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인쇄 시대를 만든 판화 기술 이야기
사진 인쇄 시대를 만든 판화 기술 이야기
  • 공병훈
  • 승인 2021.10.2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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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와는 달리 판화(版畫)는 간접적으로 모양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장르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진 기술이 2천년에 가까운 판화와 인쇄 관련 기술에 기반하며 수많은 수많은 기술자와 발명가들의 오랜 노력의 축적으로 개발되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조선의 고대 국가 시절에 사용되던 목판 인쇄와 목판화가 중세의 서양에 전해지면서 구텐베르크 인쇄 기술과 결합된다. 그림을 효율적이고 실재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동판화(銅版畫) 기술로 이어진 후 동판화 기술은 실물과 풍경을 실제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묘사하는 수준을 거쳐 사진제판 기술의 발명으로 이어집니다. 이 글은 매우 길고 험난했던 파노라마 같은 과정을 탐험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쓰여졌다.

중세 인쇄의 놀라운 성과, 판화(printmaking, 版畵)
판화는 목판·동판·석판 등에 형상을 새긴 뒤 그 위에 잉크를 입혀 종이·천·양피지·플라스틱 등에 찍어낸 것이다. 초기의 판화는 비싼 가격을 주어야 살 수 있었던 책이나 회화 작품을 복제하여 보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판화는 복제품처럼 취급되어 미술 작품에 비해 소극적으로 평가되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 화가들이 도구, 재료, 인쇄법 등으로 구성된 판화의 기법에 따라 매우 독특한 질감과 효과를 내는 특수성에 매료되기까지 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나무를 판으로 이용하여 이미지를 새겨 파내지 않은 부분이 인쇄되는 볼록판 인쇄(凸版印刷) 방식이다. 인쇄될 형상 부분은 남겨주고 바탕이 될 만한 부분을 깎아내어 볼록한 부분에 잉크를 입혀 종이 등에 인쇄한다. 명암 대조가 뚜렷한 특징이 있다. 판화는 중국, 조선, 일본의 책들에서 매우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던 방식으로서 책이나 회화 작품의 보급을 위한 복제 수단이었다.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16년에 걸쳐 완성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볼록판 인쇄를 위해 나무를 판으로 한자를 새겨 만든 것이었다.

고려 고종 23년(1236)부터 16년에 걸쳐 완성한 판화 원리의 인쇄판으로서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유럽에는 1,400년대에 목판화가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중세와 근세에 책과 인쇄물에 그림이나 광고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판화 기법 덕분이었다. 유럽에서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판화로는 1423년에 제작된 <성 크리스토프>(St. Christoph)로서 독일의 카르투시오(Carthusio)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고독과 기도 생활을 통해 “하느님과의 합일”을 지향하던 독일 쾰른의 성 브루노(San Bruno, 1030~1101)에 의해 1084년 연중내내 눈 덮인 프랑스 알프스산 중턱에 프랑스 알프스 지대의 샤르트뢰즈(Chartreuse)에 설립되었다. 봉쇄 수도회 가운데 가정 엄격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은수자(隱修者)로서의 삶과 수도자로서의 삶을 추구한다. 이 수도회에는 “세상은 돌지만, 십자가는 우뚝하다.”(Stat crux dum volvitur orbis)라고 씌여져 있다. 
외부 방문객은 일절 받지 않으며 일주일에 한 번 하는 4시간의 산책 중에만 대화가 허락되는, 가톨릭 수도회 중 가장 엄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사들은 청빈·정결·순종·침묵을 서원하며 동료와 함께 노동과 관상기도의 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고독과 철저한 가난한 생활을 한다. 수도사들의 은수자적 전통은 4세기에서부터 6세기까지 주로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시리아 지방에서의 나타난 형태이다. 은수생활의 초기에 훌륭한 독수도자들은 대개 한두 제자들을 받아들여 자기 토굴이나 움막집에서 함께 지내는 일이 많았다. 이것이 점차 독수도자들의 취락(聚落) 같은 것으로 발달하였다. 당시 광야와 산속에 혼자 지내던 전통은 공동체 생활로 이어지면서 10세기 이후의 봉쇄적인 수도회들이 생겨났다.
유럽에서 14세기 경에 목판화가 출현하고 이어 15세기 전반에 동판화가 탄생한다. 초기 목판화는 성지순례기념품으로서의 성서 제재나 성상(聖像)을 담았고 부적, 게임카드, 책의 삽화 등에 사용되었다. 중세시대에 이 수도회 수도사들은 성서를 써서 제작하는 일을 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화인 <성 크리스토퍼>(St. Christoph)가 카르투시오 수도원 남아 있는 것은 성경 필경 작업과 관련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설에 의하면, 크리스토프는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거인이었다. 레프로부스였으며 가나안 출신의 거인으로,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을 섬기면서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그는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주인으로 알고 섬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한 왕을 섬겼으나 그 왕이 악마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떠났다. 레프로부스는 악마를 찾아가 섬기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십자가를 피하는 것을 보고 악마가 누군가 좀 더 힘센 존재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마귀는 예수를 겁내기 때문에 예수가 최고 힘센 장사일 거라고만 추측하였다고 한다.
그후  외딴곳에 혼자 사는 수도사를 만나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해 설교를 듣게 되었다. 이 수도사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며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라 레프로부스는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고 가지 못하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을 자기 어깨에 올려 태우고 건네주는 일을 하였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판화. <성 크리스토프>(St. Christoph)의 전설을 담고 있다.

폭풍이 치며 어둡던 어느 날 작은 어린이가 강을 건너려고 나타났다. 크리스토퍼는 어린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가 강을 건너려고 한걸음씩 내딛으며 물 속으로 들어갈수록 폭풍은 더 거세어졌고 아이는 점점 더 무거워서져, 크리스토퍼는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레프로부스는 마치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으나 레프로부스는 강 반대편 기슭으로 지팡이를 뻗어 겨우 버틸 수 있었다. 
한 번도 없던 일이라 그는 “이상한 일인데” 하고  중얼거리는데, 그 어린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혔고 그 순간 뭍에 닿은 레프로부스의 지팡이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고 땅에 뿌리를 내려 종려나무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힘이 드러났다. 이후 레프로부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고가는 사람을 뜻하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크리스토포로스(Christophoros)는 원래 희랍어로서,”그리스도를 어깨에 메고 간다”는 뜻이다. 450년경에 칼체돈에서는 성 크리스토퍼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워졌고 순례자와 여행자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받게 된다.

독일의 르네상스 이상을 대표하는 알브레히트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는 독일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판화가로서 북유럽의 레오나르드,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자신에 재한 매력에 흠뻑 빠져서인지 수많은 자화상을 연대별로 남겨왔으며 심지어 미술사 최초로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그리는 등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 이상을 구현하였으며 새로운 기술에 몰두하였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촉발된 인쇄물 유통망을 활용해 자신의 작품을 유럽 전역에 판매한 최초의 화가였다.
중세의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은 후원자나 황제를 위한 것었다. 하지만 뒤러는 판매를 목적으로 판화와 그림을 그렸다. 사업가였으며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르네상스 시기 독일의 박람회와 강을 통한 무역 경로를 통해 그림을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그는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함께 독일은 물론 해외까지 여행하며 판화를 판매하며 명성을 떨쳤다.
뒤러는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1484년 13세와 14세 때 그린 동판화 자화상과 동판화 <음악의 천사들과 성모>가 전해온다. 1486년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의 문하생이 되어 화가의 길로 본격 들어서고 3년을 보낸 뒤 한동안 여행을 한다. 뒤러는 여행중에 스위스 바젤에서 <사자를 치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Curing ihe Lion)>를 제작했다.  

1498년의 <<>요한계시록>에 실린 뒤러의 목판화 <계시록의 네 기사>

1498년 주요 화가가 삽화를 그려 인쇄한 최초의 책인 <요한계시록>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뒤러의 <요한계시록의 4인의 기수>를 비롯한 목판화 열다섯 점이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중세 유럽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흑사병이 퍼지던 시기였다. 흑사병은 14세기 중반, 그러니까 1347년 무렵 킵차크(Kipchak) 군대가 제노바 시를 향해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쏘아 보냄으로써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동방 원정에 나섰던 십자군 병사들이 보석과 동방 문화를 약탈해 오면서 부수입으로 한센씨병(나병)과 흑사병을 얻어 왔다는 것이 설도 있다. 그때부터 흑사병은 수년 동안 시칠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유럽 중부의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을 거쳐 벨기에, 네덜란드로, 그리고 처음 선보인 지 고작 3년여 만에 스칸디나비아 국가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1500년을 세상의 종말로 생각하며 불안해하던 터라 책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뒤러는 숙련공에게 많은 자본을 투자해서 목판을 제작하고 직접 책을 출간하였다. 지금이나 당시나 요한계시록은 흥행작이었다. 이 판화로 뒤러는 남은 평생 쓸 돈을 벌어들였다고 전해진다. 뒤러는 많은 양의 판화를 가지고 일기에 누구에게 주고 교환하고 팔았는지, 얼마에 대해 썼는지 기록했다. 이것은 인쇄물에 표시된 금전적 가치에 대한 귀중한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1507년에 독일 최초로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화인 <아담과 이브>를 그리기고 했다. 이 작품에서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비례의 몸에 대한 그의 관심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과 비투루비우스의 고대 문헌을 연구하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측정하여 보편타당한 비례의 법칙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인간 비율에 대한 연구 끝에 1512년에서 그의 사망 직후인 1528년에 걸쳐 4권의 책을 출간하여 남자와 여자의 비율의 유형과 비율에 대한 연구의 성과를 정리하고도 했다.

독일 최초로 실물 크기의 여성 누드화인 뒤러의 <아담과 이브>(1507)

판화와 사진의 가교 역할을 한 동판화
목판 인쇄법은 인쇄술이 발명된 초기 이래로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까지도 줄곧 행해졌으나 곧 구리나 백랍 등을 비롯한 기타 여러 금속판을 인쇄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판을 직접 파내는 목판과는 달리 금속판을 사용할 때는 밀랍이나 역청을 입힌 판의 표면에 도안을 그리고 상을 제외한 여백 부분을 남기고 파낸 후 표면을 산으로 부식시켜 볼록판을 만드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동판화(铜版画)는 1430년대 독일에서 금속세공사들의 기법을 차용하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동판화는 버린(burin)이라는 조각도구를 이용해 동판에 얇은 선을 새긴 후 인쇄하며 각기 다른 선의 효과를 위해 룰렛(roulette. 뾰족한 바늘로 덮인 작은 바퀴)이나 버니셔(burnisher. 타원형 단면의 강철 막대기로서 금속판의 선을 작게 한다든지 깎은 자리에 기름을 발라 연마해서 매끈하게 하는 도구)라 불리는 도구를 이용하기도 한다. 버린 등을 이용하여 새겨진 동판에 골고루 잉크를 입힌 후 와이퍼를 이용해 닦아내면 새겨진 선에만 잉크가 남는다. 종이를 덮고 프래스를 이용하여 인쇄한다. 이와 같이 새겨진 홈에 있는 잉크를 이용하여 인쇄하는 기법을 오목판 인쇄(凹版印刷)라고 한다. 이 방식을 이용하면 몇백 장을 인쇄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동판화의 제작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영상이다.
동판화는 에칭(etching) 방법으로 대체된다. 이 방법은 다니엘 호퍼(Daniel Hopfer, circa 1470–1536)가 개발하였는데 동판 등의 금속판에 밑그림을 그려 산(酸)으로 부식시켜 판화를 만듭니다. 동판 면에 항산성 물질인 그라운드를 입히고 그 위에 뾰족한 도구로 밑그림을 그립니다. 그라운드는 대개 밀납·역청·송진의 혼합물이다. 밑그림을 새긴 동판을 질산 등 부식액에 넣으면 그라운드가 벗겨진 그림 부분이 부식되면서 동판에 홈이 패여 선 형태가 새겨집니다. 판 위의 그라운드를 닦아낸 뒤 잉크를 발라 습기를 가한 종이에 압착시키면 그림이 종이에 옮겨지면서 판화가 완성된다. 에칭 판화기법은 갑옷 장식무늬를 에칭으로 새기던 관례에서 유래한 것으로 19세기에 사진 제판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 신문과 예술 분야에서 자주 사용된다. 직접 구리판에 선을 조각하는 직접법보다 선을 뜻대로 그리기 쉽다. 아주 정교하고 세밀한 묘사가 가능하기 때문에 지폐의 제작에 사용된다.
다니엘 호퍼(Daniel Hopfer)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으로 전해지는 <군인과 그의 아내>(The Soldier and his Wife) 15세기 후반 독일의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뛰어난 동판화이다. 독일은 신성로마제국(962–1806)으로 묶여 있었지만  중앙집권적이던 초기와 달리 15세기만 하더라도 사실상 여러 제후들이 분할하여 통치하던 지역이다. 이런 와중에 1486년에는 헝거리와 전쟁이 있었고 1517년에는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 개혁 폭풍이 일어나는 진원지이기도 하다. 부부는 어딘가 먼길을 떠나는 듯하다. 부임지가 바뀌는 것인지 전란을 피해 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군인이 아내를 보는 눈빛은 미안감과 엄격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반면에 아내는 냄비와 국자와 수저를 눈에 짊어지고 따르는데 남편을 쳐다보는 눈빛이 따듯하다.

다니엘 호퍼(Daniel Hopfer)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으로 전해지는 <군인과 그의 아내>(The Soldier and his Wife)

먼곤 폰턴의 사진 제판 기술의 개발
사진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photography는 그리스의 빛(photos)과 그리다(graphen)에서 유래한 말이다. 카메라의 조상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로서 어두운 방 한쪽 벽면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통과시키면 외부의 풍경이 반대쪽 벽면에 거꾸로 비치는 원리 혹은 이 원리를 이용해 만든 기구이다. 이 원리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다. 18세기경에 자연의 영상을 정확하게 본뜨기 위해 에술가들은 다양한 종류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흔히 사용했다.

카메라의 조상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18세기 들어 급성장한 중산계층이 초상화를 원하고 그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수요가 등가하면서 복제품에 대한 요청이 늘어나고 목판술이 활기를 찾고 석판인쇄술이 발명되면서 그림들을 무한정 복제할 수 있는 방법들이 출현한 것이다. 오랜 예술적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장치들이 속속속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윤곽만 따라그리면 되는 실루엣 그림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1786년에 질루이 크레티앙(Gilles-Louis Chretien)이  자동 전사식 초상화 제작기(physionotrace)를 발명하여서 초보자라도 누구나 동판 위에 음각 미세 초상화를 제작하여 그 그림들을 복제하고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렛대로 연결되어 움직임에 따라 초상 모델을 윤곽이 철필로 전달되어 철필이 그려나가는 데 따라 잉크로 그려진 동판을 음각시키는 방법이다. 이 기구는 대중적 인기를 끌어 1797년의 파리 <살롱전>에 6백 점에 달하는 자동 전사식 초상들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물리적 장치로 대상을 정확히 모사할 수는 있었디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대로의 현실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은 열망이 커졌을 것이다. 손으로 그리지 않고도 빛 스스로가 카메라 속에 상을 그려놓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1826년 니엡스는 최초로 영구적 사진술을 개발하여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카메라

1727년 독일 해부학 교수 요한 하인리히 슐츠는 은이 포함된 화학물인 은염류(銀鹽類)가 열에 의해서가 아니라 빛에 의해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카메라 옵스큐라와 병행하여 사진에 필요한 기본 기술이 된다.

감광물질을 인쇄판 제작에 응용하는 실험은 1813년경 프랑스 발명가이자 사진술 연구자인 조제프 니세포어 니에프스(Joseph Nicéphore Niépce)가 처음으로 시작했다. 사진을 처음 찍은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1826년 니엡스는 최초로 영구적 사진술을 개발했다. 

그는 판화에 기름을 칠해서 투명하게 한 다음 감광액 용액을 입힌 후 판 위에 올려 놓고 햇빛에 노출했다. 백랍판이나 동판에 감광성 토역청을 바른 후 햇빛이 양각의 밑그림본을 통과하여 판을 비추도록 하면 햇빛이 밑그림을 통과할 때 비도안 부분은 햇빛에 노출되어 딱딱하게 굳어진다. 이때 밑그림으로 인해 햇빛에 노출되지 않은 도안 부분은 라벤더 기름(lavender oil)이나 백색 원유에 담가 현상하면 금속판에 상이 만들어진다. 금속판을 부식시켜 형상(形象)은 오목판 각으로 금속판 위에 새겨지게 되고 이 오목판 형상으로부터 사진을 얻게 되는 방식이다.

1826년(또는 1827년)에 니에프스는 백랍관을 끼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여 최초로 성공적인 사진을 만들었는데 이 때 노출 시간은 약 8시간정도였다.

레그라(Le Gras)에 있던 니엡스의 집 창밖 풍경. 니엡스가 1826년경 만들어낸 최초의 사진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사진기술을 응용한 인쇄판 제작인 사진제판의 역사
니에프스의 발견은 사진술의 기본적인 원리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사진영상이 곧장 인쇄에 응용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감광성을 가진 다양한 천연 합성물을 이용하여 사진 제판술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유럽과 미국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먼고 폰턴(Mungo Ponton)이 1839년에 발표한 크롬(chromium)의 특수 합성물이 갖는 감광성에 대한 보고서는 현대적인 사진제판 기술의 시조가 되었다.
폰턴은 크롬 합성물을 함유하고 있는 아교가 햇빛을 받았을 때 일으키는 화학적 변화를 밝혀냈지만 이러한 새로운 기술을 인쇄에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사진술의 선구자인 영국인 헨리 폭스 톨벗(Henry Fox Talbot)이 크롬으로 처리한 콜로이드(colloid) 사용 방법을 개발하여 사진 제판술을 오목 인쇄판에 도입하였다. 

현대의 사진제판 기술을 발명한 과학자인 먼고 폰턴(Mungo Ponton)

사진 제판은 인쇄판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인쇄 기술로서 빛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이다. 현재는 제판용 카메라로 스크린을 이용해서 촬영하여 망점으로 형성된 필름을 만든 후 감광물질을 도포한 금속판·플라스틱판 등에 굽는 방식으로 판을 만든다. 이때 판 위에 상(像)을 새기는 방식은 판 표면을 기준으로 볼록판 인쇄와 오목판 인쇄로 나뉜다. 
인쇄하려고 하는 상이 양각으로 표현된 볼록판은 인쇄해야 할 부분이 판의 표면과 같기 때문에 판의 표면 전체에 잉크를 발라 인쇄 용지에 인쇄한다. 반면 오목판의 상은 음각으로 처리되어 있어 잉크를 판의 전면에 바른 후 판의 표면에 있는 잉크를 닦아내고 압력을 주어 오목한 부분의 잉크가 인쇄용지에 묻혀지도록 인쇄하는 원리이다.
중세 시대 인쇄의 오랜 기술 개발의 성과인 판화가 동판화에 이어 사진기의 개발과 사진을 신문과 책에 인쇄하기 위한 과정으로 인쇄판을 만들어내는 사진 제판기술로 이어진 것이다. 먼고 폰턴이 사진 제판 기술을 만들어내던 시대는 1760년에서 1820년에 걸쳐 영국에서 방적기가 발명되고, 제임스와크가 개발한 증기기관을 광산에 사용하고 석탄이 숯을 대신하여 철을 제련하는 산업혁명의 용광로가 불타오르던 시기이다. 사진 제판 기술의 발명은 봉건시대가 저물고 시민과 신흥 자본가들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던 시대에 이루어졌다. 매스미디어로서  신문과 잡지, 그리고 출판의 시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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