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교]무명 평론가가 본 ‘장르문학과 2000년대’
[미래학교]무명 평론가가 본 ‘장르문학과 2000년대’
  • 이소연
  • 승인 2021.08.1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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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문학평론가)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서 스토리텔링, SF, 판타지 문학에 대해 강의하고 있으며 SF와 판타지 문학 비평과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현대문학 등단, 비평집 <<응시하는 겹눈>>, 번역서 <<서사학 강의>>(공역)를 냈다.

출처.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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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르 더하기 문학 그리고 장르문학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인류는 자신들의 문명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종이책을 점차 포기하기 시작했다.

스마트기기와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문학’이라고 명명했던 영역에 영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의 요소들이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몸을 섞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종 하이브리드를 만들었다. 비교적 상성이 잘 맞는 사이였다. 혹자는 어느 쪽이 먼저 상대의 몸을 욕망했는가, 이들의 합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순문예를 표방하는 문단에 떠도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인가 새로운 의체-문학장을 찾아 다운로딩하려는 장르의 본능인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어느 쪽이 상대를 요구했는지 선후관계를 가려내는 것은 무의미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문학장에 일정한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뚜렷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장르문학’이라는 현상 자체였다. 이들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일시적인 유행했다 스러지고 마는 다른 문화 현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뚜렷한 정체성을 드러내며 문학장에서 독자적인 중심을 형성하기 시작한 장르문학(들)은 이미 자신들의 독자적인 영향권을 만들어 안착하는 데 성공한 기존 문학과 경합하면서 그 사이에 쉽게 넘볼 수 없는 경계를 쌓아올리는 한편 정반대 방향으로 이를 해체·무화시키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중이다. 이들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며 자신들의 영향권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다른 한편에서는 외국의 SF가 번역되어 대중의 폭넓은 호응을 얻음과 동시에, 헐리웃 영화와 TV 드라마들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으며 성장한 세대들이 작가와 독자로 성장하면서 한국문학에서도 다양한 장르가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문학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변화시킨 원인은 외적인 영향보다 내적인 필연성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한국의 현실 자체가 웹과 컴퓨팅 기술, 빅데이터의 범람, 새로운 스마트 기기와 장치들이 미치는 영향에 의해 급진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실로 실제 세계의 풍경과 경험을 전면적으로 바꾸고 있으며 세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감수성에 새로운 흐름을 생성해내고 있다. 이제 한국 소설이 재현하는 세계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 대중화된 기기와 이들이 제공하는 환상적인 비전들은 ‘신기한’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몸의 감각, 인지의 범위, 세계에 대한 인식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일상적인 경험 그 자체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한국 현대문학장에서는 대략 10년을 주기로 한 단위의 문학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70년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문학이라는 유의미한 문학사의 단위가 탄생했다. 적어도 2000년대가 오기 전에는 이들 간에는 다소 헐거우나 변별력 있는 특징,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려 천년 주기의 기점이 되는 2000년이라는 시점이 의미 있는 변별점이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새로움과 차이의 부재, 자신의 시대를 설명하지 못하는 무기력함, 전통의 답습과 끝없는 내면화 등등 2000년대 이후 문학은 독자들에게 이전 시대 한국문학이 주었던 것 이상의 가치와 재미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실망감에 잠겨 한국문학을 떠나게 하는 중대한 계기로 작용했다. 내향성과 자기만족에 침윤된 한국의 ‘순문학’은 90년대 문학이 주었던 충격이 이전 80년대 문학과의 과격한 결별과 분리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했다. 최근 SF, 판타지를 비롯한 장르문학이 한국현대문학장에 일으키고 있는 파문은 기존 문학과의 단절을 통해서 스스로를 구별 지으려고 하는 새로운 세대의 몸부림이 뒤늦게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문학 트렌드의 10년 주기설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뒤늦게’라는 수식어를 무시해도 좋다. 2020년, 어쩌면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새로운 흐름이며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은 세대교체의 조짐이 아니겠는가.

한국문학에서 장르와 순문학이 본격적으로 경계를 허무는 양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시기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이 활보하던 9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당시 장르적 코드를 작품에 제대로 버무린 작가로서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얼굴은 김영하와 백민석이다. 90년대의 화려한 성과를 지속하지 못하고 2000년 초입에 한국문학이 잠시 침체를 겪게 된 것은 기왕에 진행되었던 장르문학과의 연대를 지속하지 못하고 이른바 ‘문단문학’이 대형 출판사의 문예지들을 중심으로 한 순문학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작가 그리고 출판사들에게 독자들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빠르게 확산되는 대중문화의 발전과 기술의 발달은 한국문학 독자들이 타 매체의 콘텐츠로 대거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로, 게임으로, 더 크게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콘텐츠로 빠져나가는 독자들을 자포자기의 상태로 지켜보며 문단문학은 그러한 유출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지레 포기해버리고 더욱 자신 안의 견고한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른바 ‘문학성’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대중문화 콘텐츠와 경합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하지 않고 다수의 대중독자와 유리되는 위태로운 현실을 마주하며 스스로를 갱신하려는 시도를 방기해버린 것이다. 2000년대라는 시대적 격변을 거쳐 취향도,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도 바뀌어버린 대중독자와 대결하려는 움직임은 오히려 대중문학이라고 폄하되어온 최근 장르문학 작가들과 일부 개별 작가들의 분투 속에서 발견될 뿐이다.

한편 일부 장르문학의 작가들은 한국의 ‘순’문학 문학의 폐쇄성과 엘리티즘에 대해 비판과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문단문학은 장르문학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했다기 보다 자신을 열어젖혀 낯선 세계를 향해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독자와의 접점을 꾀하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소진해버렸다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최근의 웹소설을 비롯한 대중문학의 ‘생존’을 넘어선 약진은 대중독자들이 활자로 된 텍스트로 언제든지 결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성에 대한 논쟁은 일단 별개로 두더라도 매체와 플랫폼의 변화가 있을지언정 ‘읽을 만한’ 텍스트를 향한 갈망은 상존해왔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 이제 한국의 문단문학 역시 자신이 견고하게 독점하고 있던 ‘문학성’이라는 견고한 보루를 열어야할 필요성을 더더욱 시급하게 느끼고 있는 형국이다.

2. 경계에 선 문학들-‘문학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이른바 ‘순’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에 가로놓인 임의적인 경계를 넘나드는 하이브리드형 작가들은 장르가 문학사 전면에 대두된 이후 언제나 존재해 왔다. 필립 K.딕, 스티븐 킹, 커트 보니것, 마거릿 애트우드 등의 소설은 명백한 장르문학이거나 장르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렇지만 많은 독자들은 어느 장르 소속이라는 신원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고전의 반열에 들 만한 뛰어난 작품으로 이들의 소설로서 받아들인다. 더불어 이들은 이미 ‘주류’ 문단의 비평가들로부터도 일찌감치 문학성을 인증 받은 지 오래다. 장르가 주류 문단의 인증(혹은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한편 또 타인의 지지와 사랑을 갈구하는 인정욕구가 모자람 없이 넘실대는 곳이 또 작가들의 세계가 아니던가. 대가 스티븐 킹 역시 자신이 3류 대중문학 작가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기까지 마음고생을 꽤 했던 이력을 곳곳에서 고백하는 것을 보면 이는 국내에서만 국한되는 현상도 아니다. 킹은 작품 속에서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비평가들을 향해 통렬한 비판을 날린다. (급기야 킹은 버크만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네 편의 장편을 발표하는데, 비평가들은 그를 킹과 비교하면서 칭찬함으로써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장르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영미 권에서도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넘어서야할 장벽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잘 말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대중문화의 외연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장르가 주류문학의 하위분야로서 폄하되는 일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앞서 열거한 작가들 외에도 수많은 거장들이 장르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활발히 창작하고 있기도 하다. 경계의 해체 혹은 하이브리드 현상이 자유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영미 문학계가 현재로선 한국의 협애한 문학장보다 개방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장르와 본격(또는 주류)문학 간의 경계가 교란되고 종내는 완전히 와해되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일까? 이는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객관적으로 사안들 들어다 보기 위해 위해 인근 장르인 영화의 예를 들어보겠다. 칸이나 베니스 같은 국제적인 아트무비 페스티벌에 노미네이트되는 작품과 아카데미 같은 ‘로컬’ 상의 시상대에 오르는 영화, 이러한 상과는 무관하게 대중의 인기와 흥행에 주력하는 마블, D.C. 등 블록버스터 무비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들 영화의 ‘장르’ 에 내재된 차이와 경계는 작가는 물론, 비평가, 일반 대중에게도 직관적으로 변별되는 대상이다. 한 멀티플렉스에 동시에 걸려도 대중은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알아차린다. 불과 얼마 전에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 테마파크다”라는 발언을 해서 화제를 낳은 바 있다. 스콜세지가 ‘시네마’라고 명명했던 문예 영화의 영역은 역사가 비교적 짧은 영화 예술 분야에서도 엄존하고 있음을 새삼 상기하는 일화라고 하겠다.

문학 장르간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반드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히려 각자의 영역을 확실히 나누어 자신의 영역에서 쌓아온 문화적 독특성을 살려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욱 희망적인 방향이라 할 수 있다. 문화적 토양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선 각자가 지닌 다양성을 담보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주류-비주류, 혹은 중심-주변 간 ‘차이’가 문학성의 유무를 가름하는 미학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한다던가, 아니면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가늠대로 작용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순문학, 장르 양쪽 편에서 공히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차별의 근거로 오용되는 현실은 한국 사회에 아직 만연한 엘리트주의, 대학 중심의 학벌 문화, 강단 비평과 대형 출판사의 폐쇄성 등이 중대한 원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문학뿐 아니라 이질적인 분야의 혼융 혹은 경계 넘기 현상은 이미 대세로 받아들여진지 오래다. 이는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며, 과거에도 예술이 타 장르로부터 영감을 받는 일은 흔했다. 또한 본격문학의 작가가 SF,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등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쓰는 경우는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보편화된 현상이었다. 최인훈은 1960년대 이미 여러 편의 판타지를 썼으며 복거일의 대체역사물 『비명을 찾아서』는 비평가들의 상찬을 받으며 한국의 SF를 문학장 전면에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우주여행을 연상시키는 판타지 기법을 사용해서 오히려 반대 진영에서 공격을 받은 바 있으며 2000년대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준 작가 박민규는 오히려 ‘장르문학 작가들에게서 인정받는’ SF를 쓰는 작가로 호평을 받았다. 한편 작가들은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이런 저런 장르에 욱여놓고 꼬리표를 붙이는 현상에 불만을 지닐 만하다. 이에 대한 박민규의 언급에 귀를 기울여보자.

제가 「근처」니 이런 걸 쓰면 이 사람 이런 것도 쓰네 라고 하잖아요. 이런 것 쓴 사람으로서 이야기할게요. 이거 별거 아니에요. 나 이거 쓸 때 순수했냐 이거 쓸 땐 순수하고 저거 쓸 땐 장르 하나? 아니거든요. 이런 거는 말 그대로 코드의 배합일 뿐이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왜 아직도 자세 자세 좀 그만 따지고 전국의 문창과 국문과에서 자세 좋은 투수만 길러내요. 전부 우완 정통으로 졸업해요. 우완 정통인데 공은 존나 느려요. 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건 하지 말자는 거죠. 21 세기인데.

그밖에도 SF 단편으로 등단해서 화제를 뿌렸던 조현을 비롯해 윤이형, 김성중, 손보미, 최제훈, 윤고은, 정용준 등 젊은 작가들, 최근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한 『82년생 김지영』의 작가 조남주, 문단문학에서 시작해 장르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정세랑 등이 장르문학 혹은 장르문학의 코드를 활용한 작품들을 활발하게 내놓고 있다. 이런 작가들을 가리켜 ‘슬립스트림’(이는 순수문학작가가 장르적 관습을 차용하거나 장르문학과 유사한 작품들을 내놓는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다.)으로 따로 거명하는 것도 이제 다소 철지난 분류법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아예 장르적 성격이 강한 작품으로 시작했지만 순문학 문단에서도 점차 그 역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듀나, 정유정 같은 작가들도 있다.

별같이 빛나는 작가군 가운데서도 필자가 기억할만한 작가로 꼽는 이름은 조하형이다. 단 두 작품(『키메라의 아침』, 『조립식 보리수나무』)만을 남기고 문단에서 홀연히 사라진 조하형은 시대를 앞서간 상상력으로 빛나는 놀라운 작품들 이상으로 SF를 홀대하던 당시 평단과 독자들의 반응에 상당한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평론가 박진과 주고 받았던 지상논쟁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소설을 SF라고 호명하는 박진의 평론에 격심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고문을 문예지에 발표한다. “명명(命名)은 폭력이 될 수 있다: SF 코드든 판타지 코드든,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그 코드들을 적절하게 조합하는 대신, 하나의 하위 장르 코드를 들이대고, 그 코드로 포획하기 위해 텍스트를 난도질하는 경우.” 이러한 작가의 반발에 대해 처음 『키메라의 아침』을 SF로 규정한 평론을 쓴 바 있는 평론가 박진은 다음과 같이 다른 비평문으로 반박하고 있다.

『키메라의 아침』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사실 자체를 그가 완강히 부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키메라의 아침』이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신인류 조인(鳥人)을 포함하여 트랜스제닉 동식물들이 통제불능으로 양산되는 SF적인 시공간을 폭발적인 강렬함으로 창조해낸 소설임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키메라의 아침』은 SF의 <코드로 포획하기 위해 텍스트를 난도질>해야 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명백히 리보펑크적인 슬립스트림이다. 그런데도 조하형은 <이 글은 기본적으로, 『키메라의 아침』이 무엇이 아닌가, 어디에 사용할 수 없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글은 기본적으로, 자기 무덤을 파면서 대답하는 글이다>라고 말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설이 SF 장르 용어로 불리는 데 대한 거부감을 표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다른 소설도 아닌 『키메라의 아침』을 쓴 작가에게서,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이분법적으로 이계화하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SF적인 소설을 쓰고도 자신의 소설이 갖는 문학적인 의의를 강조하고 싶다면(이는 내 책의 기본 관점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는 『키메라의 아침』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그 자신마저 옭아매고 있는 장르문학에 대한 편견에 대항해야 할 것이다(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한 일이다).

이 논쟁이 벌어졌던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을 고려하면, 장르문학을 대하는 태도는 평론가, 독자 대중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서도 사뭇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을 SF, 판타지, 슬립스트림, 미스터리라고(적어도 이런 기법을 차용했다고) 하는 코멘트에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르를 표방하면서 장르문학에 대해 여전히 갖고 있는 뿌리박힌 평단의 편견에 완강하게 저항한다. 심지어 최근 젊은 작가들은 자신의 ‘서브컬처-스러움’, ‘장르-성’을 즐기면서 적극적으로 이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인다. 장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도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혹시 이런 논쟁에 집중한 나머지 누락할 수도 있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조하형의 두 소설은, 한국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할 한국문학의 걸작이자 장르문학계의 괴작이라는 것이다.

3. 장르가 문학의 미래가 되려면

최근 10년 간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이 예고하는 새로운 국면은 ‘문학성’이라는 이념이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문명 전체, 그 가운데서도 ‘매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실을 일깨워 준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수시로 부정하고 매너리즘을 넘어서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자기해체적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문학이라는 제도에 상당히 도전을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기술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독재와 전 지구화에 대한 불안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매체가 도화선이 되어 변혁의 계기가 마련된다면, 이는 현재의 권력화, 과잉집중화된 문단의 앙시엥 레짐을 뒤흔듦으로써 다음 세대의 ‘다른’ 문학성을 꿈꾸게 할 기회를 제공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장르문학이 대중문학으로 오해받고 있는 현실을 넘어서서(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SF를 비롯한 장르문학이 새로운 매체 환경에 대한 응전으로서 다음 세대 문학의 전망을 이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지적할 점은 장르문학 비평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직 무명 문학비평가로서 고백하는 말이지만 비평은 사실 잘 읽히지 않는 쓸쓸한 장르다. ‘인기가 없다’는 말로 요약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비평은 쓰는 사람이나 게재하는 쪽 어느 쪽에도 ‘돈이 되지 않는’, 계륵 같은 콘텐츠다. 하지만 인류가 영위해온 문화예술의 긴 역사는, 비평과의 변증법적 대결이 없이 수준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는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언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정 수준의 ‘문학성’과 메타언어로 이루어진 자기반성의 결과물을 제시하지 못하면 어떤 텍스트도 일회적인 스낵컬처로 전락하는 길을 피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축적된 비평적 성과는 학문 장에서 인증 받는 학술논문으로 발전해야 하고 (이러한 작업은 지금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나아가서는 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에 전공과목이 개설됨으로써 과거의 성과를 정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최근 대중독자들이 이야기를 접하는 경로가 전자책, 웹소설로 플랫폼이 바뀌어가면서 제본된 책[codex book] 문명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순수문학 문단의 역할을 대치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종이 매체에서 전자매체로의 이행은 장르문학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네들을 기웃거리며 구전을 풀어놓는 이야기꾼의 기술이든, 수고롭게도 한 장씩 종이로 묶어낸 소설이든, 스마트폰 단말기를 통해 보는 디지털 콘텐츠이든, 시대는 바뀌어도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문제는 ‘문학성’인 것이다. (‘문학성’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독서 다중의 요청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다시 말해 여기서 문학성이란 기존 문단에서 이식된 ‘주어진 것’으로서의 문학성이 아니라 장르를 바탕으로 독특하게 발전시켜나갈 또 다른 문학성을 말한다.) 필자를 비롯해 많은 비평가들은 웹소설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장르문학장의 현실이 흥행과 호기심, 화제성과 말초적 자극이라는 여러 동인이 혼효된 복잡스런 상황을 자체적으로 정리, 절합해가면서 고유의 문학성을 선언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갈 것임을 믿고 있다. 이 과정을 힘겹게 경유해 가며 펼쳐낼 한국문학의 미래는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그러한 혁신적인 움직임을 견인할 엔진이 다름 아닌 ‘장르’라면, 이미 시동은 걸려있는 셈

 

1)김영하와 백민석 소설이 지닌 장르적 특징에 대해서는 각각 다음 졸고를 참조할 수 있다. 「쇼타임, 연옥에서 보내온 초대장-마이너리티가 김영하의 소설을 읽을 때」, 『응시하는 겹눈』, 문학동네, 2016;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소설 속에는 그것이 산다, 그리고…」, 『대산문화』 2016년 겨울호,

2)필자는 자폐성, 독백성으로 전락한 2000년대 문학의 한계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몇몇 평론가들의 주장을 지지한다. 김영찬의 다음과 같은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것이 가졌던 내재적인 한계가 다른 한편으로 문학의 자폐와 자발적 왜소화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트고 열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학의 자발적 왜소화다. 이는 어찌 보면 90년대 문학의 성과와 결여를 동시에 낳았던 나르씨시즘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심지어 문학의 존재방식까지도 결정하는 방식으로-열성유전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도 있겠다.”,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69-70쪽.

3)황정아, 「박민규 라는 문학 발전소」, 『창작과 비평』 2011 봄호, 374쪽.

4)조하형, 「[작가의 편지] 몇 개의 주석들; 『키메라의 아침』에 관한「, 『문학과사회』 제 21호, 2008. 8, 304쪽.

5)박진, 「장르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는 왜 『키메라의 아침』의 아침이 SF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작가세계』 제 20호, 2008. 11,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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