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Long Walk(머나먼 여정)’ 낭독회, 세계를 멸망시킨 정의의 시인
이원석 ‘Long Walk(머나먼 여정)’ 낭독회, 세계를 멸망시킨 정의의 시인
  • 배용진 기자
  • 승인 2020.11.19 19:52
  • 댓글 0
  • 조회수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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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 시인 Long Walk 낭독회 현장 [사진 = 배용진 기자]
이원석 시인 Long Walk 낭독회 현장 [사진 = 배용진 기자]

 

발음해봐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그는 미사일이 날아오는 모스크바에서

전화기와 이 세계의 마지막 운명을 들고 있었지

기계와 회로의 정확성보다 자신의 예감을 믿었던 사람

5에는 50으로 대응하는 마음이 아니라

대양을 건너오는 다섯 발의 죽음을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사람

죽음을 나누지 않으리라는

사람의 마음을 믿었던 사람

어쩌면 1983년 9월 26일에 끝나야 하는 날들

그의 손자와 손자의 자손은 유예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

그는 2017년 5월 19일, 자신이 지킨 세계를 두고 떠났다

중령이 잠시 미뤄둔 종말, 정말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았을까

이원석, ‘Long Walk’ 중 일부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는 소련군 중령이다. 1983년 9월 26일 그는 당직 근무 중 미국이 핵 탑재가 예상되는 미사일 다섯 기를 발사했다는 경보를 확인한다. 당시는 냉전 시대였다. 불과 3주 전 소련이 대한항공 항공기를 격추해 미국 하원의원을 포함한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자칫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 있던 순간, 그는 즉각적인 보복 공격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 경보는 추후 소련 정찰 위성의 오작동으로 밝혀진다.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가 다르게 판단했다면 인류는 멸망했을지 모른다. 인류를 살린 그의 속마음을 한 시인이 궁금해한다. “정말 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았을까?”

지난 14일 이원석 시인이 진부책방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시 ‘Long Walk’를 낭독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원석 시인은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데뷔했다. ‘Long walk’는 그가 올해 <문학동네 2020.여름>에 발표한 장시다. 이 시인은 카자흐스탄 사막에 있는 격납고에 구소련의 우주왕복선이 방치된 채 버려져 있다는 기사를 보고 처음 이 시를 구상했다.

‘Long Walk’란 과거 나바호족 원주민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여 약 560Km를 걸었던 행렬을 일컫는 말로 ‘머나먼 여정’이라는 뜻이다. 제목에 걸맞게 시의 분량은 스무 쪽이 넘는다. 시에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등 인류의 멸망을 떠오르게 하는 과거 사건들과 시인이 상상한 미래 세계가 교차해 나온다.

 

낭독하는 이원석 시인 [사진 = 배용진 기자]
낭독하는 이원석 시인 [사진 = 배용진 기자]

 

해가 넘어가 어둠이 깜박인다

달은 무너진 콘크리트 벽 사이로 오간다

날카롭게 부서진 유리조각은

지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잠시 담아두었을 것이다

마지막 밤을 노래하다

동족의 곁에 줄지어 내려놓은 늑대의 무거운 머리처럼

눈을 감은 자동차들의 무덤

쓰러진 가로등 세 번째 트럭의 녹슨 문짝에

푸른색 페인트가 조금 남아있다

우리에 갇힌 곰처럼 강제된 삶을 돌던 버스는

입을 벌리고 피곤한 몸을 옆으로 뉘였는데

돌을 차는 발소리는 깨진 유리창 사이를 뛰어간다

기울어진 간판에는 잊혀진 글자들

부서진 의자 다리를 모아 불을 피우고

무너진 상점 계산대 근처에서 찾은 연초 하나

손에서 손으로 옮겨간다

네온 십자가는 빛을 잃고 떨어져

신과 함께 커다란 망각의 저수지에 잠겨있다

빠진 이를 드러낸 창

어느 하나 열고 들어가 더께 앉은 삶을

고고학자처럼 복원해낼 것이다

주저앉은 침대에서는 주저앉은 잠을

부러진 식탁에서는 부스러진 음식을

메마른 욕조에서 마른 몸을

녹슨 수도를 틀어 귀를 대고

먼 곳에서 희미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를

경전처럼 기억해낼 것이다

닫힌 쇠문을 밀고 기억의 회목을 도는 계단을 내려와

모자이크처럼 타일조각이 떨어진 건물 앞에서

구부러진 이정표를 다시 세워보고는

발을 끄는 길잡이를 앞세워

밤을 건너는 밤

이원석, ‘Long Walk’ 중 일부

 

의자와 책상을 밟고 일어나 낭독하는 이원석 시인 [사진 = 배용진 기자]
이원석 시인이 의자와 책상을 밟고 일어나 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배용진 기자]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가 인류를 구한 건 그른 판단이라는 듯 이원석 시인은 자기 시에서 미래의 인류를 멸망시킨다. 그는 낭독회에서 “세계가 멸망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다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속마음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세상이 망하길 바란다고 말했지만, 낭독회에서 이원석 시인은 밝고 힘 있었다.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이뤄내려는 의욕도 느껴졌다. 스무 명 가까이 모인 이번 낭독회를 기획한 것도 그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이 준비한 ‘Long Walk’ 소책자를 나누어줬고, 낭독하던 중에 의자와 책상을 밟고 일어나는 퍼포먼스도 보여줬다.

​비관적인 말과 달리 실제 이원석 시인은 세상을 좋게 바꾸려고 행동해왔다.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만드는 출판사에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가 있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의 당선작을 당선시집에 싣지 않았다. 원고료를 밝히지 않은 문예지의 청탁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의 SNS에 “누군가는 묻기 부담스러워 그냥 원고를 보내게 될 것이고, 그런 보이지 않는 압력들이 모여 신인 작가들의 권리를 조금씩 무너뜨릴 것이다”라는 의견을 남겼다.

이원석 시인은 2012년과 2017년, 그리고 올해에도 “악당이 너무 많다”라고 자신의 SNS에 글을 남겼다. 한 인터뷰에서도 “악당들을 물리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적 있다. 그렇다면 “세계가 멸망하면 좋겠다”는 말은 ‘악당을 물리치고 싶다’는 바람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그의 시와 행보가 그 뜻을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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