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출판 “10톤 트럭 서너 대 분량 파쇄...” 도서정가제 속 판매도, 보관도 어려운 재고 도서 
소명출판 “10톤 트럭 서너 대 분량 파쇄...” 도서정가제 속 판매도, 보관도 어려운 재고 도서 
  • 김보관 기자
  • 승인 2020.10.24 00:22
  • 댓글 2
  • 조회수 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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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실시 이후 반품 도서나 재고 도서에 대한 15% 이상의 추가 할인 판매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출판사가 ‘파쇄’를 선택하고 있다. 반품 도서 또는 재고 도서를 창고에 보관하는 데에만 해도 물리적, 자본적 지출이 기약 없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소명출판의 박성모 대표는 자신의 SNS에 “오늘, 10톤 트럭 서너대 분량의 책을 파쇄하기로 결정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게재했다. 그는 이어 “저마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출판사들이 종종 겪어야 하는 일이 파쇄다. 그래도 장부 정리를 위한 최소한의 일은 해야 하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라고 말을 이었다. 

[사진 출처 = 소명출판]
[사진 출처 = 소명출판]

‘소명출판’은 인문·학술 분야의 책들을 주로 발행하는 곳으로 1998년 설립됐다. 그 이름처럼 ‘상업성’보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책을 엮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출판사는 “인문학의 지적 자산이 될 학술서 출판”을 향한 다짐으로 약 20여 년간 1,600종에 가까운 책을 펴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와 같이 일시적인 대량 판매와는 거리가 먼 학술도서의 특성상 출간도서가 오랫동안 창고에 머무는 일이 반복됐다. 뉴스페이퍼와의 통화에서 박성모 대표는 “사실 저희만 그런 것은 아니다. 출판사에서 재고, 반품 도서에 대한 공간을 무한정으로 확보하기가 어렵다.”며 “물류 대행하는 곳에 쌓인 책 외에도 사무실 한 층을 비워 책을 쌓아두고 있지만, 그 공간에는 계속해서 새 책이 온다.”는 사정을 전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오랜 기간 해당 도서를 보관하는 데 소요되는 공간과 비용이 적지 않아 차라리 ‘폐기’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현행 도서정가제 아래에서는 일정 기간이 넘기 전까지 할인 판매가 불가능해 달리 처리할 방도가 전무하다.

그러나 박성모 대표는 “특별히 안타까울 일이라기보다 현실적인 구조가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도서정가제의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일정 부분 추가로 논의되어야 할 지점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함께였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도서정가제가 대형 출판사, 대형 서점과는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을지언정 작은 출판사와 작은 서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는 함정이 있다고 본다.”며 “현행 도서정가제에는 디테일한 수정이 필요하다.”고 첨언했다.

본지와의 통화에서 팬덤북스 박세현 대표 또한 “우리 출판사도 매년 몇 톤 분량의 책을 파쇄한다. 올해 최대한 기증을 하고 내년 초쯤 파쇄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라는 상황을 전했다. 약 15,000부가량의 도서를 제작할 때 드는 비용은 수억에 해당하지만, 파쇄 후 받는 비용은 ‘36만원’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나아가 그는 “각계의 입장이 다른 만큼 도서정가제를 조율하는 데에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단순히 출판사가 늘었다거나 출판 종수가 늘었다는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며 “각 출판사가 실제로 어느 정도의 책을 출간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수익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단순한 수치나 데이터로 접근하기에는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박세현 대표는 과거 도서정가제 시행 이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당시에는 한 종에 5,000부에서 10,000부가 판매되었으나 현재는 2,000부도 쉽지 않다. 인문·교양·전공 서적의 경우 1,000부도 팔기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현재 18개월의 기한을 둔 ‘재정가 제도’를 12개월로 축소한다는 방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박세현 대표는 “18개월, 12개월이 지나면 이미 독자는 떠나간다. 반년도 안되어 출판 주기가 변하는 것이 현실이다.”라며 “해당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직시했다.

그에 따르면, 수많은 반품 도서와 재고 도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파쇄’밖에 남은 답안지가 없다. 판매도, 보관도 어려운 상황인 데다 모든 도서를 회수해 일일이 표지를 바꾸는 작업을 하는 데 지출되는 자원이 판매량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상상출판 유철상 대표도 마찬가지로 “재정가를 책정한다고 해도 큰 판매가치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렇기에 해당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속사정을 전달했다. 

소명출판 박성모 대표의 SNS 글 말미에 붙여진 “모르긴 해도 파쇄의 과정을 거치면 재생지로 거듭날 것이다. 우리의 수준은 꽤 높은지도 모르겠다. 멀쩡한 책을 파쇄해서 재활용(재생지)을 하는 경지이니까.”라는 문장은 담담하고도 따끔한 한마디다.

뉴스페이퍼의와 통화한 상상출판 유철상 대표에 의하면 10톤 트럭에는 약 1만 권의 도서가 실리며 이를 창고에 보관하는 데에는 매달 1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이 소요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발생하는 지출에 해당해 출판사의 부담을 가중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누군가에게 읽히길 기다리던 새 책이 ‘폐지’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독자의 손끝에 가닿기 전 차가운 칼날을 맞이하는 수천, 수만 권의 책들. 그리고 어느덧 한 달을 앞둔 도서정가제 재개정 논의. 출판 생태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보다 치밀하고 상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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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미 2020-10-25 09:41:54
좋은 기사.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추상적인 큰 이야기만 하지 말고 현실을 촘촘히 들여다 보자. 디테일은 악마인 동시에 솔루션이다.
#역시뉴스페이퍼

ㅇㅇ 2020-10-24 09:49:11
좋은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