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0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0
  • 남유연 기자
  • 승인 2021.04.0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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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 여자들은 난생 처음 보는 춤을 췄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중독적인 몸짓과 귀를 사로잡는 ‘아-’하는 소리. 3년 전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사람으로 복작거렸다. 그럼에도 필자는 헤드폰을 기다리는 인파의 긴 줄을 기다리면서까지 정은영 작가의 여성국극을 다룬 영상 작품들을 빠짐없이 보았다. 그 외에도 시간에 대해 고찰한 영상을 만든 구민자 작가, 사회문제와 공동체, 개인의 관계를 조명한 옥인 콜렉티브, 급격한 발전을 이룬 도시 풍경과 과학 기술을 다룬 정재호 작가 등 다양하고 신선한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성숙한 어른들이나 예술 전문가들만이 전시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도 웃으면서 전시장을 뛰어다니고 구경했다. 이 때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가 이루어지는 <올해의 작가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재작년이었다. 작가들의 이야기와 소식들을 따로 찾아보기도 했고, 전시 관련 기사들도 꼼꼼히 읽었다.

올해의 작가상과 그 전시는 SBS 문화재단의 사회 공헌 사업 중 하나로,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운영된다. 2012년부터 이어져온 명망 있는 상이자 전시다. 상을 수상한 네 명의 작가들은 각각 4000만원의 전시 지원금을 받으며, 네 명의 작가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져 방영된다. 전시를 바탕으로 1위를 가려내어 ‘올해의 작가’로 선발하고, 1000만원의 추가 지원도 한다. 미술시장이 서구권이나 중국에 비해 크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공공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공중파에 나간다는 것은 작가에게 엄청난 힘이 된다. 

2018년의 긍정적인 한 번의 기억으로 필자에게 <올해의 작가상>은 꼭 가봐야 할 전시가 되었고, 전에 놓친 전시들이 몇몇 있는 것이 아까웠다. 자발적으로 주변인들에게 알리고 다녔다. 2019년의 전시도 나쁘지 않았고, 복잡하고 거대한 설치물과 다양한 시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의 작가상 2020 전시 포스터.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올해의 작가상 2020 전시 포스터.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가져옴.

전시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재미있고 즐길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에 대해 몰라도 전시가 재미있다면, 최고의 전시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작가들 모두 전부 필자보다 예술에 대해 잘 알 것이다. 게다가 필자와 다른 의견을 가진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필자의 의견을 우기자는 것이 아니니,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이런 점이 같고 저런 점이 다르구나’를 느끼며 함께 예술을 느꼈으면 한다. 어차피 예술은 다양하기에 받아들이기 나름이고, 다르게 받아들인 것들을 함께 나눌 때 꽃 핀다고 생각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 사진 및 텍스트 설치, 2020  정희승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전시실 전경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 사진 및 텍스트 설치, 2020 정희승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전시실 전경

처음은 우아한 시작이었다. 정희승 작가는 사진을 사용하며, 대상을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 속에서 생겨나는 가능성들과 한계들을 고찰했다고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피사체와 잉크로 묻어져 나오는 인화된 이미지의 차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 무엇을 어떻게 촬영하느냐, 어디까지 촬영하느냐, 어떤 크기로 사진을 인화하느냐 등등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작가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다양한 사물들을 조합하여 인물이나 캐릭터처럼 만들어 찍어 놓은 사진에서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전시관 곳곳에 놓인 엽서들이었다. 좁고 기다란 흰색 책장들에는 엽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는데, 알쏭달쏭한 시와 같은 구절들이 적혀 있었다. 이 엽서의 글자들은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글자로 그림을 그린 듯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관객들이 직접 엽서를 고르고, 손으로 뽑아야만 엽서 위의 글자들이 읽히고,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동동다리거리, 문, 물, 놀이, 노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동동다리거리, 문, 물, 놀이, 노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다음 전시는 이슬기 작가의 전시로 이어졌다. 한옥의 창살들이 그림자를 드리운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 전시실의 천장까지도 창살 모형이라서, 전시실 전체가 하나의 작품인 듯했다. 작가가 직접 모은 듯한 여러 나라의 다양한 강물들이 담긴 유리 병 목걸이가 신기했다. 물에 섞인 불순물들이 작품의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벽을 장식한 작품은 장식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동동다리거리
동동다리거리

조용하기만할 것 같은 전시장에서 동양풍의 핀볼 게임(?)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막대기를 사용해 쇠구슬을 굴려 오목한 홈에 넣는 것은 전통놀이 같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적어 적막하고 작품의 수가 많지 않아 텅 비어보이는 전시관 안에 쇠구슬들이 굴러가는 ‘딱, 딱’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아이들이 부모님들과 함께 게임을 하기도 했다. 필자도 처음 보는 한 어린 친구와 말없이 함께 게임을 즐겼다. 작품과도, 다른 관객과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은은한 빛이 드는 창살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전시실에 빈 공간이 많아 그 빈 공간이 어떠한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각 나라의 강물들의 수집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알기 힘들었다. 

그렇게 작품에 대해 알기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디스플레이와 작품 설명에 큰 애로사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설명은 옅은 회색 벽에 조금 더 옅은 회색으로 작게 쓰여 있어 어떤 작품에 대한 설명인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알더라도 읽기 힘들었다. 의자 하나를 가져다놓고서도 예술이 될 수 있는 현대 사회다. 작품의 외양적인 모습 뿐 아니라 작품 활동의 동기와 작품에 담긴 의미, 관념, 생각도 중요한 것이 현대 미술이다. 흐릿한 회색 글씨는 안 그래도 알기 힘든 현대 미술을 더 알기 힘들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1.안녕하세요 2.Hello, 혼합매체 조각 및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1.안녕하세요 2.Hello, 혼합매체 조각 및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이어진 김민애 작가의 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작품에 대한 설명이 한쪽 벽면에 쓰여 있었고, 역시 글씨들은 벽과 비슷한 색으로 적혀 있었다. 작품을 감상하다가 작품에 대해서 더 잘 알고자 하면 작품 설명을 읽기 위해 그 벽면 앞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처음에는 작품과 설명을 매치시키기 위해 전시장 내부를 왔다갔다했으나 설명이 쓰인 벽과 작품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이상 그런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결과, 작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멍만 때리게 되었다. 작품이 뿜어내는 흥미를 떨어뜨리는 설명 방식이다. 그러한 흐릿한 설명이 설명을 흐릿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의 일부라면... 할 말은 없다.

1.안녕하세요 2.Hello, 혼합매체 조각 및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1.안녕하세요 2.Hello, 혼합매체 조각 및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하고나서야 작품이 품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김민애 작가는 개인이 사회 속에서 맞닥뜨리는 모순들을 건축, 설치를 통해 표현했다. 작품들은 구조와 제도, 틀 자체를 비트는 시도를 했다. 그제야 작품의 내용들이 이해가 갔다. 하얀 박스형 구조물에 달려있는 손잡이는 문을 여는 손잡이가 아니었다. ‘손잡이=문을 여는 것’이라는 사고의 틀을 깬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터지기 위해 존재하는 미사일들이 터지지 않고 세로로 서 있는 광경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미사일이 터지기 0.00001초 전의 긴장감을 자아낸다. 또,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 즐거운 스포츠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인조 잔디 위에 놓인 작은 미사일들은 모순을 드러낸다. 

그렇게 홈페이지를 뒤지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관객이 직접 검색에 나서야 작품 감상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온라인 전시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과연 실제 작품들과 만나는 ‘전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러 의문이 드는 전시였다.

내일, 다큐멘터리 영화 및 영상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내일, 다큐멘터리 영화 및 영상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지금까지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못하는 디스플레이 측면에서의 결점들을 만나봤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 이어진 정윤석 작가의 <내일> 전시에서는 내용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섹스돌을 소재로, 공장에서 섹스돌 생산과정과 공장 노동자들을 찍은 사진들, 그리고 섹스돌과 함께 사는 남자의 삶에 대한 다큐. 전시에 걸려 있는 사진 작품들은 노골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왜곡한 실리콘 인형들을 성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인체와 흡사한 인형들은 신체가 훼손되고 절단되어 있었다. 인간 여성의 신체를 연상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형태의 인형들은 완전히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남의 손에 신체를 맡기고, 훼손되고 있었다. 무서운 장면들이었다. 

폭력에 대한 작품 감상은 어렵다. 과연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폭력이 ‘폭력을 비판’하고자 폭력을 보여주는 것인지, 그저 ‘폭력을 전시’하는 것인지 잘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폭력을 단순히 보여주느냐, 비판하기 위해 보여줄 수밖에 없었느냐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렸다. 작가가 비판적 시선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관객이 아무리 봐도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비판이 아니고, 작가는 관객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못한 것이다. 

내일, 다큐멘터리 영화 및 영상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내일, 다큐멘터리 영화 및 영상 설치, 2020. 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여성을 연상시키는 인형들이 타인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장면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 장면들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현대사회의 가해자들을 고발하는 것으로 연출된다면 현실 비판일 수 있다. 우리가 곧 만날 미래 사회에 대한 무서운 경고일 수 있다. 그러나 인형의 성기에 손을 집어넣는 사진은 작품에 대한 옹호를 어렵게 만든다. 그 외의 사진들에서도 작품들에서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철저히 가해자가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로 찍혀진 사진들. 인형일지라도 여성의 신체와 아주 유사한 섹스돌을 주무르고 마음대로 다루는 연출들. 이것이 폭력 전시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질는지 알 수 없다. 만약 그것이 훌륭히 해소되었다면, 이 전시는 더 도발적이고 도전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닮은 인간의 대체물을 만들거나 소비, 혹은 이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들이 선택하는 삶의 모습들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작가와 미술관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진심일거라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성찰적이고 비판적이며 깊은 고찰이 담겼을지라도 관객들에게 그렇게 읽히지 못한다면, 의도 전달에 미흡함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정말 이 전시가 ‘인간’에 대한 전시라면, 어째서 여성의 신체를 본 딴 섹스돌만 전시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또, 섹스돌은 여성형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실제 인간이 아니고 인형일 뿐이므로 이런 전시 내용이 여성 혐오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전시된 섹스돌들은 여성 형태였고, 뇌에는 연상 기능이 있기 때문에 섹스돌의 형태를 보면 실제 여성의 신체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성적인 학대를 연상케 하는 여성형 섹스돌 사진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섹스돌과 함께 사는 남성의 외로움을 나란히 담은 다큐를 보자면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하게 된다. 착취당하는 여성의 신체와 착취하는 남성의 외로움이 과연 동급으로 취급될 수 있을까? 

사실 이미 올해의 작가상이 시작할 때부터 여성 혐오로 논란이 된 작품이어서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갔음에도, ‘올해의 작가상’ 자체에도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내놓은 응답만으로는 여성 혐오라는 타이틀을 떼기 어려울 것 같다. 게다가 성인만 출입 가능한 다른 전시는 사진을 찍는 것이 허용되었었는데, 어째서 유독 이 전시장만 사진 촬영이 금지인지 알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필자에게 ‘올해의 작가상’은 가장 좋아하는 전시 중 하나에서, 그저 그런 전시가 되었다. 어쩌면 다시는 끌리지 못할 전시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친한 친구 하나를 잃은 느낌이다. 물론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쾌적한 환경과 접근성, 많은 전시관들을 생각해본다면 꾸준히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관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새로운 시선, 신기한 체험,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직관적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전시를 통해 부활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올해의 작가상을 예전처럼 사랑하기 힘들 것 같다. 미술과 전시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년의 전시를 기다려본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Pratt Institute painting 재학 중 

남유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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