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동(靜中動)의 낙원, 뮤지엄 산
정중동(靜中動)의 낙원, 뮤지엄 산
  • 남유연
  • 승인 2021.08.3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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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 산의 야외 풍경.조각 아래를 걸어가며 조각의 360도를 전부 관찰하는 것이 감상포인트.정지되어 있는 조각이지만 시선에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뮤지엄 산의 야외 풍경.조각 아래를 걸어가며 조각의 360도를 전부 관찰하는 것이 감상포인트.정지되어 있는 조각이지만 시선에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낙원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물과 산이 일렁이는 곳, 구름과 돌이 서로 다정한 곳. 하늘은 높은 곳에서 흐르고 웃음소리는 낮게 깔린다. 바람과 햇살이 번갈아 피부를 어루만진다. 낙원에 가까운 미술관, ‘뮤지엄 산’에 다녀왔다. 

미술관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다. 강원도 원주에 도착해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30분, 산 위에 있는 뮤지엄 산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보고는 마음 속도 험난했다. 전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어 있는데, 기본관과 명상관, 설치 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전시까지 모두 관람하면 일반 성인이 39,000원. 그럼에도 외국의 유명 미술관들도 입장료가 3만원씩은 되는 점을 고려하여 흔쾌히 입장료를 냈다.

한국의 기후가 열대 기후로 바뀌어 버린 탓에 야외 공원에는 태양이 작렬하고 있었다. 미술관에는 공공 우산이 비치되어 있어 양산으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조각정원과 플라워가든.
조각정원과 플라워가든

‘눈을 떠라.’ 

태양 아래에서 조각 공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을 뜬다는 것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눈과 가까이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도시 풍경 속에 녹아버린 사람들은 멀리 펼쳐진 산을 보지 못한다. 근경(近景)만 보고 원경(遠景)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다. 

조각 공원은 ‘멀리 보게’ 해주고 있었다. 넓은 공원의 저 멀리, 걸어가볼 수 없는 곳에 거대한 붉은 강철 조각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조각 작업에 크레인을 사용했다는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작품은 어찌나 멀리 있는지, 옆에 선다면 정확히 크기가 어떠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조각 뒤에 수묵화처럼 펼쳐진 검푸른 산이 작품과 어우러졌다. 거대한 인공의 조각은 더 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산 속에 폭 안겨 있었다. 길가에서 자라고 있는 꽃들은 멀리 보는 만큼 자세히도 봐야한다고 말하며 진홍빛 입술로 조잘댔다.

자작나무 길
자작나무 길
호수와 호수에 비친 하늘과 나무
호수와 호수에 비친 하늘과 나무

조금씩 휘어지는 길을 걸으면 자작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된다. 희귀식물들이 화단에 심겨져 있어 새로운 꽃들과 잎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여러 목소리의 매미가 우는 숲을 한 차례 지나면 물이 보인다. 딱딱한 콘크리트 호수인데, 물 아래에 가득 깔린 것은 둥그런 검은 자갈들이다.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들이 만나 서로를 포옹한다. 물 속의 정적인 자갈들은 흘러가는 구름을 품은 호숫물 덕에 끊임없이 일렁이고 움직인다. 단단한 건물과 조각은 굳건하다. 물 위에 비치는 나무들과 관목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고요한 가운데 멈춘 것은 하나도 없이 운동한다. 정중동(靜中動), 조용한 가운데에 움직임이 있는 상태. 따끈해 보이는 풍경이다. 

“처음 부지를 보았을 때, 가늘고 길게 이어진 산 정상을 깎은 듯한, 아주 보기 드문 땅이었기에, 여기에 주위와는 동떨어진 별천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건물 본체뿐만 아니라, 부지 전체를 Museum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여기에 와서 하루를 보내면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곳 말입니다. 그런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안도 다다오
안도 다다오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뮤지엄 산을 건축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말이다. 아마 그는 충분히 원하던 바를 이룬 것 같다. 

일본 출신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한 번도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않은, 건축계의 괴짜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거장이다. 흥미로운 동선을 설계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도 인기가 많은데 뮤지엄 산은 일자로 쭉 늘어선 동선을 갖고 있다. 티켓 데스크를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안도는 노출 콘크리트 방식을 대중화시킨 건축가이며, 뮤지엄 산 또한 콘크리트와 자연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숭고미와 안정감을 동시에 준다. 고요한 물과 자연광의 사용으로 유명하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인터넷으로만 보다가 실제로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컴퓨터 화면 위의 공허한 픽셀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경건함을 느꼈다. 발바닥에 닿는 돌 바닥의 울퉁불퉁한 질감과 햇살의 따가움, 바람의 촉감. 사락대는 잎 소리, 계단 호수를 한 칸 씩 내려가며 노래하는 물소리. 흘러가는 구름 때문에 떠가는 듯한 착시를 주는 건물들. 직접 가서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그의 건축에 담겨 있었다. 사람을 품는 거대한 크기의 예술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압도감을 느꼈다. 

메인 전시관 건물에 들어왔지만 명상관에서의 명상은 시간이 정해진 프로그램이었으므로 일단 건물을 지나쳐 명상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은 명상 이후에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명상관 외부.
명상관 외부

뮤지엄산 개관 5주년을 기념해 안도 다다오가 새로이 건축한 명상관에서 진행되는 명상은 두 가지였다. (두 가지 다 해보려면 13,000원을 추가해야 한다.) 율동을 하는 쉼 명상과 싱잉볼이라는 악기의 연주를 들으며 휴식하는 명상 중에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우리나라 고분에 영감을 받아 안도 타다오가 돌로 만든 둥그런 명상관 건물의 안은 서늘했다. 고분, 그러니까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둑했지만 공간 안은 어둡지 않았다. 조명이 없는데도 건물의 천장에 일자로 죽 그어진 얇고 긴 창문만으로도 실내 전체가 밝았다. 산 채로 무덤 안에 들어와 평화로운 죽음을 체험해보는 기분이었다. 설명에 따라 싱잉볼 연주를 들으며 몸을 이완하고… 이완의 결과로 푹 자다 나왔다. 숙면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생각했는데, 잠들지 않았던 동행인들에게 들어보니 명상 시간 동안 흘러나왔던 싱잉볼 연주는 라이브 악기 연주가 아니라 녹음본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진짜 싱잉볼 연주임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실망이었다. 건물 안은 가볼 만하지만, 결국 싱잉볼 명상은 추천하지 않는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라이브 악기를 보여주고는 눈을 감은 동안 흐르는 녹음본이라니… 관람객 배신이 아닌가.

다행히 찝찝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제임스 터렐의 환상적인 설치 작품을 체험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터렐 [출처 = 제임스 터렐 아티스트 웹사이트]
제임스 터렐 [출처 = 제임스 터렐 아티스트 웹사이트]

제임스 터렐은 1943년생의 설치 작가로, 빛을 재료로 삼아 공간 속에 환영을 창조한다. 공간을 이용하는 작가이기에 공간을 역동적으로 그려내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과 터렐의 작품이 만났을 때, 그 시너지는 더욱 폭발적이었다. 터렐은 퀘이커교 신자인 부모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퀘이커교는 개신교의 한 분파로서 교리보다 ‘내면의 빛’을 중시하며, 침묵과 명상만으로 예배를 드린다. 설교, 성경, 찬송, 성직자, 선교사 없이 오직 명상을 통해 성령, 즉 내면의 빛을 만난다. 개신교에 대한 우리의 스테레오타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각종 분란을 일으키기도 하는 일부 종교 집단 때문에 많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종교는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기반으로 예술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종교, 영혼, 예술은 역사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절에서 행사를 할 때 야외에 걸어두는 거대한 괘불탱화, 끝없이 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천장이 아름다운 이슬람의 사원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고딕 성당은 모두 영혼의 지향점을 제시했던 종교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이러한 예술들은 삶을 뛰어넘는 초월적이고 극단적인 선(善)과 아름다움, 영원을 위한 예술이었고, 정신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종교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분에서 영감을 얻은 안도 다다오의 명상관 안에서 죽음의 고요함을 체험하고, 제임스 터렐의 작품 속에서는 죽음 너머의 빛을 생각할 수 있었다.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Florian Holzherr]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Florian Holzherr]

첫번째 마주한 작품은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이었다. 돔 천장 가운데의 둥그런 구멍을 바라보았다. 구멍 사이로 보이는 것은 하늘뿐이어서 하늘이 하나의 움직이는 미술 작품이 된다. 과연 구멍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천장의 ‘없음’을 통해서 그 너머에 ‘있는’ 하늘을 불러오는 구멍의 모순적인 힘을 느끼면서 구름의 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똑같은 형태가 되지 못하는 구름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시공간을 살아가는 생명들의 모습을 빨리감기로 보여주는 듯했다. 치열하게 죽어가고 부활하는 생과 사의 영원한 순환이 하늘 캔버스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호라이즌룸에서 나와서 본 밖의 풍경
호라이즌룸에서 나와서 본 밖의 풍경

두번째 작품은 호라이즌룸(Horizon Room)이었다. 스카이스페이스처럼 뻥 뚫린 사각형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설치된 계단을 타고 지평선 너머로, 사각형 너머로 나갈 수 있었다. 그 곳에서는 미술관 전체를 둘러싼 산세를 볼 수 있었다. 스카이스페이스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던 세계가 실제로는 현실과 멀지 않음을 알려주는 듯했다. 조금 더 현실을 생각하자면, 산 아래 보이는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잘려나갔을 나무들이 생각나 안타까웠다. 

간츠펠트(Ganzfeld) [출처 = 가디언지(온라인)]
간츠펠트(Ganzfeld) [출처 = 가디언지(온라인)]

세번째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라는 독일어 제목을 가진 작품으로, 한국어로는 ‘완전한 영역’이라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있는 방에 들어서면 빛나는 사각형이 벽에 보인다. 사각형은 비밀을 품고 있다. 눈을 완전히 속이는 그 비밀은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비밀에 대한 힌트를 조금 드리자면, 1930년대 독일 심리학자 볼프강 메츠거(Wolfgang Metzger)는 간츠펠트 효과라는 것을 규명했다. 간츠펠트 효과는 인간이 감각을 박탈당했을 때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 현상을 가리킨다. 외부 자극이 완전히 사라지면 뇌는 어떻게 해서든 작동하기 위해 거짓 신호를 만들어내서라도 완전한 감각 박탈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다. 간츠펠트 효과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은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다가 결국 기억력과 집중력, 언어구사력이 떨어졌고 실험자들에게 완전 복종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마 감각을 속이고 뇌를 가리는 간츠펠트 작품을 열 시간 넘게 감상한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웨지워크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Florian Holzherr]
웨지워크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Florian Holzherr]

네 번째 작품 웨지워크(Wedgework) 또한 간츠펠트처럼 빛을 이용해 인간의 지각을 혼란시키는 흥미로운 설치 작품이다. 퀘이커교의 사람들이 말하는 내면의 빛이란 이렇게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둥둥 떠 있는 빛일까? 적어도 터렐은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어둠 속에서의 빛을 이용한 작품이라 작품을 보기 위해 빛이 완전히 차단한 복도를 걸어야 했는데, 그 순간도 색달랐다. 

아쉽게도 촬영금지라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으나 사진을 찍지 않고 작품 감상에만 온전히 모든 정신과 감각을 쏟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조각 공원의 조각
조각 공원의 조각

 

메인 전시관에서 내려다본 조각 공원
메인 전시관에서 내려다본 조각 공원

명상관과 제임스 터렐관 주변에는 고분을 닮은 조형물들과 그 사이의 조각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가공하지 않은 거칠지만 따뜻한 돌바닥과 같은 돌로 만들어진 고분들이 어우러졌다.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돌‘고분’들 옆에 나무들이 푸르게 흔들리는 광경은 장관이다. 돌과 나무라는 자연과 조각이 어우러진다. 뜨거운 여름날이라 정원을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한국에 사계절이 있어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나,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을 맞은 뮤지엄 산에 반드시 다시 돌아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카페의 야외 테라스
카페의 야외 테라스

코코넛 아이스크림이 맛있는 카페가 있다. 찌는 듯한 더위에도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있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보는 원경의 산과 근경의 계단식 호수, 바람과 나무는 정중동의 낙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다소 충격적인 커피 가격은 자릿값으로 생각하면 납득할 만하다.

전시관의 그림들은 서울의 미술관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하고 독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전시가 작품만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전시관과 다음 전시관을 잇는 건물 안은 미로와 같아 걸어다니는 재미가 있다.

미로 같은 건물 내부의 모습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미로 같은 건물 내부의 모습 [출처 = 뮤지엄 산 웹사이트]

이렇게 완벽히 미로 같은 건물, ‘안티아키텍토닉’한 건물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건축에는 아키텍토닉(Architectonic)과 안티아키텍토닉(Anti-Architectonic)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전적 정의로 아키텍토닉은 ‘건축물의 틀을 제시하는’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사람이 건물의 안에서 돌아다녀봤을 때 건축물의 구조와 겉면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건축은 아키텍토닉한 건축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는 아키텍토닉하다. 집집마다 다녀보고 복도와 계단을 왔다갔다해보고, 창 밖을 내다보고 해보면 대강 건축물 외곽이 어떻게 생겼는지, 건물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안티아키텍토닉은 그 반대이다. 아무리 건물을 돌아다녀봐도 실제 건물의 구조나 외곽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안티아키텍토닉이다. 

안도 다다오의 뮤지엄 산이 바로 안티아키텍토닉의 전형이었다. 다음 코너를 돌면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모험을 선사한다. 새로움 위에 또다른 새로움을 쌓아서 의외성을 선물한다. 건물의 가장 안쪽에 야외가 있는 공간도 있었다. 거대한 통유리로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는 휴식공간도 있었다. 실외와 실내가 어우러지고, 단단한 건물의 정(靜)과 끊임없이 눈을 움직이게 만드는 야외와 역동적인 건물의 구조가 가진 동(動)이 어우러진다.

 

전시관 안의 모습
전시관 안의 모습

미술관에서 미술품 얘기가 빠지면 섭섭하다. 전시된 작품들은 전부 한국 작가의 작품들로, 동양적인 건물과 잘 어울렸다.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진행되는 <기세와 여운> 전시를 보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김창열 작가의 작품이었다.

나는 작품에서, 아니 나와 동행한 이들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작품 속 그림이 당연히 물방울이라고 생각했다.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화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행인들은 그 작품에 등장하는 것이 촛불 같다고 말했다. 물방울의 그림자는 촛대로, 물방울에 비치는 빛은 불로, 물에 젖은 듯한 캔버스 표현은 촛불의 그을음 같다는 감상평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물방울은 이미 초가 되어 있었다. 알고 있던 지식이 인간의 지각에 큰 제한을 준다는 것, 더 느낄 수 있는 것들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아는 것에 매몰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LF89003-1989" 김창열
"LF89003-1989" 김창열

다음은 한국미술의 산책: 구상회화> 전시였다. 현실의 사물을 그린 ‘구상화’가 주를 이루는 공간으로, 박수근, 이중섭, 이쾌대 등 유명 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종이 박물관
종이 박물관

뮤지엄 산은 제지 기업 한솔에서 만든 미술관이라 종이 박물관이 있었다. 종이 박물관에 다다랐을 때에는 다섯 시간이 넘는 미술관 관람으로 녹초가 되어있었다. 종이 박물관은 종이의 제작 과정과 역사 등을 다루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종이로 만든 각종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반짇고리, 작은 서랍장, 그리고 베개까지 있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손쉽게 만들어내는 것들이 예전에는 종이에 한 장 한 장 풀을 먹여가며 만든 것들이라니.

종이로 만든 호랑이 모양 베개
종이로 만든 호랑이 모양 베개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형 판화 교실이 있는 것은 흥미로웠다. 판화는 워낙 다양한 판화의 종류가 있어 어려운 분야인만큼 대중과 가깝기 힘들다. 그러나 뮤지엄 산에서는 판화를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기다란 뮤지엄 산의 안과 밖을 모두 즐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길은 또 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나가는 길이었지만 오후의 야외 정원은 더 많은 사람들로 복작이고 있어 마음이 허전하지 않았다. 

나가는 길
나가는 길

무릉도원에 한 시간 머무르면 현실에서는 몇 십 년도 넘는 시간이 가버리듯, 뮤지엄 산에 머문 순간은 찰나 같았지만 현실에서는 여섯 시간이나 지나가 버렸다. 고요히 옹크린 돌들 사이로 물과 나무, 인간이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정중동(靜中動)의 낙원, 뮤지엄 산은 반드시 가야할 미술관이다. 독자분들과 다음 계절에 뮤지엄 산에서 만나 뵙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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