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11 사회적 거리두기, 미적 거리두기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11 사회적 거리두기, 미적 거리두기
  • 김상천
  • 승인 2020.12.31 15:01
  • 댓글 0
  • 조회수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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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사진=한송희

 

전세계적인 코로나 사태 이후, 대면 접촉의 위험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 동의를 얻으먼서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라는 윤리가 일상화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이로 인해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학생들의 등교가 미뤄지는 등 일상의 패턴이 크게 바뀌먼서 생활의 고통을 호소하고 교육문제가 심각해지게 되면서 큰 사회적 우려social concern를 낳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에 실익이 없지도 않다 비대면이 중요해지면서 전자사회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그동안 돌보지 모한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충전의 시간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인류의 끝모를 탐욕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 어떤 것을 반성, 성찰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한 '머뭇거림' 또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로서의 여유있는 시각이 요구된다 머 그대로 대상과의 거리두기다

여기, 거리두기는 서사의 필요충분 조건 중의 하나다 즉 우리가 그것이 사물이든 인물이든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 거리를 우리는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라고 한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일정한 거리 의식을 지녀야 하는 것은 만약 이 거리를 놓칠 경우 맹목에 빠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르고, 때론 괴물이 괴물인지 모르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모하는 것처럼, 대체 개념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1983
 
자, 여기! 우리는 지금 전두환 시절에 쓴 시를 보고 있다 한 아이가 어떤 것을, 그것도 국가에서 만든state-penned 교과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큰 소리로’ 읽는다는 것부터 이 시는 매우 씁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절망적 태도에서 왜 화자가 아이러니하게 비꼬는(‘하급반’, ‘쓸쓸한’)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따라서’ 읽는 현실은 우리가 어떤 교육 현실에 처해 있는지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눈 먼' 독서 교육의 현실이다. 마치 맹인이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상대가 시키는 일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디에게시스로의 자신의 의견이, 내가 생각하는 주체적 판단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주체적으로 재구하면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자기 결정적 삶’으로서의 자기의 공간이 없다는 거, 이거야말로 박제 된 아이들을 양산하는 노예적 기제가, 반인간적 메커니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미적 거리두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나 일이 공정한지 아닌지, 시비를 가리고, 미추를 따지는 주의 깊은 심미적, 비판적 태도는 인간 형성의 기본 요소가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현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공정과 시비와 미추를 따지는 투명한 활동이 철벽처럼 가로막힌 사회를 우리는 ‘닫힌 사회'라 부른다. 닫힌 사회는 진실이 은폐된 사회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진실이 은폐된 사회에서는 ‘거짓 신화’가 판을 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잘 살게 해 주겠다’는 거짓신화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의 저 <동물농장>의 복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거짓 신화에 속아 결국 비극적 삶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만적인 거짓 신화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끝없는 고통과 말 모할 억울함을 당하먼서도
 
“(독재자)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
 
는 ‘이중 사고’(조지 오웰, <1984>)에 길들여지게 된다. 거짓 신화를 조장하는 근대의 경전, 교과서는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배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폴레옹과 그 일당, 돼지들과 그들의 나팔수, 스퀼러들, 괴물 엘리트들이다

그러나,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다행히도 이 시에는 화자의 미적 거리두기로서의 자기 목소리가 박혀 있다 이 봄날 우리들의 책읽기는 쓸쓸하다고...다시 말해 자신은 지금 자신의 페르소나인 또 다른 시적 자아를 통해 우리의 독서교육의 실태는 이렇게 맹목적이고 한심두심하다는 것이다 마지막 연을 별도로 처리한 이유도 여기, 미적 거리두기의 형식적 투사다

그러나 교과서를 통해 국민을 눈 먼 강아지로 만들어 놓는데 크게 이바지한 김준오는 자신의 <시론>(삼지원)에서 이 시에서 화자는 쓸쓸하다고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실패작이라 규정하고 있다 시는 이야기하먼 안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테레스의 모방론에 충실한 코스프레다 이게 그동안 국문과 대학생들의 교과서로, 규범적 가치로, 빨대를 꽂아 지배적 노예 담론을 주입하는데 일조한 것을 생각해 보먼 우리는 지배담론이 교과서적 권위로 을마나 섬세하게 순진한 학생들의 뇌수에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닌게 아니라 해마다 2,000부 이상이 팔리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까지 제정되어 있는 이 책의 부제가 '동일성의 시학'이라니...이건 그대로 국뽕 논리가 아닌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도는 팽이를 반성하는(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죽자' 식의 맹목적이고 그악한 국뽕서사가 하나의 신화로 여기 빠롤의 언어로 일상화되어 나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은밀한 상징폭력을...

그런 그들이 왜 이야기를, 서사를 두려워하는가 서사는 하나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우리들에 의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주인공이 된 대중서사시대, 나 또한 판관으로 내가 그 무엇에 휘둘리지 않고 두 눈 크게 뜬 부엉이로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의 서사전략narrative stratage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얼한 기술 대상에 대한 '미적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다 저 '브리튼 갓 탈렌트'의 독설가 사이먼 코웰처럼 삐딱하게 째려보는 태도로서의 미적 거리두기, 그렇지만 멋진 연기에 대해서는 아낌 없는 박수를 쳐주는, 날카로우먼서도 관대한 그처럼 우리는 미에 대한 좀 주체적이고 대담한 시각을 지녀야 하지 않것는가 

하여 나는 그동안의 모방적이고 맹목적인 전통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에 거리를 둠과 동시에 새로운 거리두기서의 심미적 태도를 개념화하여 '미적 리얼리즘aesthetic realism'으로 부르고자 한다 하나의 생성으로 모사 대상에 대한 기술을 넘어 나의 목소리가, 나의 꿈과 욕망,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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