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기획 05] 손보미 소설가 - “얼굴”
[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기획 05] 손보미 소설가 - “얼굴”
  • 손보미 소설가
  • 승인 2020.10.2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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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이미 여러 번 말한 적이 있어서 다시 이 문장을 꺼낸다는 것이 상당히 겸연쩍지만, 그러한 마음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더 말하건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창작의 정의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객관적 관찰자’라는 위치에서 내려와서 환자와 얼굴을 맞대고 공감적 상상력 속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 협력, 참여 관계맺기 속에서만 비로소 그들이 어떤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우리에게 파킨슨증 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를 말해주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보시다시피 이 문장은 소설이나 문학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기면성 뇌염 환자들을 다룬 올리버 색스의 『깨어남』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발췌한 것인데, 나는 저 구절을 너무 좋아해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할 때에는 언제나 인용한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나는 완전히 내 마음대로 저 문장을 소설을 쓸 때의 어떤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소설을 쓸 때 인물에 대해 굉장히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소설 속 인물들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 옷차림, 머리카락의 길이, 눈동자, 입술의 모양 같은 것들을 떠올리세요. 당신이 당신 소설 속 인물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당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그 얼굴을 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이런 말들은 어쩔 수 없는 약간의 포장이 포함되어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소설을 쓸 때 내 인물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막바지까지 이르러도 인물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무척 초조한 마음이 든다. 소설을 망쳤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나는 소설가이고, 내 소설이 언제나 ‘망쳐지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인물의 얼굴을 보려고 애를 쓴다. 올리버 색스는 환자의 이야기는 환자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는 내 소설 속 인물만이 할 수 있다. 그것을 들으려고 애쓰는 것, 그것이 내가 소설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처럼 느껴진다.

『깨어남』에 등장하는 기면성 뇌염은 1920년에 발병했다. 1918년 전 세계는 이미 스페인 독감으로 2,500~5,0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직후였는데 이년 후 발병한 기면성 뇌염은 전 세계적으로 5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2020년 코로나는 얼마나 많은 사망자를 냈을까? 궁금해서 포털 사이트에 ‘전 세계’까지 적었더니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라는 글자가 첫번째 자동완성으로 뜬다. 그리고 다섯 번째에 ‘전 세계 코로나 사망자’가 뜬다.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 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4일 기준으로 1,031,812명이다. 오늘만 전 세계에서 무려 5,47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국은 이런 분위기와는 약간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국내 확진자는 오늘까지 24,000명이고 사망자는 421명이다.

지난 한 달 동안은 그야말로 폭풍전야 같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코로나 방역이 시작된 후로 가장 특별한 긴장감이 감돌았던 시기였다. 생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카페들은 문을 닫았고, 그나마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방법들이 동원되어야만 했다. 내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잡지의 회의는 카톡 대화창으로 이루어졌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모조리 미뤄졌고, 내가 다니는 헬스장도 문을 닫았다(올해 벌써 두 번째 있는 일이다). 제일 곤란한 건, 역시 내 자신이었다. 나는 집에서는 절대 작업을 못 하는데, 하루종일 집에서 노트북을 켜고 있다가 밤이 되면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인 걸까? 하는)자괴감에 휩싸여서 잠에 드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어떨 땐 이런 상황을 만든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기분이 들고 화가 나기도 했다. 동시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혹시라도 코로나에 걸릴까봐, 혹은 코로나에 걸린 사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주친 적이 있을까 봐. 자책과 분노, 두려움과 미움이 복잡하게 뒤섞인 마음. 아마도 그건 8월 15일 광화문에서 집회를 한 사람들과 주동자에게 향해 있었을 것이다. 혹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개의치 않고 모이거나,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거나, 손을 제대로 씻지 않거나, 심지어는 카페나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을 것이다. 나의 생각은 때때로 지나치고 무분별하게 뻗어 나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 감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은 제일 처음 코로나를 발병하게 만든(만들었다는, 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걸까?)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나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일이 ‘진짜로’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냥 그런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어느 날인가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창밖을 봤을 때, 사람들이 빠짐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풍경과 사회적 거리를 지키라는 캠페인 광고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때 문득 이런 문장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게 아닐까.

그 전에는 한순간에 가공할만한 충격으로 인해 세계의 종말이 이루어지리라고 막연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세계의 종말은 이런 식으로 천천히 다가 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보는 것에서부터 윤리가 시작된다고 말했는데 이제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 예의인 시대를 통과하는 중이다. 손쉽게 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거나 등을 두드린다거나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타인에게 말을 걸거나 호의를 베푸는 일도 쉽지 않아질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타액의 교환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일일 수 있으니까. 더 나아가서는 (마치 내가 그랬던 것처럼)어떤 종류의 무분별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쉽게 비난하고, 눈살을 찌푸리고, 가차없이 그 분노를 표출하게 될 것이다. 삶은 점점 폐쇄되고 경계는 견고해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고립되고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심은 때로 애정과 존중을 압도할 것이다…그런 식으로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어떤 부분들이 하나둘씩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지구의 종말이 이런 식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어두운 밤 모두들 각자의 창문을 꽉 닫고 있는 것, 이웃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고요하고 조용하게 서서히 스러져 가는 것.

물론 내가 위에 열거한 방식으로 세상의 종말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완전히 과장된 생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나는 사실, 세상의 종말은 기후온난화 때문에 올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전문은 아시아문학패스티벌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손보미 소설가

2009년 《21세기 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은 후,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과 중편소설 『우연의 신』, 장편소설 『디어 랄프로렌』, 『작은 동네』, 짧은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를 출간했다.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3년 젊은작가상, 2014년 젊은작가상, 2015년 젊은작가상,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제21회 김준성문학상, 제25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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