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비평포럼 남성서사에 관한 비평적 성찰 다루는 “남류소설가 – 남성서사 되묻기” 진행! 
요즘비평포럼 남성서사에 관한 비평적 성찰 다루는 “남류소설가 – 남성서사 되묻기” 진행! 
  • 송진아 기자
  • 승인 2020.10.1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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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여류 작가’ 내지는 ‘여류 소설가’와 같은 표현이 공공연히 사용되던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여성 소설가’를 타자화하던 종전의 관행을 비판하며 지금 이곳의 ‘남류소설가’와 ‘남성서사’에 관한 고찰을 주고받는 자리가 마련됐다.

“남류소설가 – 남성서사 되묻기”라는 제목과 함께 시작한 요즘비평포럼 시즌2 2차포럼은 네 명의 평론가가 돌아가며 발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발표에 앞서 사회를 맡은 조대한 평론가는 “그간의 관습에 대한 단순한 풍자를 넘어서서 현시대의 남성서사의 양상과 한계를 조명하고자 한다.”는 말로 이번 포럼의 의의를 짚었다.

첫 순서인 이소 평론가는 ‘죄의식의 남성성, 해원의 여성성’이라는 제목으로 임철우 작가의 소설 속에 나타난 여성성이 지닌 한계를 이야기했다. 이소 평론가는 임철우 작가의 소설에 대해 “사선과 문학을 둘러싼 윤리와 미학과 정치의 분투를 담은 아카이브로 손색이 없다.”고 칭하면서 동시에 “남성 주체가 타자의 고통을 재현하기 위해 어떻게 여성성을 하나의 기능으로 타자화하는지”를 논의의 방향으로 잡았다.

그중 임철우 작가의 “이별하는 골짜기”의 경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순례 할머니와 이를 지켜보는 젊은 역무원 동수가 등장한다. 그리고 관찰자인 동수에게만 ‘화사하고 천진한 소녀 순례’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사진 출처 = 문학과지성사]
[사진 출처 = 문학과지성사]

이소 평론가는 『이별하는 골짜기』에서 등장하는 소녀 순례의 존재는 “확신과 위안을 선사하며 사건을 종결하기 위해 출현한 동화적·신화적 존재”라고 명명하며 역사적 외상을 겪은 피해자들에게 신적인 것의 자리를 주는 ‘해원의 서사’에 관해 재고찰을 시도했다.

그는 “역사적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모인 ‘연극무대’와 같은 공간에 주인공 동수처럼 특별한 감수성의 소유자, 즉 ‘죄의식의 남성 주체’가 등장”하는 임철우 작가의 몇몇 소설을 소개하며 “역사를 조망하고 사유하는 자가 남성인 데 반해, 여성성의 영역은 역사의 외부나 초월로서 요청되거나 혹은 역사의 희생양으로 정형화된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돌담에 속삭이는』에 등장한 제주 삼신할머니인 ‘폭낭 할망’을 언급하며 일련의 남성 서사에서 “여성은 신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개별적인 얼굴을 지닌 인간은 되지 못한다.”는 점을 직시했다. 더불어 『황천기담』의 「월녀」에서는 ‘젖을 먹여 남성을 구원하는 여성상’이 등장함을 꼬집고 “임철우 세계에서 신적인 것은 철저히 여성의 ‘성적인 육체’에 기반하여 구성된다.”고 분석했다.

분석된 임철우 작가의 작품에서 여성은 예민한 남성 주체와 달리 철저히 타자화되어 역사의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 이소 평론가는 “육체로 환원된 여성의 반대항으로 그 육체성을 사유하는 남성만이 주체화된다.”고 비판하며 “사건의 고통을 목격한 죄의식의 남성 주체가 얼마나 절실히 그것의 재현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성별화된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사건을 의미화했는지 보여준다.”는 해석을 덧붙였다.

이은지 평론가 [사진 = 뉴스페이퍼 DB]
이은지 평론가 [사진 = 뉴스페이퍼 DB]

앞서 이소 평론가가 남성 소설가의 서사 속에 등장한 여성의 타자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며 이어 이은지 평론가는 남성서사 속의 하위 주체 남성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에 따르면 남성서사와 남성인물 사이에는 지배-피지배의 종속적 위계관계가 작동한다.

이은지 평론가가 예시로 삼은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성석제의 『투명인간』에는 모두 지배남성이 되지 못하는 피지배 남성이 등장한다. 피지배자 남성은 “지배질서에 순순히 동일시하여 서사를 진행”하는 것 같지만, 실상 “표상을 부분적으로 재현하는 흉내내기에 그치며 지배질서에 자기파괴적인 타격”을 입힌다.

[사진 출처 = 문학동네]
[사진 출처 = 문학동네]

하지만 이은지 평론가는 세 편의 소설 속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상황이 “지배남성-지배질서 내에서 남성이 저항할 가능성이 얼마나 낮은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하위 주체 남성 또는 피지배 남성의 저항은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동시에 자신을 소진하며 저항의 타격감을 무효화”한다. 그렇기에 지배질서에 타격을 가하는 하위 주체 남성 서사의 미덕 역시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은지 평론가는 “지배질서에 대해 파괴적 저항력을 발휘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도 않는 남성성에 대한 모색”이 도모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그는 “그간 반복되어온 피지배남성 서사에서 벗어나 “개별 남성 주체가 보다 생산적으로 지배질서에 저항하고 그 변화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모색하는 문학적 기획”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요섭 평론가 [사진 = 뉴스페이퍼 DB]

김요섭 평론가 역시 “‘마이너리티-남성’에서 ‘남성-마이너리티’로 전도된 피해 서사”에 집중했다. 마이너리티-남성이 남성집단 내의 약자를 의미한다면 남성-마이너리티는 ‘남성이라는 약자’를 떠올리는 상상을 의미한다.

그는 “남성 마이너리티 집단은 ‘무고한 남성’ 서사라는 ‘마스터 플롯’을 가진다.”며 “남성-마이너리티로의 수렴도, 남성-마이너리티에 대한 거부도 아닌 징후”로서 이기호 소설가의 「위계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해당 대목에서 이기호의 소설은 마이너리티-남성 서사를 주조하던 이들이 현재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인용되었다.

「위계란 무엇인가?」에는 광주의 문창과 교수인 ‘이’와 그의 연구실에 찾아오는 문창과 학생 ‘박재연’이 등장한다. 둘 사이의 관계를 묻는 채연의 질문에 이 교수는 ‘우정’이라고 대답하며 ‘손을 잡고 싶었던 충동’ 또한 ‘우정의 표현’으로 합리화한다.

김요섭 평론가에 따르면 “둘 사이는 언제든 위계에 의한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채연과 학교 선배의 다툼에 그가 우발적으로 개입하면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학과 게시판에 올라온 게시글에서 이 교수의 지위가 가진 위력은 채연이 아닌 학교 선배를 향했다고 지목되면서 이 교수는 ‘채연’이라는 인물에 휘말린 수동적 관찰자의 자리로 물러서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또 하나의 인물인 ‘최 교수’는 이 교수와는 달리 특정한 사안을 바라볼 때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를 포착한다. 둘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개인화와 구조화의 대척점에 선 두 남성 해석자와 해석자의 위치에 설 수 없게 배제된 한 여성의 서사가 혼재되며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느끼며 이것이 해당 작품을 문제적인 작품으로 읽히게 한다는 게 김요섭 평론가의 해석이다. 

더욱이 소설 속 최 교수의 해석도, 채연의 알 수 없는 질문도 이 교수가 갖고 있던 자기 해석을 바꾸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소설의 결말에서 이 교수는 폭력 예방 교육의 강사로부터 ‘위계에 의한 폭력’이 ‘지위나 계층을 나타내는 등급’을 뜻하는 ‘위계(位階)’가 아닌 ‘속임수나 상대방에게 오인, 착란을 일으켜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는’ ‘위계(僞計)’의 의미임을 전해 듣는다. 김요섭 평론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위계(位階)는 위계(僞計)로 전환”되며 “채연과 이 교수의 차이의 구조적 격차는 소거되고 둘 사이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 환원된다.”는 말로 문제적 지점을 시사했다.

김요섭 평론가는 “작품 속 고뇌하는 해석 주체가 끝내 ‘위계’에 대해 오해하는 행위로 자신의 윤리적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을 이야기하며 “이 진정성의 주체는 불가해한 타자로서=의 채연에 대해 반복적으로 고민함으로써, 그리고 그 고뇌가 결코 앎의 순간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만 자신의 윤리적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첨언했다. 그는 이어 “개인 주체로는 윤리의 실천이 불가능하며 남는 것은 윤리적 포즈를 향유하기 위해 사진의 무지를 지키는 수동적 주체”라는 설명으로 마이너리티-남성 서사와 남성-마이너리티 서사 사이의 접점을 이야기했다.

[출처 = 노태훈 평론가의 '7:3']
[출처 = 노태훈 평론가의 '7:3']

마지막 순서를 맡은 노태훈 평론가는 통계를 통해 남성작가의 위치를 되돌아봤다. 최근 2010년대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일각에서 “여성작가들이 득세해 남성작가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거나 “퀴어-페미니즘 서사 속에 다른 이야기는 어렵”다는 ‘인상비평’이 아닌 문예지 지면 분배를 통해 구체적으로서 상황을 알아보자는 취지에서다. 

그의 자료는 2019년 한해 발간된 (순)문학 문예지와 주요 단행본을 기준으로 조사되었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등 총 17개 문예지에 한해 발표된 단편소설은 총 316편으로 이중 남성작가의 작품은 92편이다. 약 29%의 지면이 배분된 것이다. 노태훈 평론가는 “여성작가의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양상은 아니”라며 “오히려 2019년의 신춘문예 등단작가의 경우 거의 절반으로 양분되어 남성작가의 진출 및 활동이 위축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전했다.

2019년 주요 소설 단행본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총 92권의 단행본 중 남성작가의 비중은 약 34%이다. 노태훈 평론가는 “각 문예지 수록 작가와 작품 수를 살펴보았을 때도 유의미한 편향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발표했다.

[출처 = 노태훈 평론가의 '7:3']
[출처 = 노태훈 평론가의 '7:3']

노태훈 평론가는 2019년 발표된 남성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며 “꽤 많은 작품이 페미니즘, 미투 운동을 언급”했으나 “대체로 여성 인물에게서 기인한 남성 인물의 곤혹스러움을 재현하는 형태였다는 점”을 포착했다.

그는 앞서 등장한 「위계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언급하며 “채연에게 부여된 퀴어성이 소재적으로 활용되는 데에 그친”다고 우려하는 동시에 김경욱의 「하늘의 융단」에서 보이는 비슷한 양상을 경계했다.

노태훈 평론가는 다른 예시들을 몇 가지 더 제시하면서 “젠더이슈를 다루는 남성작가들은 소설이라는 장르, 소설가라는 인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슈를 교묘히 끼워 넣는다. 일종의 변명과 같다.”고 덧붙였다. ‘소설이니까 나는 아니지.’와 ‘하지만 젠더이슈에 대해 고민은 하고 있어.’의 사이에 놓여있다는 관점이다.

그는 끝으로 “우리가 여성 서사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남성작가들은 여전히 자기 지분을 충실하게 확보하고 있다. 우려할만한 수준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그보다는 문제적 지점을 더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노태훈 평론가는 더불어 최근 김봉곤 사태와 함께 대두된 ‘재현의 윤리’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며 “남성작가에 의해 여성 인물이 재현될 때 고통이나 상처가 드러나는 방식이 늘 남성으로부터의 폭력”임과 “남성 폭력으로부터 여성이 고통을 헤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라는 점을 꼬집었다. 나아가 “‘무엇을 재현하는가’에서 ‘무엇을 재현하지 않는가’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성찰과 고민의 필요성을 주지했다.

 

“저에게 한국문학계이 성별은 남성입니다. ‘문학’을 떠올리면 특정한 성별이 떠오르지 않거나, 각각의 작가와 개별 작품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문단’을 의인화해보면 저에게 그 성별은 분명 남성입니다.” (윤이형, 「나는 여성 작가입니다」, 『참고문헌없음』 중에서.)

노태훈 평론가가 인용한 윤이형 작가의 발언처럼 그간 ‘남류소설가’와 ‘남성서사’에 관한 개별적 고찰과 분석은 그리 많지 않은 데에는 ‘남성작가’가 디폴트 값과 같이 여겨져 온 문화가 자리해있을지 모른다. 매회 한국문학계 내 유의미한 주제들을 논의하는 요즘비평포럼의 이번 주제는 그간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영역에 대한 반성과 재탐색의 시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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