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② 제국과 친일의 생명정치 논리, '매일신보'에 실린 김동인의 글을 중심으로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② 제국과 친일의 생명정치 논리, '매일신보'에 실린 김동인의 글을 중심으로
  • 김영삼 문학평론가
  • 승인 2020.11.0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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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에서 두 번째 발제를 맡은 김영삼 문학평론가 [사진제공 = 장우원 시인]
10월 31일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에서 두 번째 발제를 맡은 김영삼 문학평론가 [사진제공 = 장우원 시인]

 

Ⅰ. 일그러진 초상

친일문학은 제국의 통치 논리를 내면화한 식민지 문학의 집단적 질병이었다. 또한 근대 실현과 근대 극복이라는 모순된 질문, 다시 말해 조국의 발전을 통한 독립과 일본제국주의의 초극이라는 이중적 과제에 대해 식민지 지식인들이 제출한 비극적 형식의 오답이었다. 식민의 근대적 주체는 처음부터 분열되고 일그러진 형상으로 예고되었다.


‘친일문학’은 한국에서의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고유한 측면이다. 일제 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근대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사회를 ‘근대화’하는 동시에 그 ‘근대화’를 부정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모순에 처해 있었고, 그 모순을 살아냄으로써만 근대적 주체로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친일문학은 그 실패의 기록이며, 근대적 주체 형성에서의 한 역상(逆象)이다.1)

 

김철은 식민지 근대주체가 스스로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일본제국주의에 의탁했던 해소 방식의 결과로서 친일문학에 접근한다. 도달 불가능한 '실재Real(라캉)'로서의 이념적 근대에 대한 동경과 식민의 형태로 현존하는 ‘실상real’에 대한 뒤틀림 상태에서 근대를 상상했던 당시의 문학은 비극적 형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의 ‘식민지적 전향’에는 일본의 앞선 문명개화가 곧 서양화이며 근대화라는 근원적 인식이 존재했다. 그 결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과대평가와 동일시 의식 또는 편승주의를 기반으로 한 지식인들의 현실인식은 제국의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론’ 그리고 아시아 침략의 논리였던 ‘팔굉일우(八紘一宇)’2)와 ‘대동아공영권’ 등과 같은 제국주의적 프로파간다에 전유되면서 전락하게 된다.3)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양 점령이 가속화되면서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면서,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대응했던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의 해방을 외치며 태평양전쟁을 벌였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제국주의의 논리에 편승하고 동참하면서 ‘황국신민’, ‘일본 정신’, ‘성전(聖戰)’ 등의 프로파간다를 변주하고 있었다. 팔굉일우, 대동아공영권의 비장한 성전 뒤에 피로 얼룩진 일장기의 패권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식민지 시기 조국의 독립을 선결과제로 삼은 저항 정신은 민족적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반제국주의적 투쟁과 방향성을 공유한다. 반면 근대화의 성취를 민족의 우선과제로 삼을 때는 근대주의를 실천이념으로 하는 개량주의 및 실력 양성론 또는 자치론의 성격이 강조되면서 식민지 지배 권력의 논리에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본제국주의 통치 권력의 지배 방침 내에서 현실적인 가능성을 추구하는 합법성의 논리에 갇히게 되면서 식민 통치 권력과 전술적 타협을 표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서양 열강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성격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와의 타협으로 착종되면서 모순의 덫에 갇히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타협론은 식민 통치 권력이 강요하는 합법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수혜의식과 조선 민족의 자강 능력 부족을 전제로 현실적인 가능성을 추구한다는 미명에 갇히게 되면서 식민지 현실을 몰주체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식민지적전향’이 탄생한다. 제국이 이룩한 근대 문명 수용이 곧 문명개화이며 부국강병이라는 종속적 근대화의 논리로 귀착된 것이다. 일본의 대동아전쟁에 대한 김동인의 ‘감격과 긴장’은 이와 같은 인식의 결과이다.


우리 문단인이 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내선일체(內鮮一體)로 국민 의식을 높여가게 된 것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다. 만주사변은 ‘만주국’이 탄생하고 민주국 성립의 감정이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부화되자 조선에서 ‘내선일체’의 부르짖음이 높이 울리고 내선일체의 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다시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이제는 ‘내선일체’도 문제거리가 안 되었다. 지금은 다만 ‘일본신민(日本臣民)’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 할 한 백성일 뿐이다. ‘내지(內地)’와 ‘조선’의 구별적 존재를 허락지 않는 한 민족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종족(種族)을 캐자면 다를지 모르나 일본인과 조선인은 지금은 합체(合體)된 단일민족이다.
…(중략)…
국가가 명하는 일은 다 못하나마 국가가 ‘하지 말라’는 일은 양심적으로 피하련다. 국가가 ‘좋다’고 인정하는 일은 내 힘 자라는 데까지 하련다. 이미 자란 아이들은 할 수 없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는 ‘일본과 조선’의 별개존재(別個存在)라는 것을 애당초부터 모르게 하련다.
대동아전쟁이야말로 인류 역사 재건의 성전(聖戰)인 동시에 나의 심경을 가장 엄숙하게 긴장되게 하였다.4)


전쟁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조선을 대륙 병참기지의 중핵적 지위로 격상하고 대동아공영권에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서의 지도적 지위에 놓게 한다는 제국주의의 권력 작동 방식은 ‘식민지적 전향자’들이 일본제국주의에 편승하면서 제국의 논리를 내면화하기에 충분히 달콤한 인식적 유혹이었을 것이다. 김동인은 이에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종족적 차이를 거세하고, 동아시아제국 건설이라는 파시즘적인 국가주의 동일화의 전략에 근거하여 “단일민족”임을 선언한 것이다. 특히 이른바 “성전(聖戰)”이라는 표어는 제국의 인구(노동력, 전투력) 관리 정책의 민낯을 인류 역사의 재건이라는 매력적인 화장(化粧)으로 가려주었다.
최재서가 주간한 <인문평론>과 조선총독부의 글은 김동인을 비롯한 당대 제국과 식민지 지식인들이 공유하던 ‘상상의 공동체’를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결국 평화에 대한 책임은 평화 의욕을 실천할 만한 실력을 구비한 강대국의 어깨에 걸려있다. 이런 점에서 동아의 아니, 세계의 강대국으로서의 우리나라(일본-인용자)와 국민의 책임은 특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사변이 동아 신질서 목표에 의해 ‘성전’이 되고, 동아 신질서의 정수가 동아 협동체 이념에 있다면, 이 이념의 구축에 성공한 우리 지식 계급이 사변에 기여하는 것은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5)
그 후(만주사변 이후-인용자) 우리나라가 정정당당하게 소신을 내외에 천명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 유지라는 대이상의 실현을 향해 매진하는 한편, 만주 건국의 위업은 착착 진척되어 일반 민중들은 새삼스럽게 우리 국력의 위대함에 경복(敬服)하게 되었고, 민심은 점차 평온을 되찾아 일부 유식자 사이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론의 통일을 외치며 내선(內鮮)이 일치하여 비상시국에 대응하려는 기운마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6)


일본제국주의가 주장하는 ‘오족협화(五族協和)’는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당대의 이데올로기로 격상되면서 만주사변을 합리화하는 논리였다. 그리고 여기에 서양 열강에 대응하는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조선 지식인들의 적극적 기여를 독려하는 식민의 논리가 바로 ‘성전’이다. <인문평론>의 이와 같은 일련의 논리들은 조선총독부의 선전 도구로 전락한 어용 잡지의 면모를 보여줌과 동시에 잡지를 연명하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생명정치의 자발적 내면화의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최재서는 대동아전쟁의 총동원 시국에서 이른바 ‘오족협화’와 ‘동아신질서’를 위한 문학인들의 자발적 협력과 분발을 실천원리로 강조했다. 조선의 대륙 병참기지로서의 역할과 조선인의 군사 동원까지 문학이 담당해야 할 역할로 외치면서 소위 ‘성전(聖戰)’에의 참여의식을 표명한 셈이다. 제국주의의 현실 참여 강요 이전에 먼저 문학비평의 지도성이라는 명목으로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전략을 내면화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일반 민중들이 ‘국력의 위대함에 경복’하고 ‘내선이 일치하여 비상시국에 대응하려는 기운이 조성’되었다는 조선총독부의 (현상과 목표가 뒤바뀐) 상황보고는 전쟁 수행을 위해 그전까지 정치의 셈법에서 제외되었던 조선인들을 전쟁 물자로 포함하려는 전략적 포섭임을 방증한다.

특히 ‘조센징’이나 '불결, 파렴치, 비굴, 추한 고집, 음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상도 없고 희망도 없는 조선인을 나타내던 '요보(ヨボ)'라는 표현에는 조선인을 국가 통치의 바깥으로 추방시키고 호모사케르와 같은 존재로 취급했던 전력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비하적 표현들을 ‘조선인’, ‘반도인’이라는 표현으로 치환한 데에는 포함과 배제의 논리로 권력을 재구성하는 제국의 계보학적 통치논리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전쟁의 승리를 가정하고 제국의 이익을 재분배할 수 있다는 전략적 논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에서 한국 사회경제사 연구에 참가했던 황국사관 학자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런데 그러한 대동아 의식이 만주사변 이후 한국인에게도 생겨났다고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피정복자인 한국인과 정복자인 일본인의 대립이었으나, 만주사변 이후 또 하나의 피정복자가 생겨나 한국인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정복자의 입장에 서려는 사람이 나타났다.7) ('심포지엄 일본과 조선')


객관적 자료나 통계로 입증된 것이라기보다 한 학자의 판단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제국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한 조선인들의 출현을 진단한 이 글을 보편적 논리로 주장할 수는 없다. 오히려 만주사변과 같은 전쟁이 일본의 대동아건설이라는 프로파간다에 효과적으로 작용하면서 내선일체가 결과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바람으로 읽는 것이 더 옳겠다.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든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권력이 조성하려던 조선인 특히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이라는 점에 있다. 제국주의 계층 구조의 최하위에 위치했던 조선인들의 불만과 울분을 대륙 침략 전쟁의 계기로 삼고 만주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우월감으로 이행시키려는 의도와 다름없다. 이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지점은 조선 지식인이 그러한 우월감이나 승리의식을 가지는 순간 그 인식의 지평에는 일본인의 의식, 다시 말해 황국신민으로서의 의식이 전염된다는 점이다.

김동인의 일그러진 문학론은 이와 같은 제국의 통치 논리를 내면화한 식민지 지식인의 한 초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해 ‘내선일체’를 근거로 내세운 ‘황국신민화’라는 거짓된 약속은 김동인을 비롯한 조선의 문인들에게 ‘신체제문학’, 또는 ‘국민문학’이라는 집단적 질병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 반도의 문학인의 책무는 크고 또 중하다.
막대한 물자와 기계력을 총동원하여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려는 저 미·영을 상대로 하여 그를 거꾸러뜨리고 재기불능케 하기 위해서는 1억 국민의 4반분(半分)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반도인의 지위는 가볍게 볼 수 없는 바이다. 이 절대적인 수효인 반도인의 사상을 지배할 책무를 지고 있는 우리 문학인의 지위는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이다. 국가성쇠의 열쇠가 우리 반도 문학인의 손에 달렸다 해도 과한 망언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내 손으로 총을 잡지 못하고 대포를 잡지 못하였다고 퇴축(退縮)치 말고 이 전쟁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열쇠를 잡았노라는 자각과 긍지 아래서 우리의 무기인 문필을 가장 효과있게 이용할 것이다.8) 


김동인은 여기서 조선 인민을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포함시키고, 특히 문학인들의 역할을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제국의 ‘문필’로서 도구화하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전도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이러한 김동인의 정신이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 생산되고 고착화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이 이 글의 시작점이었다. 이를 위해 다음의 장들에서는 신체제문학의 이데올로기적 의미와 생명정치권력의 통치술을 비교분석하고, <매일신보>에 실린 김동인의 논설들과 해방 전후 발표된 김동인의 소설들을 교차 분석함으로써 그의 일그러진 근대론과 민족 발전론이 억압과 통제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정치권력의 통치술의 내면화에 의한 정신 작용의 결과라는 점을 밝히려 한다.


Ⅱ. 규율권력의 통제와 생명정치 권력의 내면화

일본제국주의는 두 가지 매혹적인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의 내면적 동조를 이끌어낸다. 식민지 조국 근대화라는 경제적 미결 과제와 황국신민화라는 정치적 미결 과제는 그것의 도달불가능성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항구적 예외상태’의 양 축을 형성했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 건설 프로젝트는 이것을 제외한 다른 목표나 가치를 모두 압도하는 선행과제로서 항구적인 비상상태(정상적 권력 구조의 정지를 선언하고 비상상태를 선언함으로써 비일상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하게 하는 예외상태)를 구축하는 마법의 통치술이었다.

제국은 주권(여기에서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정지되는 ‘예외상태’를 선언하면서 그동안 셈법에서 제외되었던 조선 인민을 제국의 군사력과 노동력으로 흡수하기 위한 논리를 제공했고, 이광수 최재서 김동인 등 조선의 지식인들은 ‘항구적 미결과제’를 해결하는 기회라는미명하에 제국의 통치술에 포섭되었다.

미셸 푸코는 이러한 통치의 방식을 죽음을 관리하는 규율권력과 달리 생명과 삶의 방식을 관리하는 생명정치로 정의한다. 잠시 이 두 가지 권력의 작동방식을 비교하면서 식민지 말 일본제국주의의 통치술의 특징과 이에 동조했던 조선 문인들의 내면화 논리를 분석하고자 한다.

푸코에 따르면 군주는 백성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삶과 죽음의 권력(the power of life and death, 생사여탈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권력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생사여탈권으로 표명되는 권리는 사실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둘’ 권리이다. 요컨대 그것은 칼로 상징되었다. …… 그러한 사회에서 권력은 본질적으로 징수(deduction, ‘빼기’-인용자)의 심급, 절취 메커니즘, 일부의 부를 자기의 것으로 할 권리, 신민의 생산물, 재산, 봉사, 노동, 피에 대한 착취로 행사되었다. 거기에서 권력은 무엇보다도 물건, 시간, 육체, 마지막으로 생명에 대한 탈취권이었고, 생명을 탈취하여 없애는 특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9)


규율권력은 빼기와 탈취라는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생사여탈권으로 상징되는 이러한 권력은 죽게 할 수 있는 권리, 즉 인민의 생명을 ‘징수(빼기)’하는 힘이다. 일본제국주의의 무단통치와 사상적 검열은 이러한 생사여탈권을 이용한 통치술이었다. ‘빼기’의 통치는 권력에 복종하는 세력들에 대한 선동, 통제, 감시, 조직화 등의 기능을 작동시키는 기술이었다.10) 제국이 행사하는 식민지 권력의 심급에는 바로 ‘생명의 죽음’이 존재했다.

이 당시 제국의 통치 권력은 1925년 5월 15일의 치안유지법, 1936년 12월 21일의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41년 2월 12일의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과 같은 파시즘적 사상통제의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을 촘촘하게 구성하고 있었다. 이는 총과 칼을 기반으로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규율권력의 작동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을 기본 메커니즘으로 하는 규율권력 하에서 조선의 문인들은 총과 칼의 그물망을 피하기만 하면 될 뿐 굳이 제국의 통치 논리에 동조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훼방과 멸시와 박해와 방해 가운데서, 가시의 길 30년, 다른 훼방쯤이야 내 신념이 있으니 개의할 바 아니지만, 조선총둑부 검열계의 방해만은 진실로 딱하였고. 다른 훼방은 단지 훼방에 그치지만, 총독부의 방해는 ‘박멸을 목적으로 한 방해’였으니 게다가 박멸할 권한도 가진 사람의 박해니 가장 아팠소.
이런 가시의 길 30년을 지나서, 지금도 그래도 문장에도 틀이 섰고, 표현 방식에도 틀이 섰고, 내가 개척한 길은 조선 소설도의 한 지표가 되어, 빈약하나마 차차 자라는 광경을 바라보면, 스스로 가슴 무득히 일어나는 기쁨을 금하지 못하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충분히 보수를 받았거니 하고 있소.11) 


해방 후 발표된 김동인의 소설 '망국인기'(<백민>, 1947.3.)에는 해방 직후 가난했던 문인으로서의 한탄과 한국어 문장의 틀을 마련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식민지 말기 조선 문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일본제국주의의 ‘국책’에 거짓 편승했다는 자기 합리화의 변이 담겨있다. 이 말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총독부 검열계의 “훼방과 멸시와 박해” 등으로 표현된 강압적 감시권력(규율권력)이 당시의 김동인에게는 제국의 통치논리에 동조화할 논리를 제공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1938년 국가총동원 체제 이전 제국의 통치는 ‘하지 않음’으로써 감시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터, 당시의 많은 문인들이 그러했듯 친일문학은 이러한 규율권력의 방식으로는 파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8년 5월에 발효된 국가총동원법 이후 식민지 조선은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파놉티콘에 갇히게 된다. 중일전쟁 1년 후인 1938년 7월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총독부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을 결정하고 국민운동에 대한 일상적 통제와 감시를 강화한다. 전쟁 동원을 위한 일원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제국의 통치권력과 연맹과 조선인을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본부에서부터 기층의 부락연맹과 애국반에 이르는 전시동원체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12) 그 결과 1938년 10월 즈음 평안남북도와 함경북도를 제외한 10개도에 도연맹이 설치되고 부군 연맹 200개소, 면 연맹 3000개소에 달했다.13) 제국의 이러한 일상적 감시체제는 감시와 피감시라는 위계적 권력 관계의 내부에 조선 인민들이 스스로를 감시하면서 권력을 내면화하는 생명정치(bio-politics)권력의 작동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17세기에 등장한 규율권력은 훈육과 통제를 주요 기술로 사용하면서 인민을 복종하는 동시에 잘 길들여진 유용한 주체로 만드는 통치술이다. 군주가 백성의 재산과 노동을 취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었던 이 빼기의 기술은 17세기 이후 권력 메커니즘의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후 18세기에 등장한 ‘인구의 생명정치’라는 새로운 기술은 단지 인민들을 죽이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민들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삶의 구체적 조건을 확장하고 재편성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이제 권력의 주된 역할은 “생명의 보장, 유지, 증대, 정리”14)라는 목표에서 인구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생명정치권력’이 된다.


18세기에 권력의 기법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중요한 혁신의 하나는 ‘인구’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등장한다는 점인데, 그것은 부로서의 인구, 노동력이나 노동역량으로서의 인구, 증가 자체와 증가에 의해 마련되는 자원 사이의 균형으로 파악된 인구이다. 단순히 신민이나 심지어는 ‘민족’이 아니라 특수한 현상과 고유한 변수, 즉 출생률, 이병률, 수명, 생식력, 건강상태, 질병의 발생빈도, 식생활, 주거형태를 내포하는 ‘인구’가 통치의 대상이라는 것을 정부쪽에서 알아차리는데, 이 모든 변수는 생명에 고유한 움직임과 제도에 특유한 영향의 교차점에서 결정된다.15) 


‘인구의 관리’는 인민의 생명에 관련된 조건들을 관리하는 새로운 통치의 기술이다. 출생률, 사망률, 건강상태, 수명 등에 대한 통계가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이제 국가는 한 개인이 먹는 음식과 같은 사소한 항목에서부터 출발해서 그 개인의 수명을 예상하고 수치화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국가에서 필요한 인력들을 소집할 때도 이제 국가는 마구잡이식이 아니라 개인의 연령과 특성을 파악해 둔 문서와 자료 등을 기준을 중심으로 소집한다.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대상으로 모든 학문 체계와 제도를 정비하고 그것들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총동원체제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의 학문과 언어 또한 이제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제국주의 권력의 가장 중요한 심급은 이제 신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비롯하여 조선인의 ‘생명’을 둘러싼 모든 것이 된다.16)


그러한 권력은 폭발적으로 많은 인명을 빼앗음으로써 표면화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규정짓고 측정하며 평가할 뿐만 아니라 계층화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군주의 적을 복종하는 신민으로부터 분리하는 선을 그을 필요가 없으며, 규범을 중심으로 배치를 실행한다.17) 


푸코의 이 문장은 그대로 일본제국주의의 언어로 치환 가능하다. 이제 제국은 조선 인민의 인명을 빼앗음으로써 권력을 유지하지 않는다. 제국은 조선인의 사상을 규정하고 평가하며 계층화한다. 협력 문인과 비협력 문인의 구별이 그러하며, 신동원체제 아래 3000여 개에 달하는 면 단위 연맹의 역할이 그러하다. 또한 제국은 이제 일본인과 조선인을 “분리하는 선을 그을 필요가 없으며”(표면적으로는), 황국신민이라는 기준을 중심으로 인민을 배치하고 동원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은 법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인민들 삶의 내부에서 작동된다. 이는 자본주의 시대의 시민들이 자유주의적 질서를 능동적으로 수행하고 작동시키는 것과 같다.

제국으로부터의 배제와 도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자기 신체의 전락을 의미하고, 영원히 근대사회라는 이상적 질서의 바깥에 놓이게 된다는 불안과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과 군사력의 확보에 절대적인 인구의 수가 요구되었던 바, “1억 국민의 4반분(半分)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반도인의 지위”18)라는 김동인의 내적 합리화는 이러한 생명정치 권력을 내면화한 합리화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나라에서 받은 생명이니 오늘날 나라에 도로 바친다는 이 신념이야말로 가장 강하고 가장 무서운 자로서, 나라를 위하여는 생명을 내어 바친다는 사람에게 다른 무서운 무엇이 있으랴”19)는 김동인의 생각에는 생명이 제국의 동원 대상이며 생명을 바친다는 것이 대동아 제국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제국=개인/황군=조선인’이라는 논리의 파생물이다.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 우리 조선을 예로 볼지라도 명치대제(明治大帝)의 어조(御詔)로서 한국병합(韓國倂合)의 뒤에 조선인의 지위를 내지인과 동일하게 해주신다는 고마우신 분부를 받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에서만은 조선인은 제외되었다. 즉 병역이란 자는 단지 국민의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특권인 증좌이다. 조선인의 사상이 과연 황국신민되기에 충분한가, 아국(我國)의 국방국은 그 사상까지 완전한 일본인적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된다.
한동안의 기간을 지낸 뒤에 우선 지원병제도를 조선에 실시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황민화의 성과 정도를 보고 이만했으면 조선인도 황민화하였다는 판단을 얻어가지고, 그러고야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인의 체력은 물론 내지인에게 비겨 손색이 없었다. 다만 내적(內的)으로 심적(心的)으로 사상적으로 황민이 되었는지 - 여기 의문점이 남아 있기 때문에 황군될 권리가 유예되었던 것이다.
이 유예되었던 장벽을 트고 이제부터는 조선인도 황군될 권리를 획득한 것이다.20) 


“드디어”라는 부사어에는 이제 조선인이 황군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감격이 담겨 있다. 병역에서 제외되었던 ‘배제(빼기)’의 역사를 지나 ‘포함’과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되었다는 고마움도 담겨 있다. 이 “고마우신 분부”에 부응하는 유일한 길은 “내적으로 심적으로 사상적으로 황민”이 되는 것이다. ‘식민지적 전향’은 이런 정신적 작용의 결과이며, 일본 제국주의의 물리적 실체로 실재하는 권력이 아니라 정신의 작용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방식을 보게 한다. 김동인만이 아니라 이광수, 최재서 등 당대의 문인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고 표현되었다는 점은 김동인의 사상적 전향을 어쩔 수 없었던 억압의 산물로 보기보다 강력하게 작동했던 당대의 생명정치적 권력 작동 방식의 구조적 필연성을 보게 한다. 김동인이 심적으로 또는 내적으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말들이 정확히 이런 생명정치의 작동방식에 대응한다. 규율권력의 억압과 통제가 아니라 생명권력의 포함과 배제의 논리를 내면화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시기 조선 문인들의 사상적 전향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정신 작용의 결과이다.
생명정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신체제문학론’ 또는 ‘국민문학론’의 문장들을 직시하면 이제 조선의 문인들이 어떤 지점에서 제국의 권력에 동조하고 그 권력을 내면화했는지를 정확히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Ⅲ. 신체제문학과 고백의 정치학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으로 개편되고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한국에서의 ‘신체제운동’ 강령을 선언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신체제 운동은 사상과 언론을 통제하고 조선 지식인들의 협조와 참여를 강요했으며 문학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학계는 1939년 10월 ‘조선문인협회’(회장 이광수)를 조직했고 1941년 11월 최재서에 의해 창간된 <국민문학>은 ‘신체제문학(新體制文學)’21) 실천의 장이 되었다.

당시 이광수는 ‘조선문인협회’의 개회사에서 “본회의 취지 목적은 일본 정신 위에 새로운 국민문학을 창조하려는 자각이며, 결심이며, 협력”22)이라는 일성을 한다. 여기서 ‘자각’은 제국의 권력에 조선 인민의 생명이 포섭되는 현실에 대한 자발적 동의의 표현이며, ‘결심’은 이것이 완전한 정신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며, ‘협력’은 이러한 정신의 신체적 실천 강령으로서의 의미를 띤다.

최재서는 <인문평론> 1940년 4월호 권두언 '국책과 문학'에서 ‘국책’이란 “국가가 국민 생활을 보호해가면서 국가 자체의 이상을 실현하는 지도 정신이 되는 원리”라고 명시했다. 즉 ‘국책’은 국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이상 실현을 위한 협력적 실천을 강조하는 행동강령에 가깝다. 특히 최재서는 문학인은 “국책을 유연하고 풍부하게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창조된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국책 문학”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 문학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퇴영성을 버리고 억지로 시국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솔선하여 시국을 지도한다는 열의와 패기”23)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광수와 최재서의 개회사와 권두언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국민문학’ 즉 ‘신체제 문학’ 탄생을 선언한 것이지만, 실상 문학론으로서의 구체적 방법론은 결여되어 있다. 구호로서만 강조되는 일본 정신과 문학성보다 국가적 이상을 강조하는 몰예술성은 이들의 문학론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김동인의 문학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 일면을 해방 후 발표된 그의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동인은 '망국인기'에는 식민지 시절 극심한 생활고를 겪는 조선 문인들의 활로를 찾기 위해 이광수와 함께 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인 아부달일[阿部達一]을 찾아가서 조선 문학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김동인 스스로를 대변하는 작품의 화자는 아부달일에게 조선의 대중들이 신용하는 작가들을 동원하여 국민문학의 선동력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그 방법으로 조선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조선어로 소설을 제작하게 함으로써 대중들의 나약한 사상을 제거하고 황국신민화라는 강건한 사상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조선문인보국회’와 별도의 작가단을 조직하고 조선어에 대한 검열을 완화할 것을 주장하면서, 그 효과로 일본어로 쓰이는 국민문학의 작품들이 대중에게 버려지고 있다는 점과 조선어 작품을 용인함으로써 비협력 작가들까지 포섭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이 작품의 핵심적 변(辯)이 문학인으로서 생명과도 같은 언어(조선어)를 지키고 발전했다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김동인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논리를 이용하여 역설적으로 조선어의 정체성과 조선 문인들을 지켰다는 합리적 논리가 되겠지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김동인의 논리를 이용하여 역설적으로 제국의 통치 전략을 합리적으로 수행할 방법을 찾은 것이 된다. 결국 생명정치적 제국의 통치술을 자기화한 김동인의 문학론은 다음과 같은 비극적 문학론을 남기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일본)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큰 국난에 직면해 있다. 1억의 힘을 함께 모아서 이 난국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국민 사상을 건전하고 강건하게 해야겠고, 국민 사상을 건전화하고 강건화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문학’의 ‘선전력’과 ‘선동력’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강건한 문학을 산출하여 국민 사상을 선도하는 것, 이것은 ‘싸우는 일본’의 최대 급무다.
1억의 사반분의 일이라는 수효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인의 움직임은 일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다.
공식적인 ‘만들어라, 보내라, 이겨라’ 등의 선전이며, 지금 당국이 장려하는 따위의 시국소설 등은 조선인은 ‘또 그 소리지’ 쯤으로 읽지부터 않는다. 더욱이 국어 일본어로 쓴 소설은 조선 총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부나 여인이나 노인은 알아보지도 못한다. 즉 무의미한 것이다.24) 


총독부가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시국소설”의 무용론은 검열과 통제의 방식을 거부하면서 그 방법론의 비효율성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김동인은 조선 문인들의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조건으로 조선어의 사용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김동인의 전략은 조선어라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민족성과 정체성을 간과한 채 언어를 사상의 도구로 전락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 제국주의가 일본의 정신을 표현하는 국민문학론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이미 ‘일본어로 쓰인 일본 소설’이 아니라 ‘조선어로 쓰인 일본 소설’을 요구한 것이기 때문에, 김동인의 생각은 제국의 전략과 그 방법과 목적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전략적 오류이며 자신이 제국의 통치술을 이미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나오는 무지의 당당함이다. 더구나 해방 이전 <매일신보>에 실린 김동인의 문학론이 해방 이후 자신을 변호할 목적으로 쓰인 소설들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은 정신 논리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통치술에 대한 김동인의 무지함을 증거할 뿐이다.


인간감정의 표현체인 ‘문학’도 평상시에는 문학 본래의 사명인 ‘위안물(慰安物)’ ‘오락물’인 노리개적 존재를 지켜오다가 비상시에는 홀연하여 그의 가지고 있는 바의 ‘교화력(敎化力)’ ‘선전력(宣傳力)’ ‘선동력(煽動力)’ 등을 있는 대로 발휘하여 국가목적 선양에 전직능(全職能)을 바친다. 문학 자신이 역사적이요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감화력을 교화력으로 고치고, 위안력을 선동력으로 고쳐가지고 국가명령 아래서 국책적(國策的) 역할을 다한다.
지나사변 시작에서 벌써 7년, 대동아전쟁도 어언간 3년째 잡히는 오늘이다.
전쟁에 대한 국민의 열과 긴장이 잘못하여 풀려가기 쉬운 이때에 있어서 그 풀리려는 긴장에 다시 감동과 흥분을 환기케 하고 - 이리하여서 국민의 마음에 언제까지든 적을 격멸케 한다는 각오와 아울러서 그들에게 다시 소년 같은 정열을 부어넣어 줄 자는 오직 문학의 선동력뿐이다. 청신한 감동과 거기 따르는 애국적 정열을 제공할 자는 - 제공하여서 총후인(銃後人)의 성(誠)을 그냥 유지케 할 자는 오직 문학의 선동력뿐이다. 몇 대의 항공기, 몇 척의 함정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할 자는 문학이다. 지원병에서 징병으로 또는 특별지원병으로 우리 반도인도 황민화의 보조가 더욱 힘차고 더욱 열있게 행진할 때에 이 모든 행사가 일시 뇌동적(雷動的) 흥분이 아니고 진정한 황민화의 산물인 점을 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후계자의 육속(陸續)을 효과있게 부르기에는 문학의 선동력과 흥분력의 힘을 빌 필요가 많다고 본다.25) 


김동인은 이 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국책을 수행하는 도구로서 문학의 ‘선전·선동력’을 강조한다. 문학 고유의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감화력”과 “위안력”은 “교화력”과 “선동력”의 역할로 이행하고, 예술적 언어 표현으로서 문학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으로 “적을 격멸케 하는 각오”와 이 열망을 유지하게 하는 “청신한 감동과 거기 따른 애국적 정열”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표명된다. 즉 문학의 언어가 조선 인민의 정신을 (이런 표현이 가능하 다면) ‘전체주의적 감수성’으로 무장하는 최고의 무기라는 것이다.26)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이광수와 최재서를 필두로 국민문학론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글들이 만연했다. 이들의 문장들을 다시 소급해 봄으로써 제국주의 논리를 내면화한 문인들의 논리적 허약성을 진단해 볼 수 있다. 먼저 1941년 최재서는 어용 잡지 <국민문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민문학은 단지 문단의 막다른 골목을 타개하기 위해 막연하게 고른 제목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 생활의 다른 여러 부분과 같이 금일의 고도 국방 체제의 필요에 따라 제기된 혁신적인 문학상의 목표인 것이다. 아직 명료한 형태와 성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벌써 명확한 사명을 띠고 있는 문학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서양의 전통에 뿌리를 둔 소위 근대 문학의 하나의 연장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정신에 의해 통일된 동서 문화의 종합을 기반으로 새롭게 비약하려 하는 일본 국민의 이상을 노래하는 대표적인 문학으로, 금후의 동양을 지도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27) 


일본제국주의가 품고 있는 ‘팔굉일우’, ‘오족협화’, ‘대동아공영권’ 등의 논리를 민족적 사명감과 시혜의식으로 승화하여 편승하는 논리로 해석될 수 있다. 서양 근대 문학의 정신을 지양하고 “일본 정신”과 “일본 국민의 이상”을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표현에는 문학 창작 방법론으로서의 구체성은 상실되어 있다. “고도 국방 체제의 필요에 따라 제기된 혁신적인 문학”이라는 표현은 대동아 전쟁의 한 도구로서 문학의 역할을 제기한 표어에 불과하다.

이즈음 이광수의 생각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조선의 문학과 기타의 문화는 이 웅대한 이상의 선전자, 고취자, 찬미자가 되고 이 이상을 향하여 행진하는 우리 국민의 생활과 분투의 향도자(嚮導者)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야말로 진실로 대문학이 나올 것이다. 문학만이 아니라 예술도 그러하고 종교도 그러하고 일상생활도 그러하다. 금일은 국민적 감격을 요구하는 때다. 모든 묵은 예술론을 한 번에 깨뜨려 부수고 거기에 예술의 신체제를 세울 때다. 관념 유희, 기교 유희, 성욕 유희를 일삼는 문학과 생활을 용납할 여유가 없는 때다.28)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永生)의 유일로(唯一路)가 있다고. 그러므로 조선인 문인 내지 문화인의 심적(心的) 신체제(新體制)의 목적은 첫째로 자기를 일본화하고, 둘째로는 조선인 전부를 일본화하는 일에 전 심력(心力)을 바치고, 셋째로는 일본의 문화 를 앙양(昂揚)하고 세계를 발양(發揚)하는 문화전선의 병사가 됨에 있다. 조선문화의 장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리하기 위하여 조선인은 그 민족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할 것이다. 이 발전적 해소를 가리켜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29) 
신체제하의 문학과 영화도 개인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을 버리고 전체주의 사상 밑에서 국가를 위하고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대동아주의 사상 밑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과 동아 공영권의 수립을 근저로 한 문화 활동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30)

일본 국민문학의 결정적 요소는 ‘천황의 신민’이라는 신념과 감정을 가진 각자의 문학이 곧 국민문학이 되는 것이다.31)

신체제하의 조선 문학의 길은 첫째 이번 신체제의 가장 큰 목적이 고도의 국방 국가 건설에 있느니만치 문학 작품도 국가 의식을 깊게 환기 고조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며, 제재도 생산 부문에서 일하는 근로 민중의 생활의 자태와 심리의 부면(部面)을 널리 접촉하여야 할 것이며, 둘째 문체는 알기 쉽고 간결하고 명랑하여 애조를 띠거나 음영(陰影)을 가진 것이 아닐 것.32)


1939년 ‘조선문인협회’ 당시 개회사의 내용과 크게 달라진 바는 없으나 구체적인 문학적 방법론으로 굳이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묵은 예술론을 버릴 것(이는 아마 서양 근대 문학의 모더니티에 대한 반발로 읽히며 이는 최재서의 생각과 일치한다), “관념 유희, 기교 유희, 성욕 유희를 일삼는 문학”을 버릴 것, 개인을 포함한 조선인 전체가 일본화 할 것, 그럼으로써 천황의 신민이라는 감정으로 일본 국민문학의 일원이 될 것, 자유주의 사상을 버리고 전체주의 사상을 문학의 근저로 삼을 것 등이다.


신체제의 문학은 온갖 개인을 그리되, 시민 문학과 같이 개인들의 성격과 마찰되는 외부 세계에서 생겨지는 운명에 의해 그릴 것이 아니라, 개인이 어디까지나 자기를 전체에 바쳐야만 그 인간적 성격과 운명을 획득할 수 있는 정신으로 그려야 할 것이다.33) 


또 김오성은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신체제’란 무엇보다도 “개인 본위에서 국가 본위로, 자유 경제에서 통제 경제로의 전환이며 개인의 국가로의 귀일”이라고 말한다. 개인을 전체와 동일화하는 제국이 곧 황민이라는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김동환은 ‘신체제’의 문학이란 “오로지 국가 때문에 있고 오직 신민의 길을 실천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것”34)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싸우는 문학이 걸어야 할 당연한 순서는 우선 종래의 예술성을 버리는 것이며, 묵은 의미의 시학적 규범을 탈피해 문학의 자유를 획득하고 결전의 국민 생활을 계몽해야 한다. 문학이 예술성에 구애를 받아 구태를 고집하며 전쟁 완수의 중요한 역할을 회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문학자는 문학이 정치의 종속물이 되었다고 탄식하지 말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문학과 정치를 이원적으로 대립시킬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35) 


다소 길게 인용한 글들은 모두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정치적 구호로서의 문학론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문학적 내러티브의 퇴보와 계몽적·전체주의적 사상의 도구로서 ‘예술의 정치화’는 신체제문학 혹은 국민문학인 문학론이 아니라 정치론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론이라면 친일 문인들은 그들의 예술성과 사상성 두 가지를 모두 상실했다는 점에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문학’이란 표현은 이 경우에 가장 뼈아프게 적용될 수사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신체제문학론의 내용들이 모두 유사한 내용들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은 신체제문학론이 하나의 문학적 이론으로 수립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통치에 대한 동의와 수긍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고해성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의 교리전파 내지는 정신교화 방식이 어떻게 정치권력의 통치술로 착종되는지를 보여주는 미셸 푸코의 논리에서 이 ‘고백의 정치학’의 의미를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내선일체의 지도자가 되기를 수용했던 이들의 태도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내면화하고 이를 자기성찰의 기본 원리로 삼음으로써, 지배 권력의 영속적이고 정신적인 지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미셸 푸코가 서구 기독교의 교리가 정치적 권력과 교합하는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밝히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권력의 내면화 또는 권력의 자기 동일시 과정이다.

푸코는 “성자는 스스로를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도를 잘 따르는 사람이다”36)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여기서 성자를 국민문학의 필요성을 주창했던 식민지적 전향자들로 대체해서 이해하면, 당대 조선의 민족에게 필요한 정신은 스스로를 성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즉 천황의 지도를 수용하고 이를 내면화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수도원에서의 “지도는 복종을 가르치는 엄격한 훈련이며, 이것은 타인의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포기”(186쪽)하는 것인데, 이는 젊은 수도사들에 대한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써 수련 수도사들이 자신의 의지를 억제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자기 억제의 확인 수단으로 기능했던 것이 이른바 ‘고해성사’ 즉 ‘고백’의 메커니즘이다.


이처럼 완전하고 철저한 복종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포기-대체(자기 의지의 포기, 타인의 의지로의 대체)의 상호작용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성찰과 끊임없는 고백의 훈련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상태(완전한 복종과 겸손의 마음)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초보자들에게 거짓된 수치심 때문에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생각이라도 감추지 말 것을 가르친다. 또한, 괴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그것을 선배 수도사에게 말하게 하고,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자신의 개인적 생각을 믿지 말고, 선배가 검토 후에 그것의 옳고 그름을 선언하면,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37) 

황군의 존재의의는 1에 10까지가 다 ‘대군(大君)’을 위하여 지키는 것이요 싸우는 것도 ‘대군’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자아라는 것은 전혀 몰각(沒覺)한다. 저 지나류(支那流)의 ‘효(孝)코자 하면 충(忠)치 못하겠고 충코자 하면 효치 못하겠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하는 등의 말은 황군에게는 전혀 무의미한 말이다.38) 


푸코의 분석에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지점은 바로 ‘자기 의지의 포기’와 ‘타인의 의지로의 대체’라는 교환관계다. 여기서 ‘자기 의지’의 기원은 육체적 욕망과 물질적 유혹에 대한 경계이면서 하나님과의 동일시에 방해되는 잡념의 억제이었겠지만, ‘복종’의 구조화는 복종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서 ‘복종하는 존재’를 실존의 존재성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의지를 지닌 존재’를 한없이 ‘겸손하고 낮은 존재’로 이행시킨다.39)

자아가 누락된 빈자리를 타인의 의지 곧 절대자의 의지가 대체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권력이 작동되게 하는 생활의 원리가 바로 ‘고백’인 바, 식민지적 전향을 단행했던 문인들이 포기한 민족의 주체성이라는 자리를 대체한 것은 ‘황군의 의지’이며 이들이 <매일신보>와 <국민문학> 등의 지면에 발표한 저 수많은 문학론은 복종의 구조 속에 포섭된 자아의 ‘고백’의 행위와 다름없다. 위에서 함께 인용한 김동인의 글에서도 자아가 “몰각”한 자리가 “대군”으로 대체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백의 가장 명백한 특징으로 푸코는 “그것이 과거의 행동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변화하는 생각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205쪽)을 제시한다. 이는 고백이 언제나 현재적으로 요청되는 지속적 행위여야 한다는 점에서 수동적 주체의 영속성을 위한 윤리적 정언명령에 가깝다. 신체제 문학을 수용하고 국책 문학 또는 국민문학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문인들의 표현들이 지속적으로 지면에 게시되는 것, 그리고 그 내용들이 실상 크게 다를 바 없이 반복 서술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글쓰기 행위가 하나의 문학론을 생성하는 일이 아니라 지속적인 고해의 행위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한다.

제국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전향 문인들의 내면적 자기 성찰은 확인될 수 없을뿐더러 대중적 프로파간다의 효과를 수행할 수도 없다. 따라서 끊임없는 고백을 요구한다. 오직 언어로 표출되는 사실만이 정화의 미덕을 부여받을 수 있다. “말을 만들고, 말로 표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일은 환상을 제거하는 힘, 내면에 있는 유혹자의 속임수를 쫓아 버리는 힘을 갖는다”(214쪽)는 기독교의 복종 수행성에 대한 푸코의 주석은 식민지 지식인들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성의 확립이라는 ‘환상’과 ‘유혹’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멀어지게 되었는지를 이해 가능하게 한다.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그리고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 부여될 황민으로서의 자격과 이익을 ‘조선어’로 언어화하고 주장함으로써 이들의 고백은 전향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고백은 말하고, 보여주고, 추방하고, 해방시킨다”(217쪽)는 푸코의 언설은 이제 이렇게 번역될 수 있다. 김동인을 비롯한 식민지적 전향의 문인들은 그들의 반복적 고해성사를 통해제국의 논리를 ‘말하고’, 자신들의 사상이 조선 인민의 발전과 조국 근대화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하지만 그럼으로써 조선의 민족정신과 근대화 발전 가능성을 ‘추방하고’, 결국 스스로의 주체성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버렸다.


Ⅳ. 비협력적 협력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1940년 10월 조선 문사 부대 38명이 양주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한 것을 보도하면서 ‘신체제’가 곧 ‘고도 국방 국가’의 건설임을 상기한다. 더불어 ‘황국신민의 시기’와 ‘신체제 일익의 시기’라는 두 가지 의미의 계몽적 시기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의 직분을 완수하는 데 ‘제일의적 병사’가 문인이라고 강조하면서 “자유주의적 사고와 습관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장 보국의 새로운 직분으로 달려갈 것”40)을 촉구하고 있다. 김동인 또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지시로 학예사(學藝社) 임화, 인문사(人文社) 최재서, 문장사(文章社) 이태준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황국 위문 작가단(皇軍慰問作家團)에 참여해 1939년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박영희, 임학수와 함께 북지 전선을 방문하여 위문활동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기 김동인의 문학 작품은 <매일신보>에 실린 그의 논설과 다르게 국민문학으로서의 성격이 도드라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방 이후 발표된 '학병수첩'(<태양>,1946.3), '김덕수'(<대조>, 1946.8), '반역자'(<백민>, 1946.10), '망국인기'(<백민>, 1947.3) 등41)에는 일본의 신체제에 대한 비판과 신체제문학론에 대한 성찰이 쓰인 것도 사실이다.


7천만 국민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지금껏 열등 국민이라 하여 도외시하였던 조선의 2,600만까지 끌어넣어 1억 국민을 자랑하고 아직껏 사반세기 동안 잊어버렸던 명치 황제의 일시동인(一視同仁)까지 끌어내 조선인을 추어세우고, 1,500년 전에 망한 백제까지 등장시켜 ‘동근동조’를 부르짖으며, ‘요보’라고 멸시하던 조선인에게 ‘반도인’이라는 자랑스러운 벼슬을 주고 일본인과 동등이라는 인식을 밝히기 위하여 창씨 제도를 세우고 …… 그리고 나서는 일본 신민 된 가장 빛나고 귀한 권리인 병역권을 조선인에게도 뒤집어씌웠다. 우선 ‘지원병’이라 하여 공장과 농촌의 씩씩한 젊은이들을 끌어내 중국이며 남방지대에 보내어 죽여버렸다.
뒤따라 학병 제도였다. ('학병 수첩', 372쪽)

나는 국적상 일본 사람이요, 병적상 일본 군인이다. 일본군의 승리를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요 승리하기 심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솔자로서의 아량과 관록을 못 가진 일본인, 장차 그들의 일컫는 바의 대동아 맹주가 되면 그 아이들은 대동아 전역 10억 민중의 고초는 또한 얼마나 클 것인가. 이번 전쟁에서 일본군의 일원으로 동아의 천지를 편력하며 일본군의 정치적 성격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았다. 보지 않았을지라도 이만한 것은 알 바지만, 일본인의 통치하에 든 백성같이 가련한 백성이 다시없을 것이다. ('학병수첩', 376쪽)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김동인의 인식은 일장기를 흔들며 대동아 전쟁에 참여하는 학도병들을 떠나보낼 때 “팔을 두르며 자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젊은 용사의 음성은 어열상반(語咽相半), 그러나 물론 슬픔의 느낌이 아니요 감격과 환희의 느낌”이었다고 표현한 '일장기의 물결'(<매일신보> 1944년 1월 20일)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식을 보여준다.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었다”는 감격과 긴장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그들을 일제 권력에 동원된 “가련한 백성”으로 표현하면서 예외적 존재였던 “요보”를 “반도인”으로 추켜세우며 전쟁 동원을 병역의 권리인 양 “뒤집어씌었다”라는 표현으로 일본의 통치술을 비판하고 있다.

또 김동인이 <조광(朝光)>에 연재한 <성암(星巖)의 길>(1944년 8월~12월. 연재중단으로 미완)은 식민지 말에 쓰였지만 직접적으로 조선인 인물의 친일 행위를 미화하거나 독려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김동인의 일그러진 근대론과 황국의 신민으로서의 일그러진 초상은 제국주의의 억압의 결과였다고 말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 막부시절 한 유신 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성암의 길>은 아사노 아키라[淺野晃]가 강조한 “민족적 카오스”42), 그리고 신체제문학론을 주장했던 조선 문인들이 강조한 “일본정신”을 유신 지사 ‘양천성암(梁川星巖)’의 일대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성암은 막부 후기 시선(詩仙)으로 이름을 떨친 시인으로 수많은 반막부 인사들로부터 추앙받은 인물이다. 성암은 중국 한시(漢詩)에 통달하기 위해 재산의 상속권을 동생에게 물려준 후 유랑을 떠나 북산 선생과 청나라 사람들과 한학자들을 두루 만나며 소양을 넓힌다. 이후 아내와 함께 유랑을 떠나면서 천황의 권위를 위협하는 막부의 야심에 우려를 품으면서 일본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다. 일본은 하늘의 뜻을 받은 천황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일본 역사의 전통을 되새기며 성암은 스스로 황국의 신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절친한 교우관계를 가지던 라이산요(賴山陽)로부터 일본인의 민족의식을 운문을 통해 깨우쳐 알리고 일본사를 저술하라는 유지를 이어받는다.

이 작품은 연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작자의 사정에 의하여 이 소설은 이달 호로 중단하겠사오니 양해하시오’라는 공지와 함께 중단된다. 조선인이 등장하지 않고 일본의 유신지사를 그린다는 점에서 직접적 친일의지를 드러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것을 민족의식과 동일시하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간접적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 그가 쓴 소설 '망국인기'에는 이러한 소설의 집필 이유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궁한 나머지 안출해낸 것이, 매 주일 방송소설 한 편씩 쓰는 것이오. 조선어 방송에 쓰이는 작품이니, 작품의 용어는 조선말로 할 것이나, 그 대신 ‘국민 사상 선도(?)’를 목표로 하거나 ‘전력 증강’을 목표로 한 것이라야 될 것이라는 조건이오. 그러나 부여 민족, 단군 자손의 ‘일본 황민화’ 목표로 한 글은 내 손이 부러질지언정 차마 쓰지 못하겠소. 여기서 안출해낸 것이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의 약전(略傳)을 한 주일에 한 사람씩 써 내려가는 것이었소.
흥이 나지 않는 일이니 일이 될 까닭이 없고, 더욱이 소위 유신지사라는 것은 모두가 비슷비슷한 행로와 말로를 가진 사람들이니 이야기의 내용은 싱겁기 한량없는 것이요, 약간 거짓말을 쓸지라도 따지고 할 사람도 없는 글이라 쓰기는 흥그럽지만 스스로 맥이 빠지는 것이오.
소위 유신지사라 하는 것은 불우의 룸펜들로서, 당년의 집권자인 덕천 막부에 반항하여 이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매 따라서 ‘집권자 타도’와 ‘혁명’의 이야기라, 총독부 당국으로서는 마땅히 쉬쉬하여 금지하여야 할 것이어늘…… 속으로 고소를 하면서, 매 주일에 한 편씩을 써냈소. ('망국인기', 424~425쪽)


작품의 화자는 표면적으로 조선어를 사용하면서도 소설 창작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이었고 유신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본의 막부를 비판하는 것이니 혁명적 서사를 담고 있어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해방 이후 자기변호가 가능한 시기에 창작되었다는 점, ‘일본 정신’으로 일본 국민의 이상적 모델을 형상화함으로써 일본의 문화를 세계적 문화로 양양(昂揚)하는 ‘국책’의 지향을 주제로 한다는 점, 천황의 신민임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천황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작품의 서사와 주인공의 자유주의적 정신보다 국가를 위해 개인의 일생을 봉사(奉仕)한다는 전체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 등 신체제문학의 한 사례로 읽히기에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해방으로 인해 직접적인 규율권력의 압력과 통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억압적 권력의 부재는 도리어 정신적 작용으로 내재하는 생명정치권력의 흔적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김동인이 일제 말기 <매일신보>에 발표했던 논설들은 억압과 강압에 의한 논리가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을 스스로 수용하고 그것이 조선 인민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자기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동화가 아니가 자기화에 가깝다. 그래서 김동인은 일본제국주의의 포함과 배제의 통치술이 스스로의 내면에 고착화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아래의 인용들이 그 증거다.


이배는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이 이렇듯 악전고투할 때에, 조선에 약간의 무력적 실력만 있더라도 일본에 대항하여 일어서면 일본의 굴레를 벗을 길이 생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현황은 그사이 문화 방면에만 주력했더니만치, 무력적으로는 일본 군인의 고함 한 마디만으로 3천만 조선 민족은 질겁을 할 것이다. 그 대신 또한 그 반대로 조선이 일본에 약간의 협력이라도 하면 승리의 아침에는 여덕이 조선에도 흘러 넘어올 것이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본에 협력하자. ('반역자', 410쪽)

지금에 앉아서 생각해보건대 이 모든 일이 하늘의 섭리였다.
조선인의 성격이 본시 느리고 대범한 때문에 20세기 찬란한 문화 세상에 조선을 폭로시키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국제 상 뒤떨어진 나라 노릇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여 하늘은 조선의 지배권을 몇 십 년간 일본에 맡겼다.
빠랑빠랑하고 조밀한 일본으로 조선을 합병해가지고 단시일 사이에 표면만은 세계 수준에 뒤미칠 만한 시설과 예비를 해놓았다. 조선이 그냥 제 나라를 통치했으면 삼사십 년의 짧은 기간 안에 이만한 시설을 도저히 못하였을 것이다. 빠랑빠랑한 일본인의 성질을 가지고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근 40년을 일본의 전력을 기울여서 닦은 결과 조선도 인젠 표면만은 비슷한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학병수첩', 381쪽)

일본의 대정이나 소화 연대에 출생한 우리 사람도 수백만은 될 것이다. 가정에서의 특별한 지도가 없는 이상에는 혹은 시대에 영합하기 위하여 혹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가정에서도 그 자녀를 일본 신민 만들기를 목표로 교육하거나 혹은 그저 방임해두거나 한 아이들은, 소학교에서부터 일본(황국) 신민 되기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라, 근본 사상이 애초에 일본 신민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김덕수', 389쪽)


'반역자'의 주인공 ‘이배’는 이광수를 지칭하며 이 소설은 민족지사였던 이광수가 왜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변호하는 작품이다. 인용된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는 것이 곧 민족의 미래에 “여덕”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는 변론을 하고 있다. 신체제 당시 황국신민화론에 근거한 일그러진 근대 발전론과 다르지 않은 논리이다.

이를 흔히 말하듯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면, '학병수첩'의 일부에서 인용한 문장에서는 “성격이 본시 느린” 조선인 대신 “빠랑빠랑”한 “일본인의 성질” 덕에 “표면만은 비슷한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고 이것이 “하늘의 섭리”였다는 논리는 김동인이 지닌 근대의 초상이 해방 전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김덕수'에서는 일제시절 경찰 간부였던 김덕수라는 인물을 변론해 주는 변호사가 화자로 등장한다. 화자가 김덕수를 변호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식민지 시절의 역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주체성을 몰주체성으로 보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폭력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김동인의 인식은 이 소설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면서 변호의 논리도 등장한다.

물론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저항은 민족문학에 있어 하나의 기본적인 생리와도 같은 것”이라는 백낙청의 논리로 이를 비판하기는 힘들다. 일본제국주의가 내세운 대동아공영론, 신체제론, 황국신민화론 등과 같이 폭력성을 위장한 거짓 이데올로기를 “생리적”43)으로 판단할 수 있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생명정치 권력의 통치술은 이데올로기적 강압이나 명령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과 인민들의 삶의 논리로 내재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국의 요청을 당연히 거절했어야 한다는 당위성의 논리는 역설적으로 당연히 그러한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시대성의 논리로 반박될 수 있는 한계를 지닌다. 김동인의 해방 이후의 문학은 이런 논리 위에서 반복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제국의 지배는 강제적으로만 수행되지 않는다. 제국주의자들이 이식시키는 근대적인 문물과 제도는 봉건 사회의 혁파와 더불어 근대 사회 창조라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창조자적 열성과 매혹적으로 결탁한다.44) 더구나 네이션으로서 국가의 개념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역설적으로 이식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는 것과 민족의 발전에 헌신하는 일이 충분히 양립가능하다는 것이 김동인을 비롯한 당시 전향 문인들 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기 위한 신체제와 근대의 초극은 모순과 양심이라는 강을 건너 착종된 변증법이다. 이 일그러진 근대에 대한 초상이 당대의 집단적 질병이었고 비극적 형식으로 도출된 오답임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는 시대에 서 있다. 때문에 친일문학 비판의 지점에서 예각화된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은 문학의 서사에 있어서의 친일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적 전향을 합리화했던 그들의 정신 작용이다. 그리고 이를 분석하는 데 있어 ‘포함과 배제’의 방식으로 삶의 논리를 스스로 정초하게 한 생명정치 권력의 통치술, 다시 말해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철저하게 수행되었던 인구 관리 기술의 측면과 ‘억압과 죽음’이 아니라 ‘동조와 생명의 보존’을 통해 근대의 이익을 분배하는 셈법의 기술이 지닌 일상적 지배 논리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해방 이후 쓰인 김동인의 소설들은 그의 근대적 초상이 이러한 생명정치 권력의 그물망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Ⅴ. 정상성으로 위장한 제국의 폭력

식민지의 민족은 그들에게 근대 문명을 가져다 준 제국의 언어에 의해서만, 즉 ‘본국’의 문화에 의해서만 자신들의 위상이 결정된다. 식민지의 민족은 ‘본국’의 문화적 가치들을 자기의 가치로 삼을수록 계몽되지 못하고 연약한 국가의 신체로부터는 벗어나겠지만,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피부의 검음, 미개 상태를 부정하면 할수록 그만큼 백인에 가까워”45)지지만, 제국은 어느 한 순간도 식민의 부역자들과 권력을 배분하지 않았다.

스피박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제3세계 하위주체로서의 여성들을 제국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이용한 후, 그들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주체화할 수 없는 혼돈의 영역에 버리는 방식에 주목한 바 있다.46) 스피박이 사용하는 ‘폐제(閉除, foreclosure)’라는 용어는 쓰이고 다시 버려지는 이중적 폭력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일본제국주의가 생사여탈권과 포함과 배제의 방식으로 식민지 지식인들의 삶을 재배치하고, 그 뒤에 자신들을 은폐시키면서 민족을 팔아넘긴 이웃의 배신에 우리의 시선을 고착시킬 때 거기에 이중적 폐제의 논리가 숨어있다.

조선의 문인들은 제국의 팽창주의에 동원된 이후 어떠한 수사로도 자신들을 주체화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오늘날 친일문인들이 어떤 논리로도 그들의 문학과 예술정신을 재정립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국주의에 토착문명의 정보를 제공해주는 ‘토착정보원’들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 확장의 논리와 일본 정신의 주체를 확립하는 ‘대리보충’의 기능을 담당한 후 폐제되는 필연적 운명에 놓여있다. 문학의 고유한 가치와 문학 언어의 민족정신을 거세한 친일문인들이 이와 다르지 않아서, 제국은 결코 그들과 권력을 나누지 않는다. 다만 생명을 유지하는 관리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전락시킬 뿐이다.

이 이중적 폐제에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이 숨어있다. 전향한 식민지의 문인이나 제국의 통제적 권력과 같은 가시적 현상에만 초점을 두게 하는 시도에는 비겁한 인식적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 “다른 형태의 폭력을 시야에서 감추게 함으로써 문제의 진정한 중심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징후”47)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젝의 지적은 여기서도 유효해서, 식민지적 전향을 가능하게 했던 제국주의의 구조적 통치술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제국의 팽창을 위해 비상상태를 식민이 황민이 되는 가능성으로 포장하는 구조적 폭력이 정상적인 상태로 인식되는 자리에 제국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협력 문인- 비협력 문인’의 관계만이 아니라 식민에 내재한 제국의 논리 즉 ‘제국-벌레’의 관계이다. 생명정치권력의 시각에서 김동인을 비롯한 친일문인들의 글을 다시 읽는 일은 그들의 전향만이 아니라 그들을 전향하게 했던 권력의 통치술의 일상성과 폭력성으로도 확장되어야 한다.

 

* 각주

1) 김철, '친일문학론: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 관련하여', <민족문학사연구> 8호, 1995, 24쪽.
2) ‘팔굉일우’는 온 천하가 하나의 집이라는 의미로 일본제국주의 권력의 아시아 침략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대표적 사상이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과 중국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각, 내무성, 문부성 이름으로 <日本精神の發揚·八紘一宇の精神>(國民精神總動員 資料 第4輯)이란 책자를 발행하면서 ‘팔굉일우’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후 다시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내각에서 ‘대동아 신질서’를 ‘기본 국책 요강’으로 채택하고 ‘황국(皇國)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로 하는 건국의 대정신이 기본’이라 선언하면서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은 1940년 9월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를 명시하고,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3) 정창석, <식민지적 전향-식민지와 문학>, 소명출판, 2015, 14쪽.
4) 김동인, '감격과 긴장', <매일신보>, 1942년 1월 23일.
5) 森戶辰男, '평화의 구조', <인문평론>, 1940.5, 67쪽.
6) 朝鮮總督府 警務局 保安課, '朝鮮內に於ける思想轉向の狀況', <高等警察報> 第3號, 10쪽.
7) 旗田巍, <シンポジウム日本と朝鮮>, 勁草書房, 1967, 54쪽. (정창석, 앞의 책, 38쪽에서 재인용.)
8) 김동인, '총동원 태세로 - 決戰下 文壇人의 決意', <매일신보>, 1944년 1월 1일, 4일.
9) 미셸 푸코, <지식의 의지-성의 역사 1>, 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2010, 152쪽.
10) 미셸 푸코, 앞의 책, 153쪽.
11) 김동인, '망국인기', <김동인 단편 전집2>, 가람기획, 2006, 422쪽.
12) 전상숙, '일제군부 파시즘체제와 ‘식민지 파시즘’', <일제 파시즘 지배 정책과 민중생활>, 혜안, 2004, 44~51쪽.
13)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본부 방문기', <삼천리>, 1938.10.
14) 미셸 푸코, 앞의 책, 154쪽.
15) 미셸 푸코, 앞의 책, 46쪽.
16) “생명에 대한 권력의 조직화는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면을 지닌, 이를 테면 해부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며, 개별화하고 종에 특이한 성질을 분류하며, 육체의 수행능력 쪽으로 향하고 생명의 과정 쪽으로 눈을 돌리는 그 광범위한 기술 체계가 고전주의 시대에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이제부터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마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온통 에워싸는 것이 될 것이다.” 미셸 푸코, 위의 책, 156쪽.
17) 미셸 푸코, 앞의 책, 161쪽.
18) 김동인, '총동원 태세로 - 결전하 문단인의 결의', 앞의 책.
19) 김동인, '반도 민중의 황민화', <매일신보>, 1944.1.18.~28.
20) 김동인, '반도 민중의 황민화', 앞의 책.
21) ‘신체제 문학’은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새로운 사회체제인 ‘신체제(新體制)’에 호응하는 문학적 흐름이다. 1930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확장되는 일본제국주의의 전쟁 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의 통치이념을 문학적 실천 정신으로 수용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국책인 식민지 지배정책과 타협했다는 점에서 ‘국책문학(國策文學)’, 또는 제국주의가 내세운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론’을 수용하여 일본의 황민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국민문학(國民文學)’이라고 부를 수 있다.
22) <경성일보>, 1939.10.30.
23) 최재서, '권두언-국책과 문학', <인문평론>, 1940.4, 3쪽.
24) 김동인, '망국인기', 앞의 책, 426쪽.
25) 김동인, '총동원 태세로 - 決戰下 文壇人의 決意', 앞의 글.
26) 김동인의 '일장기의 물결'<( 매일신보>, 1944.1.20.)은 어쩌면 이런 전체주의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일장기의 물결과 만세의 우뢰 가운데서 떠나는 젊은이. 그의 어깨에는 2천 5백만의 신뢰가 기대가 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만 것은 넉넉히 감당할 만한 넓고 튼튼한 어깨로세.”
27) 최재서, '國民文學の 要件', <국민문학>, 1941.11, 35쪽.
28) 이광수,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 <매일신보>, 1940.9.11.
29) 이광수,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 <매일신보>, 1940.9.12.
30) 이광수, '신체제하의 예술의 방향', <삼천리>(영인본), 1941.1, 478쪽.
31) 이광수, '국민문학문제', <신시대>, 1943.2, 45쪽.
32) 좌담회, '신체제하의 조선문학의 진로', <삼천리>(영인본), 1940.12, 394쪽.
33) 김오성, '문학정신의 전환>, <매일신보>, 1940.11.21.
34) 김동환, '신윤리의 수립', <매일신보>, 1940.11.19.
35) 岩谷鐘元(곽종원), '決戰文學の 理念', <국민문학>, 1944.6, 38쪽.
38) 김동인, '반도 민중의 황민화', 앞의 책.
36) 미셸 푸코, <육체의 고백 - 성의 역사 4>, 오생근 옮김, 나남, 2019, 185쪽.
37) 미셸 푸코, 앞의 책, 186쪽.
39) 복종하는 존재의 표상에 대한 설명으로는, 미셸 푸코, 앞의 책, 192쪽.
40) <매일신보>, 1940.10.12.
41) 본 논문에서는 <김동인 단편 전집2>(가람기획, 2006)을 대상으로 인용했다.
42) 일본 낭만파의 일원이었으며 ‘황도문학(皇道文學)의 확립’을 주창한 아사노 아키라[淺野晃]는 1937년 '국민문학의 근본 문제'라는 글에서 국민문학을 창작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자격을 ‘부르주아지 인텔리겐차’로 규정하고, 일본 근대 문학의 빈곤을 초해한 것은 ‘기생적 인텔리겐차에 의한 기생적 문화’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문학론은 한 마디로 “국민 문학은 신민의 문학이다.”로 정의할 수 있다.

“국민 형성 이전 즉 봉건제 이전의 옛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적으로 조금도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달라붙어 날뛰고 있는 지성은 영구히 기생적 지성인 것이다. 급무는 우선 이 기생적인 존재들을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의 극복은 기생적인 것들의 폭로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반드시 그 폭로자로서 민족적 카오스가 깊이 살아나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옛것의 아우프헤벤이 있다. 이 경우 서양적인 것은 그것의 부정적 매개 계기로 작용하면 족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를 자각한다할 때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민중으로서, 계급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기보다는 나아가 민족으로서,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를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적 혹은 개성적, 인민적,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적인 것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래의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선 타이프(type)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타이프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민족적 카오스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淺野晃, '國民文學の 基本問題', <新潮>, 1937.8, 184쪽.)

이 글에서 강조되는 “민족적 카오스”는 일본 민족이 외부 민족의 영향력을 받기 이전의 자연 상태, 즉 순수한 상태의 일본 고유의 것이 응집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타이프”는 일본 민족의 각성과 자강을 하나의 예술적 양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이를 종합하면 자유와 평등 따위의 가치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시민 문학보다 일본의 정신을 회복하고 나라의 운명(팔굉일우의 정신과 가치)에 적극 참여하는 의식을 창조하는 문학으로서의 국민문학의 필요성과 문학적 양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학의 공적 개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시민 사회의 기반이 결여되어 있는 당대의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위로부터 강요되고 조선 지식인 문인들이 지탱한 이 텅 빈 이데올로기를 내적 논리로 발전시켜 나간 국민문학의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43) 백낙청,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현대문학을 보는 시간>, 솔, 1991, 28쪽.
44) 류보선, '친일문학의 역사철학적 맥락', <한국근대문학연구>, 한국근대문학회, 2003.4, 16쪽.
45)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흰 가면>,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2013, 27쪽.
46) 가야트리 스피박, <포스트 식민이성 비판>, 태혜숙·박미선 옮김, 갈무리, 2005.
47)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 외 옮김, 난장이, 2011,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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