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이례적이지 않은 비등단 시인 이기리의 김수영 문학상 수상
사실은 이례적이지 않은 비등단 시인 이기리의 김수영 문학상 수상
  • 배용진 기자
  • 승인 2020.11.2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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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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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 이기리 시인 [사진 제공 = 민음사]

지난 16일 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수상자는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을 쓴 이기리 시인이다. 김수영 문학상의 상금은 1천만 원이며 수상 시집은 연내에 출간될 예정이다.

1994년 태어나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이기리 시인은 ‘등단’하지 않았다. 김수영 문학상은 1981년 제정되고 2006년부터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시를 응모 받은 이래 올해 처음으로 비등단 시인에게 수여됐다.

심사를 맡은 김언 시인은 심사평에서 “걱정과 염려보다는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더 힘껏 보내고 싶다. 시집 출간과 동시에 시인으로서 첫발을 떼는 이기리 시인이 더 용감하게, 더 힘을 내어, 자기 목소리에 충실한 시 세계를 펼쳐 나가는 데 이 수상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기리 시인의 수상은 ‘등단’이 문학 능력을 증명하는 자격증 역할을 하던 관습에 배치된다. 김수영 문학상을 주관하는 출판사 민음사의 관계자는 뉴스페이퍼와의 취재에서 “사전에 등단/비등단 여부를 알지 못하고 심사한다”라며 “수상자를 선정하고 확인해 보니 비등단자였다”라고 밝혔다.

‘등단’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회적 분야에 처음으로 등장함. 주로 문단(文壇)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을 이른다”이다. 단어 뜻대로라면 일종의 ‘문학장’에 등장한 사람은 누구나 등단한 것이지만, 실제 단어의 쓰임새는 다르다. 신춘문예 등 일정한 제도 절차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등단’했다는 표현이 쓰인다. 곧, 등단 제도를 거쳐야 작가로 인정하겠다는 말과 같다.

위계 만들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신문사, 어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지에 따라 그 안에서도 급은 나누어진다. ‘등단’ 여부에 따라, 또 어디에서 ‘등단’했는지에 따라 인정과 대우, 기회와 평가가 달라지다 보니 작가들에겐 문학 권력이 있는 곳에서 ‘등단’하는 것이 절실하다.

특정 문인의 추천을 통해 곧장 작가가 되는 추천제와 비교해서 등단 제도는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겨졌다. 누구에게나 작품을 응모 받고,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받고 ‘등단’시켜주는 ‘등단 장사’ 문제부터 심사위원이 제자나 지인을 당선시켰다는 ‘문단 내 성폭력’ 운동 와중에 이어진 고발까지, 등단 제도의 객관성과 공정함이 무너졌다는 지적이 나온 지는 오래되었다.

故 황현산 문학평론가는 2016년 <한겨레>에 쓴 칼럼 ‘문단 내 성추행과 등단 비리’에서 “등단·비등단을 칼같이 가르는 등단 제도도 모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열등감 문화의 소산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 뉴스페이퍼가 기획한 간담회 ‘등단 제도와 문예지 시스템, 이대로 괜찮을까?’에서 이소연 문학평론가는 “등단 제도는 처음부터 작가들을 길들인다”라며 “권력의 인정을 받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얻게 하거나 반대로 끊임없이 ‘내가 잘못됐구나’ 하는 자책으로 귀결하게 만든다”라고 지적했다. 웹진 <아는 사람>의 기획자인 한소리 시인은 뉴스페이퍼와의 취재에서 “등단은 한 사람을 인정해주는 타이틀이었다. 그동안은 등단해야 ‘진짜 작가’일 수 있었다”라며 “글을 쓰고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사실 누구나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김누누 시인 시집 <착각물> [사진 제공 = 도서출판 파란]

 

이제 ‘등단’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박규현·최민우 시인 등은 <SI-BOT>, <주간 밤과꿈> 같은 이름으로 직접 구독자를 모집하고 메일로 작품을 전달한다. <아는 사람>, <시대의 사랑> 같은 웹진과 <비릿>, <베개>, <TOYBOX> 등 독립 잡지에 투고해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도 많다. 이런 통로로 시를 발표한 서호준 시인과 김누누 시인은 올해 9월과 11월 각각 시집 <소규모 팬클럽>, <착각물>을 출간했다.

출판사도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문학3>, <에픽> 등 새 문예지에서는 투고받거나 청탁하며 ‘등단’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또한 문학창작기금을 신청받으며 ‘등단’ 대신 ‘창작 활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비등단 시인의 문학상 수상은 이제껏 없던 일이기에 주목받았다. 그러나 ‘등단’이라는 획일화된 검증을 거부하고, 다양한 통로로 활동하는 작가가 증가하는 흐름으로 보았을 때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지난 10일 출간된 시집 <착각물>에서는 저자인 김누누 시인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집을 냈으니까 시인 김누누는 이제 '시인'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그렇긴 한데 시인 김누누는 아직 등단하지 않았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김누누는 앞으로도 영원히 등단하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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