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기획 06] 오은 시인 - “‘더 멀리’가 아니라 ‘더 가까이’”
[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기획 06] 오은 시인 - “‘더 멀리’가 아니라 ‘더 가까이’”
  • 오은 시인
  • 승인 2020.10.2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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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나는 이 글을 동네 카페에서 쓰고 있다. 점심시간 이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예전을 떠올리면 지금 이 공간은 오붓할 정도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단계가 바뀔 때마다 카페의 구조도 조금씩 달라진다. 중앙에 있던 큰 테이블이 빠진 지는 오래되었다. 거기에 작은 테이블이 듬성듬성 놓여 있다. 음료를 주문하는 자와 주문받는 자 모두 마스크를 끼고 있다. 음료를 섭취할 때 빼고는 모두들 마스크를 낀 채로 있다. 1년 전만 해도 이상했을 풍경이 이제는 더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통유리로 된 문밖을 바라본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작년만 하더라도 마스크 낀 사람을 피해 다녔다. 마스크는 질병과 범죄를 연상케 하는 무엇이었으니까. 이제는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에게 뜨거운 눈총을 보낸다. 마스크 대란이 끝나고 수급이 원활해졌지만 일회용 마스크를 여러 번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스크 살 돈으로 다른 것을 사야 하기 때문이다. 재난 상황에서조차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난은 사람의 처지를 사방에 드러나게 한다. 가리고 싶은 것을 가릴 수 없게 만든다. 마스크가 입을 가리는 데 쓰인다는 점에서 이는 상징적이다.

얼마 전, 경향신문 정책사회부장 정유진이 쓴 칼럼 「쪽방촌 주민 A씨의 가난」을 읽었다. 신문사에서는 올여름 일상에서 기후 위기의 현실과 맞닥뜨린 이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때 필자의 후배 기자가 만난 서울 돈의동에 사는 60세 기초생활수급자 A씨의 이야기였다. 인터뷰 취지에 맞게 기자는 폭염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 창문도 없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여름이면 사우나로 돌변하는 쪽방촌, 그곳에서 사는 일이 어떤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A씨는 “그래도 현관문을 열어두면 조금 시원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날씨가 더워지면 어떤 점이 가장 힘든지 묻자, A씨는 “딴 게 아니라 병원 가서 매일 주사 맞고 오는 게 무척 힘들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다른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A씨의 혼잣말이 들렸다. “강남까지 걸어서 왔다 갔다 하니까 더워지면 그게 제일 힘들지.”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칼럼의 초입에서 A씨는 돈의동에 산다고 했었다. 한여름에 종로에서 강남까지 매일 걸어 다니는 사람의 뒷모습을 떠올리니 아찔했다.

중략

이처럼 코로나19도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다 힘들지만, 똑같이 힘들지는 않다. 자가용이 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신의 폭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재난 상황에서도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고, 선택의 가짓수가 많은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삶은 점점 멀어진다. 겨울 날씨는 공평하지만 추위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은가. 대처 방식을 알아도 경제적 여건 때문에 그 방식을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며 내가 느낀 것은 지독한 불평등이었다. 특정 시기에 불거지는 불평등이 아닌, 특정 시기에 더욱 심화되는 불평등 말이다.

나는 요즘 ‘모른다’라는 감각에 휩싸여 있다. 예측이나 예상, 예견 같은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상 이상의 현실을 직면할 때마다 맥이 빠진다. 내가 몰랐던 이유가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해서였다는 사실에 자책감이 든다. 얼마나 더 나빠질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집채만 한 파도를 예상했는데 해일이 밀어닥치는 상황을 너무 많이 접한 것 같다. 비단 자연재해나 인공재해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같은 땅에 살면서도 우리는 서로 너무나 모른다. 서로의 입장을 모르는 상태로 상대를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관심은 혐오로 이어진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고 차별로 둔갑한다. 불평등은 땅 위에서, 웹상에서 ‘당연한 것’으로 재생산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에 대해 논해야 하는 지면이지만, 문학이 뭔지 평생 가도 모를 내게 이는 너무 커다란 주제다. 그런 내게 길을 제시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코로나 시대의 한복판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상상하는 일은 괴롭다. 누군가는 비대면이 일화된 사회를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방역 체계에 대한 점검이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할 수 없음’과 거기에서 연유한 ‘무기력’이 새로운 문학 환경을 구축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지닌 작품들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두가 내게는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어쩌면 이때야말로 문학은 ‘내다보기’가 아니라 ‘들여다보기’에 힘써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을 통과하지 않으면 나중은 오지 않는다. 지금을 제대로 통과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집채만 한 파도가 아니라 해일이 밀어닥쳐 마을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처럼, 이 세상의 취약함을 매번 재확인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취약한 사회에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한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세태를 아무리 잘 담아낸다 할지라도 그때의 문학은 ‘그들만의 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늘 작은 것, 보잘것없는 것,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절로 시선이 간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세상은, 보는 세상은 너무나도 작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세상 안에 갇혀 ‘이 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얼마나 작은가. 더 작아지기 않기 위해서는 전체를 조망하는 일보다 구석구석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눈을 부릅뜨고 놓친 것은 없는지 찾아보고 그것들을 기록해야 한다. 같은 상황에 놓이더라도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를 진득하게 응시해야 한다.

전문은 아시아문학패스티벌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오 은 시인

198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2002년 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로봇과 서사를 다룬 책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색과 그림을 다룬 책 『너랑 나랑 노랑』, 그리고 사람과 삶을 다룬 책 『다독임』을 썼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 콘텐츠학과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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