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예비평] 동인문학상 적절성 논란 속 들여다보는 ‘야비한 자연주의 - 김동인론’ (2)
[한국의 문예비평] 동인문학상 적절성 논란 속 들여다보는 ‘야비한 자연주의 - 김동인론’ (2)
  • 늘샘 김상천 시인, 대중문예비평가
  • 승인 2020.10.2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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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 [한국의 문예비평] 동인문학상 적절성 논란 속 들여다보는 ‘야비한 자연주의 - 김동인론’ (1) 은 이곳(클릭)을 통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3. 그는 과연 전범이 될 만한 ‘모범적’ 작가였나

자, 나는 앞에서 김동인의 실체에 대해, 즉 그가 비록 자칭, 타칭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라는 고평을 받아왔다손 치더라도 이것은 사실 형식에 대한 일부 ‘인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지,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땅뜀(감히 생각조차 못하다)을 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정치적 패배주의의 문학적 반영인 자연주의의 일본적 그것으로서의 사소설적 형식이 다시 김동인에게 이식되어 일종의 색정소설a sugestive novel이나 다름없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니, 이것을 두고 근대의 이른바 ‘코기토’로서의 의식을 반영한 건강한 주체적 결과물로 볼 수 없음을 라이벌 염상섭과 비교하먼서 좀 두텁게 기술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가 김동인은 그 소행이 매우 불미不美한 자였음을 논술하였다. 

그러나 소설가 김동인은 매우 불미한 자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추한’ 자였음을 나는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 여기 하나의 전제로서 어떤 이의, 그것도 지도자급 문인의 행위가 매우 추한 것이었다면, 더욱이 사정이 그러한데도 그를 기리는 상을 주고받는 관습적 행위가 아무런 자각 없이 지속되고 있다면 이를 방조, 묵인하는 한국의 문사들에게도 용납될 수 없는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이를 두고 후배문인들이 결코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것이라고 옹호할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어떤 행위가 아름다우냐 추하냐의 문제는 미학적으로 볼 때, 심미적 판단의 문제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심미적aesthetic'이라 함은 예술적 행위의 미추를 가늠해 보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심미적 판단을 하나의 철학적 인식의 주제로 심도 있게 논의한 자로 칸트Kant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저 중의 하나인 <판단력비판>에서, 건전한 지성으로서의 ‘논리적 공통감’-가령, 인문학이 빈사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인문학은 삶의 뿌리다. 따라서 인문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했을 때, ‘인문학은 삶의 뿌리다’가 바로 그런 것에 해당한다-과 함께 심미적 판단으로서의 주관적 취미에 해당하는 ‘미감적 공통감’을 들고 있는데, 여기서 미감적 ‘공통감common sense’이란 감정에 의해서, 그러먼서도 보편타당하게, 무엇이 적의relevance하고 무엇이 부적의 한가를 규정하는 미적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자, 이것은 김동인의 도덕적 행위의 적절성을 평가하는데 있어 더 없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공통감은 무엇보다 보편적으로 적의適宜-무엇을 하기에 알맞고 마땅하다-한 것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모성애’라고 하거니와, 이것이 아름다운 것은 보편적인 적의의 기준에 합치되기 때문이거니와, 그것이 숭고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미적 공통감은 어디서 오는가. 가령, 우리는 저 밀레의 ‘만종晩鐘’을 보면서 하나의 공통감으로서의 미적 적의를 느끼듯이, 그것은 민중의 삶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민중적 삶의 이상이 미적 공통감의 보편적 기준이 되는 경우를 보자.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춘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백석, ‘팔원-서행시초3’

일제 강점기, 백석(1912-1996)은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감각적인 시를 쓴 시인으로 평가 되고 있다. 이 시는 과연 슬프지만 아름다운 색조를 자아내고 있다. 차디찬 아침, 승합차 속의 텅 빈 공간, 진한 초록색 저고리를 입고 차 속으로 들어오는 소녀, 그 소녀의 고단한 삶을 연상케 하는 밭고랑처럼 터진 손잔등의 이미지와 흐느끼는 울음소리, 그리고 그 소녀의 처연한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또 한 사람의 모습, 더욱이 어린 소녀가 찾아가야 할 먼 묘향산의 삼촌 집, 그곳에서 또 더 먼 곳으로 떠나가야 할 소녀의 기약 없는 행로 등 이렇게 이 시는 다양한 시적 오브제들이 날줄과 씨줄로 이어지고 얽어지면서 시적 지배소를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수놓고 있다. 

이 시는 조사의 감각적 구사에서도 그만의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 우선, 조사 ‘가’를 통해 어린 소녀를 거리감 있게 소개하는 솜씨가 놀랍다. ‘는’은 또 어떤가. 여기서 ‘는’은 광학 렌즈로 어린 소녀를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절대격 ‘이’로써 소녀를 ‘쌔하얗게 얼은 유리창 밖’의 차가운 현실과 대비시키며 쉽게 슬픔에 떨어지지 않게 조율하고 있다. 그러면서 ‘도’를 통해 어린 소녀의 울음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키고 보편적 감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렇게 그는 아름답고 격조 있는 감각적인 언어로 일제 하 한 가족공동체의 해체에 따른 민족(‘어린 계집아이’)의 수난과 고통의 어떠함을 생동한 화폭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함으로써, ‘극적 제시’리는 시적 형식에 일대 존재감을 부여하였다. 

자, 이번에는 민중(또는 민족)의 삶에 기반한 이상적 규범norm을 논리적 공통감에 의해 국가이성의 힘으로 성문화시킨 경우를 보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1조(목적)
이 법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 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위하여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11. 학병, 지원병,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이것은 특별법 정의 조항의 20개 항목 중 일부이거니와, 여기서 중요한 정의의 핵심적인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적극성’ 또는 ‘주도성’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어떤 일을 처리하고 활동하는데 있어서 다른 이보다 바짝 덤벼들어 했다는 것이요, 단순한 협력을 넘어 주장이 되어 이끌거나 지도했다는 것을 말한다. 자, 그렇다면 김동인이 과연 그러했는지 함 살펴보자.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고 따지기 전에 사실은 이 문제는 이미 역사적인 면에서나 법적인 면에서 이미 판결이 난 문제라는 사실을 염두 해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이미 임종국의 <친일문학론>(1966)와 <친일인명사전>(2009)이라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문건을 통해 낱낱이 그 죄상이 적시되었거니와, 이에 대해 ‘그의 내심은 글의 내용과 달랐고, 당시의 시대상황 탓에 그와 같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김동인의 아들 김00이 원고가 된 1심(2010. 11. 26)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김동인의 행위를 제11호의 내용과 관련하여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이 인정된다며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처분이 위법하다며 항소한 2심(2011. 10. 27)에서도 이미 패소한 바 있다. 나는 이에 더해 제13호의 내용이 김동인의 죄질의 추함을 평가하는 더 중요한 핵심이 된다고 본다. 우선 당시 서울고등법원 제7행정부에서 난 판결(재판장 판사 곽종훈)의 취지부터 보자.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이를 평가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이미 지나간 어떤 행위의 구체적 동기나 그를 둘러싼 사실관계를 정확히 규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볼 때, 한 시대를 살았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지도자들이 수행하였던 역할은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 앞에서 그 공과가 분명해지고 그로 인한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민족이 위기에 처하여 그 존망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있을 때에는 그 지도자들의 책임은 커질 수밖에 없고 그가 가진 비전과 처신에 따라 민족공동체의 운명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민족공동체의 입장에서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시대 역사적 주역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결코 자신은 아무런 흠이 없는 떳떳한 입장에서 남을 정죄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요, 함께 반성하며 후손들 앞에 국가의 대계를 세우고 내일의 비전을 바르게 세우자는 것이요, 오직 역사의 거울 앞에 우리 민족공동체의 부끄러운 모습을 바로잡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한 개인에 대하여 단지 책임주의의 입장에서 기대가능성이나 비난가능성을 따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의 눈으로 반민족 행태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어떻게 귀결시킬 것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고, 그 결과를 내일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 여기서 우리는 과연 법이 국가 이성의 작용으로 건전한 지성으로서의 논리적 공통감(‘역사의 거울 앞에 우리 민족공동체의 부끄러운 모습을 바로잡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이 지닌 무게를 실감하게 되거니와,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대체 김동인의, 특히 문화인으로서 반민족 행위의 적극적 주도성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러니까 역사의 거울 앞에 놓고 볼 때에 있어서 우리 민족공동체에게 부끄러운 모습이 무엇이었던지 그의 작품을 보먼서 이것이 과연 용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 미적 공통감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로 지적되고 있는 그의 친일반민족행위의 적극적 주도성은 다음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김동인은 1948년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시점에서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이라 할 <문단 30년의 자취>를 통해 자신의 친일행위를 애써 변명하고 있다.

“......
그 때는 나는 중국 본토는 아직 가보지도 못한 좁다란 인생이라, 중국땅은 춥게만 생각되어서 신문지가 보도하는 바 몇 십만 명, 몇 백만 명의 죄 없는 백성의 유랑이 끝없이 가긍하였다. 동시에 일변으로 겁나는 것은 총독부 정치의 나날이 강화되는 일이었다.
그 강화에 질겁을 하여 이 땅 각 계급, 각 사회는 소위 皇軍慰問, 소위 전쟁협력, 소위 保國行動 등 명칭으로 각각 무슨 일이든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꿈쩍 않고 가만있는 사회가 하나 있다. 즉 문단이라는 사회만은 천하의 대변도 모르는 듯이 각각 제 일만 하고 있다. 
당국은 보고도 모른 체하고 버려둔다. 이것이 정령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너 두고 보자 벼르는 것이다. 문단에 탄압이나 간섭이 내리는 날에는 나 김동인이는 제일차로 꿰어 올릴 것이다.
李光洙는 同友會 사건으로 벌써 감옥에 들어가 있고 만약 문단에서 희생자를 구한다면 내가 제일차로 될 것이다. 병으로 날카롭게 된 신경에는 이것이 여간 큰 협위가 아니었다. 
이몸으로 감옥에 들어가면 당장 죽는다. 일본의 문사들도 이러한 문제 때문에, 근자 漢口 위문이니 전쟁문학이니 자꾸 협력행위를 하지 않는가.
여섯 명의 가족을 거느린 주인이 감옥에 들어가면 그 가족 전부가 참변이다. 이런 협위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음력으로 섣달 그믐께 아픈 몸을 간신히 일으켜서, 그 길로 택시를 불러 타고 총독부로 사회교육과 장 某를 찾았다.

 -김동인 ‘황군위문’ 북지행 편 <문단30년의 자취>

자, 이런 종류의 자전 서사는 대개 지나간 시대의 년대기로서 자신의 변명을 죽 늘어놓기 일쑤거니와, 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머 막말로 개 같은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남 탓하기 책임 회피다. 둘째는 이런 시대에 일본 내지의 작가들도 개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 끌어다 쓴) 일반화의 오류가 아닌가. 셋째는 그가 과연 자신을 문단의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단이라는 사회’, ‘제일차로 꿰어 올릴 것이다’, ‘제일차로 될 것이다’. 이광수에 대한 의식 또한 여전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발적으로’ 개의 소굴 같은 총독부를 찾아갔다는 점이다. 이점은 제아무리 자기변호, 변명으로 가득 찬 글이라 하더라도 속일 수 없다. 

그는 이렇게 한편으로는 자기변명을 일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참작’을 호소하먼서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병들고 매우 가난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동인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 병이 들고 가난하게 된 것은 제 탓이지 시대의 탓이 아니거니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과도 다르다. 그러니까 그는 일제에 아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재력이 있었으나 본인의 방탕한 사생활 탓에 병들고 가난해졌던 것이지, 이후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했기에 모양새도 우습게 되었거니와, 그런 가운데서 이광수처럼 동우회에 끼지도 모하고 개처럼 살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후안무치한 변명은 매우 추할뿐 아니라, 이것은 순 엉터리 수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가볍게 볼 수 없는 (수양)동우회 사건은 무엇인지 보자. ‘수양동우회’는 1926년 1월경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다.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지식인 통제를 위한 일제의 모략에 의해 1937년 8월경부터 1938년 3월까지 181명의 동우회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도중에 사망한 안창호를 제외한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이광수가 징역 5년형을 선고받는 등 수명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상고심에서 다시 전원무죄로 종료되었던 사건이다. 4년 5개월 동안이나 진행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간회 해산(1931)과 카프 해체(1935)로 위기에 처하먼서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던 국내에서의 반일저항운동 관련자 대부분이 친일파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일제가 조선의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의 싹을 자르려고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은 저 스트롱 맨 시절 동백림, 인혁당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 간과할 수 없는 시대적 사건이었다. 중요한 것은 김동인이 이광수가 관련된 이 사건에 강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본인은 이런 민족의 공동이익과 관련된 그 어떤 행위와도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치 제일급의 민족지사 인양 시늉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독자를 속이는 방법으로, 매우 위선적인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그의 반민족친일부역행위가 과연 을마나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었는지 그의 사설, 평문 등(11차례) 산문에 드러난 지울 수 없는 몇 가지 행적을 보자. 

1, 국기란 것은 국가의 이상, 역사 혹은 國體와 □□하는 것으로서 국가가 제정한 □旗이다. 따라서 국기는 국가, 국민의 理想이요 정신이요 생명이 되는 者로서 온갖 경우에서 국가의 獨立不羈와 그 주권의 존재를 의미하는 者이다. 日章旗의 제정은 明治 초년이었다. 광명의 원천인 태양의 단순간결한 표시인 日章旗는 當年의 정치가의 敏腕에 발전하기보다 도리어 先進을 자랑하던 서양인의 우둔을 비웃어야 할 만치, 실로 국기로서 최우수한 者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중략) 국기란 것은, 멀리서라도 얼른 알아볼 수가 있고, 기억하기 쉽고 그리기 쉽고 그리고도 國體의 威儀를 넉넉히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서 日章旗는 가장 우수한 者이다.

-‘국기’, 1938. 2. 4, 매일신보

2, 우리 문단인이 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내선일체內鮮一體로 국민의식을 높여가게 된 것은 만주사변 이후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은 ‘만주국’이 탄생하고 만주국 성립의 감정이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부화되자 조선에선 ‘내선일체’의 부르짖음이 높이 울리고 내선일체의 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다시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이제는 ‘내선일체’도 문제거리가 안 되었다. 지금은 다만 ‘일본신민日本臣民’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이다. ‘내지內地’와 ‘조선’의 구별적 존재를 허락지 않는 한 민족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종족種族을 캐자면 다를지 모르나 일본인과 조선인은 지금은 합체合體된 단일민족이다.

-‘감격과 긴장’ 1942. 1. 13, 매일신보

3, ‘新日本圈’이라는 말과 ‘大東亞共榮圈’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인류의 심령적 양식인 佛, 儒의 산출자는 이 圈內의 인종이다. 지나간 날의 인류의 찬란한 문화를 생산한 자는 모두 이 권내의 인종이다. 그러나 우리의 祖先은 후손들을 위하여 그 지하자원은 곱다랗게 남겨 두었었다. 그랬는데 불행히 他圈內의 인종들이 이 권내로 침입하여 우리의 祖先이 후손들을 위하여 남겨두었던 것을 캐어가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이를 보전하기 위하여 敢然히 일어선 帝國은 寶刀를 높이들어 이 침입자를 쳐 물리는 聖戰을 시작하였다. 이 성전의 결과로 생겨날 대동아공영권─즉 新日本圈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옛말에서나 듣던 바와 같은 龍宮 같고 仙園 같은 찬란한 大地域일 것이다. 무진장의 수산물, 광산물, 식물의 위에 燦然한 일본의 문화를 加한 마치 태양과 같이 빛나고 무지개와 같이 찬란한 新日本圈의 문물은 지금 바야흐로 전개되려 한다. 이 빛나는 역할의 한몫을 맡은 우리의 자랑도 소리 높여 부르짖자.

-‘신일본국’, 1942. 3 <반도의 빛 제52호>

1은 대놓고 ‘일장기日章旗’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글이다. 2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선동하는 글이다. 3은 ‘신일본국新日本圈’의 도래를 찬양하는 글이다. 여기, 우리는 과연 김동인이 스스로 꼬리치는 권력의 개가 되었음을 본다. 이것은 마지못해 내뱉은 말이 아니다. 그는 최대한의 수사를 동원하여 저들을 칭송하는 것으로, 이는 저 플라톤의 <향연>-“칭찬의 대상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그것을 훌륭하게 칭찬하는 방법은 그 대상의 본모습은 상관하지 않고 가능한 한 무조건 그 대상에 가장 거창하고 훌륭한 찬사들을 덧붙이는 것처럼 보이네 그려! 더구나 그 찬사가 거짓일 경우에도 전혀 문제로 삼지 않으니 말일세.”-이래 종속적인 신분을 벗어나지 모하고 계속되어온 시종slave으로서의 예술의 종놈의 수사학이 아닌가.

잘 알다시피, 1938년 이후의 일제 치하의 시대상황을 보면(‘주문’ 참고 인용), 1937년. 7. 7.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41. 12. 7.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당시는 노동자를 징발하던 단계를 지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징발뿐 아니라 조선인의 파병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군대 내에 배속시켜 군대 운용을 할 목적으로 조선인이 더 이상 외지이나 식민지인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천황의 동일한 신민이라는 생각을 심어 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추진된 일련의 정책이 황민화정책과 동조동원론同祖同源論을 내세운 내선일체, 내세융화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제7대 조선총독이었던 육군대장 출신의 미나미 지로는 이런 정책을 가혹하게 수행하면서 황국신민서사(참고로 황국신민서사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리라.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함으로써 단결을 굳게 하리라. 3,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 단련의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리라.)를 제정하여 모든 집회에서 이를 암송하게 하는 등 황국 신민화 운동을 진행하였다. 또 일본어 상용을 의무화한 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말살정책을 폈으며, 개정조선민사령을 공포하여 창씨개명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에서 보았듯이일제하 지식인들의 통제를 위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을 조작하였고,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여기, 그 누구보다 주도적으로 발 벗고 나선 자가 바로 김동인이다. 그는 마치 서정주가 자발적으로 ‘마쓰이 오장 송가’를 써서 바치고, <이승만전>를 써서 갖다 바쳐 그의 시종이 되고, 시집 <신라초>를 써서 박정희에 바치고, 나아가 전두환의 개가 되었거니와, 김동인 또한 황군을 위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총독부를 찾아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북지행 위문단을 조직 실행하였고, 일제에 대한 도가 지나친 찬사를 갖다 바쳤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장편소설 <백마강>을 써서 반민족친일부역행위를 완성하였다. 

What matters,

중요한 것은 이게 마지못해 쓴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김동인, 그는 처음부터 일제와 손잡고 기획단계부터 그들과 철저하게 손발을 맞추고 밀의, 협약 하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통해 2년(1941.7.24~1942.1.30)에 걸쳐 장편소설을 연재함으로써 그의 자신의 친일부역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사변(日支事變-중일전쟁) 이후 국가가 문단을 향하여 시국소설을 요망할 때에 작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문학은 항상 정치적인 현실보다는 뒤떨어진다는 것, 생생한 현실이 시간이 0過되어 문학주체로서 무르익을 시기를 기다리련다는 것을 대답하였다. 그 답변이 일리가 있었다면 이제 사변이 일어난 지 어언 만 4년이 되려는 이때 작가들도 비로소 붓을 들어 모든 시국적인 제재를 본격적으로 시국소설을 쓸만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이런 사정에 託하여 본사에서는 다음에 싣는 장편소설을 시국소설로 택하기 위하여 이번 우리 문단의 중진인 金東仁 씨와 화백 000 씨를 부여에 특파하여 백제말기를 무대로 한 본격적인 시국소설에 착수케 하였다. 부여는 독자 제현이 숙지하다시피 금일 내선일체의 00요 지금부터 1천3백년 전 백제 융성 당시에 내선교류의 문화가 난만하게 꽃피었던 성지임에 파견된 양 씨는 지금 이 성지 부근의 각지를 역방하면서 제재와 사실 고증에 치밀한 조사를 하는 중이다.” 

-‘소설 <백마강> 연재 소개 기사, 1941. 6. 29. 매일신보

자, 이것은 과연 김동인이 민족의 생존과 정체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시기에 을마나 깊이 그들과 한패였는지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자료가 아닌가. 이에 대해 김동인은 무어라 답하였나 작가의 말(1941. 7. 8. 매일신보)을 보자.

“7백년의 길고긴 왕조를 누려 오다가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전멸된 ‘백제’-. 그 찬란한 문화는 바다를 건너 야마토[大和]에까지 미쳐서 야마토롤 하여금 오늘날의 대일본제국을 이룩하는 초석이 되었다. 오늘날 같은 천황의 아래서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마치를 두르는 반도인의 祖先의 한 갈래인 백제사람과 내지인의 祖先인 야마토 사람은 그 다음년-지금부터 1천3~4백년 전-에도 서로 가깝게 지내기를 같은 나라나 일반이었다.”

자,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예의 대표적인 친일소설 <백마강>이거니와,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소설 <백마강>의 내용(이하 ‘주문’ 참조, 인용)은 백제 말기 의자왕 대의 패역한 정치와 이를 근심하는 충신들의 고뇌를 둘러싼 이야기를 주로 하여, 백제 일본부의 일본인 소가와 백제의 종실복신의 딸 봉니수, 백제에 유학온 일본인 처녀 오리메의 사랑이야기와 삼국시대 말기의 백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연민,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와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일본의 원조 등의 내용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현대에 이르러 소설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를 내선일체나 황민화운동과 큰 연관을 짓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간 문학양식으로서, 독자들이 이를 허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허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동요를 배제하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문학의 속성이기도 하므로 당대의 독자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매일신보는 소설 <백마강>이 중·일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시국소설로 백제를 내선일체의 성지로 표현함으로써 소설의 연재의도를 분명히 하였고, 김동인 역시 이에 호응하여 반도인과 내지인이 대일본제국의 천황 아래에서 대동아건설을 해 나가기 전에도 백제와 일본이 한 나라 사람과 같았다고 하면서 소설의 집필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하여 <백마강>의 내용도 의자왕이 패역함을 보이고 정치를 게을리 하여 일본과의 교류가 소원해졌다가, 그후 일본의 사신과 일본에 갔던 풍왕자가 백제로 돌아올 무렵 의자왕이 정신을 차리고 옛모습을 회복하는 장면, 의자왕이 일본인 소가를 멀리하면서 다시 백제의 위기가 찾아오고 소가가 백제인에게 일본인의 충성심을 가르치겠다는 뜻을 설파하는 장면, 부여성이 나·당연합군에 포위되자 백제인들이 아닌 소가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의자왕과 태자를 구출하는 장면, 종실집기의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하여 종실복신과 일본원군이 배를 타고 등장하는 장면에서 일본원군이 당대의 위기를 극복할 영웅처럼 묘사된 점 등이 나타나고, 구체적 표현에 있어서 일본을 ‘야마도(大和)’로 지칭한 것은 일제가 황민화운동의 기치로 내세운 대화(大和)·대애(大愛)정신과 관련있다고 할 것이다.

자, 사실이 그러한지 소설의 한 장면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보자.

“......
당나라와 신라가 만약 몇만명 혹은 몇십만명의 대군을 가지고 이 나라를 치는 날에는, 비록 계백 장군 휘하의 병졸이 아무리 정병이라 할지라도 중과부적으로 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근심스러워서 소가는 제 아버님 대신께 상서해서, 만약 백제에 국난이 발발하는 날에는 정병을 응원군으로 보내도록 해 줍시사하여 아버님의 승낙을 얻어 두었다고 한다.
집기는 감격하였다. 외국 사람으로 더구나 이 나라 큰길지께 꾸중들어 측근을 모시지도 못하는 신분으로, 그래도 그냥 꾸준히 이 나라에 충성된 그 충의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나라의 임금께 불려서 잠깐이나마 이 나라 신하 노릇을 했다는 그 의무로서 그냥 꾸준히 이 나라의 충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김동인 장편소설, <백마강> 중에서

자, 이 부분은 집기를 통해 서술자의 생각을 드러낸 부분이다. 잘 알다시피, 근대소설은 대개 고백체의, 서술의, 말하기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근대의 소설이 부르주아 개인의 지배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사 여신이여!”로 시작되는 고대서사시와 달리 근대소설은 가장 대표적으로 <로빈슨 크루소>처럼 ‘나’로 시작되는 1인칭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설사 3인칭이라 하더라도 고대서사시처럼 전지적 시점이 아닌 한 사람의 초점 화자에 시점을 고정시키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여기, <백마강>에서도 작가는 서술자의 위치를 넘어 백제인 집기가 되어 왜인 소가가 백제를 도와 줄 것이라는 말에 감격해 하고 있다. 이것은 내선일체를 넘어 일제를 숭배하는 영혼 없는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자,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장면이거니와, 그리하여 저 청일전쟁당시 청병請兵을 자청한 조선정부의 고위관료와 그 멘탈리티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요, 저 외세의 힘을 빌려 무력으로 통일을 누리고자 했던 승만 리의 흉계와 무엇이 다르것는가. 그러니까 이와 같은 소설 고유의 성격과 <백마강>의 집필의도, 그 내용과 표현 등을 통해 당대의 독자들은 <백마강>을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닌 황민화와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한 글로 읽었음이 분명하고, 당시의 유일한 한글 일간지였던 <매일신보>에 이와 같은 소설을 6개월여의 기간 동안 연재한 사실 등등을 통해 볼 때, 김동인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반민족친일행위를 자행했다고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는 역사의 거울일 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게 부끄러운 행적으로 그대로 간과하고 묵과할 수 없는 추한 인간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자, 나는 이제까지 그는 과연 전범이 됨직한 ‘모범적인’ 작가였나를 좀 개괄적으로 검토하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매우 의미 있는 중간 결론에 이르렀거니와, 여기 한 작가의 업적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수여하기 위한 전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과연 타인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적인 행위를 했느냐 라는 객관적 사실의 문제였다. 

그러나, 작가 또한 공기만 마시고 살 수는 없는 현실적인 존재이니, 그러니까 그는 저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 작가는 그 무엇으로 거미줄을 치고 먹고 살며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머 하나의 운명처럼 그가 만일 화가라면 선과 색, 명암으로 명화를 낳아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고 모범이 되듯이, 그가 만일 작가라면 붓을 들고 명작을 낳아 생을 도모하고 모범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어떤 대상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예술적 충동을, 화의畵意를 느끼듯이, 꼭 그렇게 작가 또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참을 수 없는 예술적 충동을, 작의作意라고 부를 수 있을 구체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을 지닌 존재가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한 격한 감정의 발로이자 창조적 의지의 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예술행위 일반을 놓고 볼 때, 우리가 대체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기호는 항상 그 누군가를, 또는 그 무언가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무엇을 위한 도구적 예술(리얼리즘)이든, 아니먼 예술 그 자체를 위한 자율적 예술(모더니즘)이든 예술적 생산물도 결국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 그런데 작가가 생산한 예술품이 민족공동체가 지향하는 보편적 정치적 모럴과 배치된다면 어떨까...그러니까 여기서 ‘민족공동체가 지향하는 보편적 정치적 모럴’은 일제치하의 ‘해방과 독립의지’로 볼 수 있거니와, 이와 관련하여 김동인은 과연 어떤 자였는가. 그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의지보다는 일제를, 적들을 위해 예술활동을, 그것도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머 역사적으로 작가의 부역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부역附逆’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천인공노의 사실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김동인의 단편예술작품과는 다른 성격의 글을 보게 되는데,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 많던 재산을 기생과의 외입질과 사업 실패로 다 날리고 즉 삶이 파탄이 나고 생이 곤궁해지기 시작하먼서 마치 가난이 극도로 심각해지자 몸을 팔기 시작하는 ‘감자’의 복녀처럼, 꼭 그처럼 그 또한 그토록 아끼던 글(영혼)을 팔기 시작하는 역사의 김동인을 볼 수 있다. 예술에 대해 청교도 같은 결백을 지닌 그이지 않았는가. ‘배따라기’, ‘광염 소나타’, ‘감자’ 등 그동안 ‘예술성’을 지닌 단편 중심으로 그나마 상당한 수작을 건져 올린 그가 ‘운현궁의 봄’ 등 과거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가미한 ‘상업성’을 지닌 신문 연재 장편소설에 손을 대고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자. 머 <운현궁의 봄>은 그래도 휼륭하지 않은가. 그도 여섯 식구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장편을 쓰다 못해 <백마강> 등 본격적인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그나마 자존을 지키고 있던 ‘자아’ 정체성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우리는 복녀의 가난과 도덕적 타락을 복녀 개인에게만 책임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당시의 명망 있는 작가가 먹고 살기 위해 친일을 했다고 그에게만 책임을 씌울 수는 없다. 다시말해 폭력적 현실과 타락한 사회가 ‘복녀’의 운명을 망쳐놓았듯이, 꼭 그렇게 ‘김동인’ 또한 일제라는 폭력적 현실과 빌어먹을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회 현실이 그를 망쳐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자료를 보건대, 친일문학이 한국에서는 1940년을 중심으로 시작하였다(임종국, <친일문학론>). 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그 제국주의적 야심을 품고 만주사변(1931)을 일으키고 이른바 대동아전쟁(1941)을 일으키면서 전시체제로 몰아갔던 조선반도의 폭력적 현실이 근본적인 악의 발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운동의 구심체였던 신간회가 해체(1931)되고 계급문예운동의 상징이던 카프마저 와해(1934)되면서, 즉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민중의 삶을 진작시키려는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활동이 원천봉쇄되던 전후에 한국의 문단사에서 주목되고 있는 것은 ‘시문학(1931)’, ‘구인회(1933)’, ‘시원19350’, ‘시인부락(1936)’ 등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순수문학단체가 우후죽순처럼 한꺼번에 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과연 악은 일제였지 김동인이 아니었다. 

자,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가난을 핑계로 도덕적 타락을 일삼고 왕서방을 살인까지-무론 미수에 그치고 그가 오히려 죽고 말았지만-했던 복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시대를 핑계로 친일 행위를 일삼고 반역자-‘반역자’는 외배 이광수의 친일을 옹호하고 두둔한 단편소설이다. 그는 소설로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반민족처벌법 시행 당시 이광수를 적극 변호하였다-를 두둔했던 김동인을 묵인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소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작가와는 그 유가 다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그 어떤 일말의 작가적 자존심과 고민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조선의 천재 이광수가 현실적으로 ‘조선 민족은 일본의 굴레를 도저히 벗을 수 없다’고 독립무용론을 펼치며 ‘차라리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본에 협력하자’(‘반역자’)는 자조 섞인 모순적 친일 논리를 드러내고 있다먼, 김동인은 이와도 달랐다. 그만큼 그는 ‘철저한’ 친일작가였다. 과연 <백마강>은 어떠하였던가. <백마강>이외에도 ‘성엄의 길’, ‘총동원 태세로’, ‘일장기의 물결’, ‘반도 민중의 황민화’ 등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는 '깡디드한' 순악질 친일부역작가였다. 이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어떤 기생과 사괴게 되어 한번 쏠리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문단 30년의 자최’)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지 않은가.

히가시 후미히토(창씨개명으로 바꾼 김동인의 일본식 이름), 

그는 자발적으로 ‘북지황군위문단’을 자청해서 그 지도적 소임을 다 한 문인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당시 문단의 선배로서 ‘자발적으로' 친일활동을 한 정도가 매우 심대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이 하나의 삶의 수단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극적인 사례를 본다. 다시 말해 문학이 고대의 시인들처럼 정치적 시녀가 되어 그 무엇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기능하고 도덕이라는 가치를 상실하였을 때 볼 수 있는 잔인의 극을 보게 된다. 즉 우리는 결국 문학이 자신의 삶의 태도를 스스로 형성하고 결정하는 주체적인 삶의 방식이 되지 모하고 그 무엇인가를 위해 맹목적으로 기능할 때 어떤 참혹스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그에게서 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김동인, 그는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 아니었나. 다시 말해 그는 그 누가 뭐래도 삶의 태도를 스스로 형성하고 결정하는 주체적 삶의 방식의 주인공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이런 자가 외부의 힘에 쉽게 무너져 복녀처럼 타락하고 말았는가. 나는 여기서 그 본질적 의미에서의 근대적 자각이 철저하지 모하면 쉽게 무너지고 마는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지식인의 초상을 그에게서 본다. 

그러나 한국 근대의 소설 문학은 김동인 이외에도 이광수를 비롯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과 최서해, 한설야를 거치먼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거듭, 드디어 민촌 이기영-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기영을 발굴한 것은 조선일보 학예부장 시절의 김동인이었다-에 이르러 거대한 리얼리즘이라는 대하 수면을 이루먼서 조선 소설의 일대 장관을 이루었으니, 이런 소설적 성취는 무엇보다 조선의 모순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진실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기영의 <고향>, 이것은 과연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폭로하먼서 당대 조선인의 실상을 진실한 화폭으로 놀랄 만큼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나마 자연주의에서 색정문학으로 기울다 못해 아예 친일문학으로 타락한 김동인을 한국 문단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은 친일행위로 민족문학의 발전에 제일 해를 끼치고 민족공동체의 이익에 누를 끼친 그를, 더구나 해방 후에도 단 한마디의 사과나 반성도 없던 그를 기리는 상을 제정해 이 악업을 떨치지 모하고 계승하고 있다니... 이것은 참으로 오늘 살아있는 한국의 문인들에 대한 수치와 모욕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통념과 관행이라는 개가죽을 벗겨내지 모한 채 '비성숙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정신적 후진국의 세태가 아닐 수 없다. 즉 우리가 친일문인기념상이라는 수치와 모욕의 개가죽 하나 제대로 벗겨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성숙된 시민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명백한 반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4. 결어(또는 요약)

지난 1966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의 선구적 업적에 이어 오늘 임헌영 등 뜻있는 국민들이 힘을 모아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친일문인들의 행적을 낱낱이 찾아내 적시, 고발하기까지 우리는 그동안도 까맣게 몰랐다. 머 신화의 가면에 들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다만 영웅들이 부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것처럼, 꼭 그렇게 우리의 우러르는 문사들 또한 민족을 위해 붓을 들었던 영웅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미 밝혀진 바대로 그토록 똑똑했다는 이광수가 '우리는 영원히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친일의 불가피성을 논하며 민족을 배반하였고, 그토록 시를 잘 썼다는 ‘시인부락의 족장’ 서정주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학을 운운했다지만 사실은 순수를 가장하여 강자의 시종을 자임하고 민족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데 급급했던 친일시인이자 야비한 기회주의자였다먼 우리는 그 어떤 모럴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러나 이것도 김동인의 경우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히가시 후미히토, 그는 자발적으로 '북지황군위문단'을 자청하고 붓뚜껑을 열어 친일을 넘어 부일을 일삼은 노골적인 반민족소설가였다. 무론 사회의 공기이자 희망으로서 문인의 소명을 다하기 어려웠던 저 참혹했던 일제 말기, 그에게만 돌멩이를 던질 수는 없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친일을 넘어 부일을 일삼은 그를 두고 경배와 찬양을 바치는 것을 넘어 그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 운영해 오고 있다니... 

따지고 보먼 굴종은 이미 처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독립선언문'의 발표가 있던 바로 그날, 김동인은 한국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하였다. 여기, <창조>에 전재된 그의 최초의 소설 '약한 자의 슬픔'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몸을 망친 강한 자를 사랑해야 한다며, 강한 자에 대해 굴종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노예의식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운명에 무너진 자연주의적 태도와 색정에 기반한 탐미주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예속문학으로서의 굴종의 길, 그것은 이미 예고된 길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의 청년들이 적지에서 조선 독립의 기운을 북돋우던 그때, 즉 하나의 저항서사로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국내 3.1혁명의 불을 댕긴 저 근대의 민족서사가 발흥하고 있던 그때, 그는 골방에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복선언문이나 다름없는 비굴卑屈한 자신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정 욕구a desire for recognition’(헤겔, <정신현상학>, 한길사, 2005년)는 노예적인 그것이었지 주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예술에는 오락기능, 교훈기능과 더불어 마약과도 같은 마취기능이 또한 있으니 여기, 대중기만적인 영웅신화가 또한 그렇지 않은가. 지금 '민족'과 '독립'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국가이념의 초석으로 세운 지 100년이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친일부역행위가 너무도 명백한 반민족 작가를 민족의 신전에 모시고 향불을 피우고 있다. 이는 무고한 선열들을 욕보이고 한국의 양심적인 작가들을 모욕하는 일이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김동인이 타락한 것은 분명 그가 정신의 북극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한 자의 슬픔’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가 배워 이식한 자연주의는 가장 대표적으로 <마담 보바리>처럼, 본래 프랑스의 정치적 좌절의 경험이 말초신경적으로 형상화 되었던 것이고, 이것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로 치닫고 있던 일본의 정치적 좌절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일본의 근대문학에서 사소설 형식으로 나타나 지금도 무라카미 하루키(<노르웨이의 숲>)의 소설로 이어져 건강한 젊은이들을 상실감에 젖게 하고 있거니와 김동인은 당시 일본의 이런 문학 사조를 조선적 현실에 이식implant하고, 자신의 소설의 운명을 여기에 걸었던 것이니 그의 자연주의적 좌절과 타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김동인이 이광수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형식을 통해 보여줬던 과감한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은 문학사에 값진 유산으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형식에서의 성공과는 별도로 근대적인 이념을 작품으로 제시하는 데 정작 그는 실패했다. 그의 작품은 횡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빙허에게도 미치지 모하였다. 따라서 그를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라 하기에 주저치 않을 수 없다. 말하건대, 김동인은 근대 소설 ‘형식의’ 진정한 개척자다. 

또한 김동인은 그 어느 친일작가 못지않게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고 <백마강> 등 수많은 친일작품을 남긴 비열하기 짝이 없었던 '철저한thorough' 친일부역작가였다. 이런 그의 반민족적인 궤적을 두고 문학사의 전범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그는 외려 민족의 이름으로 벌을 받을 사람이지 결단코 기릴 작가가 아니다. 

이와 같이 김동인은 한국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도 아니었고, 전범이 될 만한 ‘모범적’ 작가는 더욱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 문학사 기술은 ‘일부’ 수정이 불가피하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의 존치 또한 해방과 독립을 바라는 한국인의 보편적 이성과 감정구조에 어긋나며, 이는 국기國基를 부정하고 인문人文을 저버리게 하는 매우 부적의한 반국가적 반사회적 행위이므로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관행은 폐지해야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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