. 중년인 지금은 세상이 조금은 익숙해져서 막막함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는 청년 때와는 다른 게 있지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요. 그런 데서 오는 불안과 한계가 있지만, 시집을 내는 일은 그 자체로 기쁜 일인 것 같습니다. 생활은 시집 내기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질 게 있나요? 

Q. 91년 데뷔 이후 약 30여 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가장 처음 시를 썼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글을 쓰게 된 시작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글을 쓰게 된 시작점이라면, 내가 쓴 시도 시의 축에 들까 고민하던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걸로 따지자면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고향집 툇마루에서 시작되었지요. 고향집 툇마루에 누워 있는데, 천둥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퍼붓는 거예요. 마당을 쓸고 가는 빗물을 보면서 갑자기 시가 떠올랐어요. “비는 내리는데 강물은 불지 않았다./목만 내밀고서/젖은 거품을 만드는 꽃게 한 마리/잠긴 갯벌 속에/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장마」라는 시였지요.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끔 오는 소설을 쓰는 졸업한 문예반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그 시를 보여줬더니 저더러 시를 써도 좋겠다고 하더군요. 제 기억으로는 그 전과 그 이후가 이 시 한 편으로 많이 달라졌어요. 그 뒤로 학교 공부에 대한 미련은 접고 시에만 매달렸습니다. 지금도 고등학교 때 타자기를 빌려 타이핑하고 푸른색으로 표지를 제본한, 4~50편의 시를 묶은 저만의 시집이 있어요. 시집 제목은 『낮아지기 위해서』입니다.      

테두리에서 빛이 나는 사람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
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 사람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슬퍼하는 상처가 있어야
위로의 노래도 사람에게로 내려올
통로를 알겠지

- 박형준 시인의 ‘테두리’ 중에서.

Q. 이번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은 시 ‘테두리’의 한 구절을 따온 제목으로 보이는데요. 어떤 과정을 거쳐 선정되었나요? 선정 계기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집 제목은 우연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고, 결국은 운이지 않나 싶습니다. 꼭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시집 원고를 정리하고 처음에는 ‘강물과 서성거림 사이’로 제목을 삼으려 했습니다. 이번이 7년만에 내는 시집인데, 대부분 시적 영감을 강변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니 저는 물과 인연이 깊은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살던 집은 동네 사람들이 ‘옴팍집’이라고 불렀어요. 저는 팔남매 중 막내인데 어렸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저를 ‘옴팍집 막둥이’라고 불렀지요. 오두막집 또는 옴푹 패인 곳에 있는 집이어서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초가집 단칸방이었는데 거기서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팔남매 이렇게 살았습니다. 거기 옴팍집 옆으로 개울이 있었는데, 산(정토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우리집 개울가로 흘렀지요. 그 맑은 물소리가 잊히지 않아요. 

도시로 올라와서도 사는 곳마다 물이 있었지요. 비가 오면 하수구로 바닷물이 역류하는 인천의 수문통, 그리고 서울살이에서도 가는 곳마다 물이 있었어요. 이번 시집은 이사하면서 만난 두 곳 불광천과 중랑천을 끼고 있는 한강변을 자전거를 타거나 거닐면서 떠올랐던 생각들을 적은 것이에요. 그래서 ‘강물과 서성거림 사이’라고 지으려 했던 거지요. 최종적으론 편집자분이 추천해주신 제목과 제가 망설이다가 내민 것 중에서 결국 저의 의견대로 시집 제목이 정해졌습니다. 

‘테두리’는 상식적으로 봐도 틀이고 벗어날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런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 테두리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하며 삽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테두리, 한계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얼룩무늬나 제가 시집에서 말한 줄무늬를 가지고 있는 기린에게 그 무늬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그 숙명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슬픔에 대해 사유케하였지요.

Q. 각 목차는 달나라, 패턴, 은하수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각각의 의미와 목차 구성 기준에 대해 알려주세요.

1부의 ‘달나라’와 3부의 ‘은하수’는 이상과 고향을 염두에 두었고, 2부의 ‘패턴’과 4부의 ‘테두리’는 현실 세계의 한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슬픔에 대한 사유 정도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간은 부구성을 ‘꿈/현실’의 구조로 어긋나게 구성했지만 정밀한 것은 아니니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진 않네요.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사진 = 김보관 기자]

Q. 제목의 ‘기린’ 외에도 두루미, 토끼, 고양이, 오리 등의 동물들을 다룬 시가 돋보입니다. 더불어 백일홍이나 튤립과 같은 식물이나 매미 등의 작은 곤충, 냇가와 호수 등 유독 자연물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띄는데요. 관련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강변 산책에서 만난 것들과 거기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적다 보니 작은 동물들과 곤충, 식물이 주로 시의 소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좀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주로 해질녘이나 한밤중에 강변을 거닐며 그리스 철학자의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나 도연명의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같은 말을 떠올려봤어요. 

삶이란 뿌리 없이 떠도는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 삶에는 변치 않는 순간이 있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는 게 꿈이나 이상이라 해도, 그 빛깔만은 우리의 삶에 바래지 않고 순간적으로 떠오를 때가 있어요. 그런 순간을 강변에서 만난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발견한 거지요. 어쩌면 해질녘이나 한밤중에 갑자기 산책길에 나타난 작은 짐승이나 식물이 내게 그런 순간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인지 몰라요. 저는 사물과 ‘남’에게서 저와 겹쳐지는 그런 공통지대를 발견하거나 깨닫게 될 때 슬픔을 느낍니다. 슬픔이 없으면 사물이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Q. 시집 해설에서 박연준 시인은 선생님을 ‘잠자는 숲속의 짐승’으로 비유했습니다. 이어 ‘잠’이 즐겨 등장하는 시편들을 언급했는데요. 선생님에게 ‘잠’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세심하게 발문을 써준 박연준 시인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제 시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의 시에 대해 애정을 갖고 보아주었어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도 있었겠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잠이 많았습니다. 저는 멍할 때가 많아요. 깨어 있을 때 정신이 맑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잠에 집착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잠도 깨었다 들었다 그런 편이라 숙면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저는 잠은 때때로 상상력의 네트워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곳, 어떤 엉뚱한 것도 사실이 되는 곳. 어린 시절 밤하늘과 잠은 공통된 영역이 있어요. 도시는 밤하늘을 잊었지만, 고향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는 밤하늘이 상상력의 무대였지요. 아마도 잠은 그 잃어버린 밤하늘의 꿈을 다시금 펼쳐내고 싶은 사람의 작은 무대가 아닐까 싶네요.

Q. 또 하나의 특징으로 예민한 감성과 섬세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주로 어떤 것들에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시인으로서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시를 열심히 쓰려고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제가 예민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특히 세상에 대해서 나름의 뚜렷한 주관이 부족합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혼자 노는 걸 좋아했어요. 방과 후에는 산이나 들판을 혼자 걸어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런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제 주변에서 만나거나 주변의 것들에 대해 저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시가 섬세해진 면이 있겠지요. 제가 지금 관심을 두는 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남’이나 ‘사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본연의 생각입니다. 평범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서부터가 아니라 남에게서부터 그리고 사물에게서부터 생각하는 것. 그런 평범이 시에서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지 그저 어렴풋하게 그려보고 있습니다. 비유란 대개 나에게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에 비유가 없는 시, ‘나는 남(타자)이다’라는 말에 대해 그냥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박형준 시인 [사진 = 이민우 기자]

Q. 긴 시간 창작을 이어오신 선생님의 문학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께 ‘시’와 ‘문학’이란 무엇인가요?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가짐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시가 좀 안 되어도 좋으니 신비에 대해 믿음, 그걸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사유가 예민해졌으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천으로 전학을 와서 처음 살았던 곳이 산동네였어요. 친구도 없고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동굴처럼 캄캄한 방에서 형과 누나와 자취를 했지요. 

6학년 때인가, 혼자 낮에 불을 켜지 않고 캄캄한 방에 앉아 있는데 시계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갑자기 저 시계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불을 켜고 시계를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계 초침과 분침 같은 것보다 저는 시계 태엽이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시곗바늘이 돌아가게 하는 그 얇은 강철 띠, 부드럽고 연약하나 분명 강철이기도 한 그 태엽에 대해 지금도 생각합니다. 

제게 문학관이 있다면 여리고 부드럽지만 강철인 언어, 그런 변치 않는 삶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시계를 재조립하지 못하고 망가뜨린 것처럼 아마도 제가 쓰는 시 역시 그런 부서진 시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앞으로도 시에서 뭔가 본연적인 것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가짐만은 변치 않기를 고대합니다.

Q. 어느덧 성큼 다가오는 가을, 단 한 편의 시를 추천한다면?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도 괜찮고 그 외의 작품이나 타 시인의 작품도 괜찮습니다. 자유롭게 말씀해주세요.)

가을이 되면 특히 추석과 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박용래 시인과 박정만 시인의 시가 떠올라요. 특히 박용래 시인의 「꽃물」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잘 담겨 있어요. 귀향열차 뒤칸에서 바라보는 노을을 고향 집 뜨락에 피었을 붉은 ‘맨드라미 꽃물’이라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아득한 그리움과 슬픔이 너무나 간절하게 와닿습니다. 간명한 이 짧은 시에 그리움을 안고 고향으로 가는 도시에서 떠돌이로 사는 사람의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요.

Q. 이외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편히 남겨주세요.

<뉴스페이퍼> 독자 여러분 모두 추석 건강하게, 풍성하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가 강조되고 있지만 추석 명절에는 마음만은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거리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신 <뉴스페이퍼>와 문학을 사랑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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