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길의 "안개향기"리뷰 -존재의 실상을 잘 보여준 장엄한 구도소설
조동길의 "안개향기"리뷰 -존재의 실상을 잘 보여준 장엄한 구도소설
  • 김상천
  • 승인 2021.11.16 17:47
  • 댓글 5
  • 조회수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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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시대, ‘안개’라는 상징을 통해 존재론적 성찰을 깊이 다룬 소설집 나와

 

하나의 진실의 세계로서 소설은 ‘그것it'을 드러내는 이야기 형식이다. 그러나 ’그것‘이라고 일컫는 소설적 진실의 세계는 대체로 은폐되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소설은 탈은폐적 기도try로서의 도전적이고 구도적인 글쓰기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바쁜 중에 소설을 찾아 읽는 이유도 거기 단순한 재미만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굳이 소설을 찾아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또한 거기 소설을 통해 묻혀 지거나 잊혀 진 생의 진실과 존재의 실상에 대한 앎의 욕구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를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조동길의 이번 소설집을 ‘평등을 위한 기억의 현상학’(박수연, 문학평론가)이라며, 누구에게든 외면되어서는 안 되는 기억 되살리기를 통해 삶을 주체화하는 것이라고 본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이다.

자, 나는 지금 나대로 조동길의 소설집 <안개향기>를 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먼 방금 말한 것이 정당한 것인지 밝혀봐야 한다. 소설이 과연 하나의 진실의 세계로서 ‘그것’을 드러내는 이야기 형식일까? 소설이 ‘그것’으로서의 진실을 드러내는 이야기 형식이라는 명제가 하나의 차이로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소설이 아닌 다른 형식은 진실을 감추는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지 않는 예의 대부분의 고대시의 형식이다. 즉 시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집단적인 노래의 형식으로 상대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맹목적이고 노예적인 찬양의 성격을 띤 노래로서 시는 진실을 감춘다는 것에 주목적이 있는 매우 공리적인 고대적 제의형식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가장 대표적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그렇지 않은가. 거기,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는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제에 있어 그는 사실 명예의 희생양이자 또한 잔인한 살인마가 아니던가. 여기, 나는 벌써 하나의 글쓰기이자 이야기의 일종으로 그는 명예의 희생양이자 잔인한 살인마라고 평을 놓지 않았는가. 소설은 이렇게 단순한 묘사를 넘어 말하는 자의 주관이 개입된 해석이자 평가의 성숙한 세계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허위적인 기만의 옷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는 세계형식으로서의 소설의 세계가 아니것는가. 

그러니 소설이 내뿜는 진실은 매우 구체적인 그것의 세계다. 즉 진실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지 않다는 데서 우리는 진실을 드러내는 소설이 유명론적이고 개별적이며 고백적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시가 아킬레우스처럼 ‘종적種的’ 세계를 보여주는 집단의 형식이라먼, 소설은 ‘개별’의 세계를 드러내는 근대 부르주아의 경험주의 철학을 이론적 기초로 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유명론적 경험주의 철학을 기초로 ‘그것’, 즉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드러내는 소설이 '구심적cenral' 구성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경험적 귀납을 통해 찾아낸 진실이 가령, 저 ‘오디세우스의 흉터’(에리히 아우어바흐, <미메시스>, 민음사)처럼 감동적인 장면을 장엄하게 펼쳐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소설은 하나의 진실 드러내기로서의 유명론에 기초한 리얼리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오랜 문화 유전자가 아닌가.

자, 소설에 대한 이론은 이 정도로 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러먼 우리는 그대로 앞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확인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소설집을 펼치자마자 수도 없는 ‘개별체들’의 실상을 만나게 된다. 

그 돌멩이 /44쪽, ‘할머니의 돌멩이’
그 사내 / 62쪽, ‘모래 한 줌’
그 여자 / 103쪽, ‘광장의 풀꽃’
그 안개 / 122쪽, ‘안개마을’
그 상 / 192쪽, ‘마지막 제사’
그 남자 / 224쪽, ‘엄마의 안개’
그 향기 /261쪽, ‘안개향기’

소설이 여기, ‘그 돌멩이’처럼 구체적인 ‘그것’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기라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소설이 앎의 모럴(쿤데라, <소설의 기술>)을 기초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 앎을 무기로 허위에 대한 싸움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그것은 곧 철학사에서 실재론에 대한 유명론의 대응과 다르지 않은 문제다. 실재론에 고중세의 집단적인 시형식이 대응한다먼, 유명론에는 근대의 개인적인 소설양식이 대응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최초로 <구토>를 써서 소설가로 등단하먼서 일약 유명세를 치르게 된 데도 사실 이 실재론의, 허위에 대한 공격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은가. 푸코(<말과 사물>)의 지적처럼, 유명론이 언어 비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추상적인 단어들에 대한 불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중세의 허상을 깨고 나온 근대 부르주아 양식으로서의 소설의 역할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니까 실재론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의 세계는 그대로 이 실재론을 통해 권력을 유지해왔던 기성 이데올로기 체제에 대한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기에 권력자들이 동서양 어디든 이야기에 대해 적의敵意를 드러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 않은가. 이를 잘 보여준 사례가 공자의 자불어괴력난신이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요, 조선의 문체반정이 아닌가. 

자, 그렇다먼 조동길은 그 어떤 유명론적 진실의 막대기로 실재론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을까? 먼저, 하나의 단편자전서사로서 ‘할머니의 돌멩이’를 보자. 대체 여기 돌멩이는 할머니 을순이의 가심을 무겁게-그야말로 돌멩이처럼- 콱! 하고 짓누르고 있는 그것을 지시하는 환유로서 기능하고 있는데, 그것은 언니 갑순이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죄책감 때문이다. 언니는 일제말기 가난이 극난하던 때, 면사무소 직원과 주재소 순사의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 준다는 꾀임에 속아 정신대로 팔려가 소식도 모르는 불귀의 가족이다. 그런데 소식도 모르는 갑순이에게서 온 그 편지가 할머니를 모시며 수발을 들고 있는 손자인 나를 통해 소개된다.

“부모님 전상서 염하지절 일기 고르지 못한데 부모님 기체후일향만강하옵시고 가내제절 모두 무고하신지요. 불초 소녀가 부모님 슬하를 떠나온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나가 버렸네요. 이 불효녀는 부모님께서 자나 깨나 염려해 주시는 덕택에 몸 성히 잘 있구만요. 여기가 어딘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여기 온 지 몇 달이 지났어도 늘 같은 날씨구먼요. 그런데 맨날 눈만 뜨면 군인들만 보여요. 이 불초 소녀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 어머니 모두 다시 뵈올 때까지 그저 부디 옥체 평안히 계시기를 고두백배 천만축수 하나이다. 불효자는 재배하고 올립니다.”

이것이 바로 할머니가 평생을 두고 고이 간직해 왔던 그 편지이고, 말하지도 모하고 은폐되어 왔던, 그러나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바로 이것이 할머니를 그렇게 무겁게 짓눌러왔던 그 돌멩이다. 여기, 돌멩이는 따라서 하나의 상징이 아닌가. 내가 그를 통해 실재의 중심에서 존재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하나의 억압으로서의 잔혹서사의 표지가 아닌가. 그러나 대체 어디가 몸 성히 잘 있다는 것인가? 진실은 반어라니...이야기는 과연 ‘그것’이라는 진실 드러내기로서 탈은폐적 기도로서의 저항이자 도전이 아닌가.

‘할머니의 돌멩이’가 개인과 역사의 상처를 다룬 눈물겨운 작품이라먼, ‘모래 한 줌’은 존재의 실상을 매우 구체적이먼서도 보편적인 주제로 다뤄 낸 일대 성과작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모래 한 줌’에서 묵직한 감동을 느꼈는데, 그것은 실로 장엄서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너와 나의 존재의 실상이자 진상이기 때문이 아닌가.

자, 여기 서역 여행 무리 중에 지광 스님 앞에 나타난 ‘그 사내’가 있다. 왜 ‘그’인가. 그것은 특별한 그 무엇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 사내가 특별했던 것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묘지에서 발견된 ‘누란의 미라’ 눈깔 같은, 죽음의 사막과도 같은 이미지를 지닌 그 사내가 강한 이미지로 나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소설에 따르먼 “뇌간척수를 흐르는 번개 같은 빛, 언어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밀히 느껴지는 어떤 기운, 그런 것이 내려주는 일종의 신탁이나 계시 같은”그 무엇이 그 사내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또한 구심적 전개과정을 통해 드러난 진실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바로 그 죽음과도 같은 이미지의 사내가 예전에는 남부럽지 않게 잘 나가던 인생의 승자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오토바이 사고로 딸과 아내를 연이어 모든 것을 잃은 생의 패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두 여자의 분골을 추스려 아내가 그토록 가고 싶다던 ‘서역 삼 만 리’(미당의 ‘귀촉도’ 중)의 모래 언덕에 생의 마지막 의례를 치루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매우 구체적인 그 사내의 불행에 얽힌 이야기임에도 단순히 그 사내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그 사내와 가족이 처한 운명처럼 어떤 외피도 없이 죽음에 내던져 있는 존재가 아닌가. 다시말해 ‘모래 한 줌’은 우리에게 존재의 실상에 대한 매우 상징적인 전언을 던져주고 있는 작품이기에 소설 이상의 감동의 페이소스를 안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애멸즉 취멸이요 취멸즉 유멸이요 유멸즉 생멸이요 생멸즉 노사우비고뇌멸이니라...제행무상이니 시생멸법이라 생멸멸이하면 적멸위락이니라”는 지광의 무상계에서 무한위락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이야기라는 상황만이 전할 수 있는 뜨거운 감동의 세계이자 드높은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자, 나는 갑자기 다음 시가 생각나거니와,

그것은
구천까지 가 닿았으나 내침당한 생목숨이
다시,
사랑 같은 지독한 문양을 새긴 죄로
천길 땅속에 매장당한 나였던 것
한 천 년
내가 나를 버리다가
항아의 물길이 열릴 때
수월관음 발아래 엎디어 젖은 몸 사루는 것
뼛속까지 태워 흔적 없어지면
비로소
화엄에 침투할 수 있는 것

-김은령, ‘침향’, <차경>, 황금알

아흐, 천 년이라니...젖은 것은 오래 탄다니...

여기 ‘침향’처럼 존재는 사랑 때문에 오랜 고통을 겪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없이 어찌 존재란 말인가. 이것은 ‘그 사내’ 또한 마찬가지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여기, 사랑 때문에 영원회귀의 수레바퀴를 계속해서 돌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절대 화두를 제시했다는 데 이 소설이 던진 문제의식은 지축을 흔들 만큼의 무게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이 ‘그것’에 대한 소설의 본질을 실경으로 잘 보여주고 있으먼서도 구도적 속성을 지닌 이유가 과연 여기에 있지 않은가.
이뿐이 아니다. 표제작도 그렇거니와 소설적인 요소와 더불어 구도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안개’가 전편의 핵심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는 데에 <안개향기>의 두드러진 점이 있다. 그러나 여기 조동길에게서 볼 수 있는 안개는 무진霧津의 ‘그 안개’가 아니다. ‘무진기행’(김승옥, 1964)의 그 안개가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은 4.19 혁명의 좌절을 상징하는 시대적 아이콘이라먼, 여기 조동길의 안개는 “세상만사가 허망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실증하고 있”(‘엄마의 안개’)는 존재론적 상징이라는데 <안개향기>가 이룩한 구도적 본질로서의 서사적 장엄한 힘이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비실재한다’는 서사소가 뿜어내는 진실 앞에 그 누가 덤비고 나서것는가. 그리하여 세상사의 진실은 실로 모래 한 줌 같기도 하거니와, 그러니 또한 서래조의최당당...산하대지현진광이 아닌가!

대체 인생의 비의秘義를 그 누구라서 시원하게 밝히것는가

그러나 ‘안개’만한 상징이 없다는 게 그가 던진 생의 메시지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읽었다.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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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11-17 04:18:53
하느님(天).神明,조상신 숭배가 유교의 큰 뿌리.유교는 국교로, 주변부 사상으로는 도가나, 음양가, 묵가사상등이 형성되었고, 법가사상은 이와는 다른 현실적인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진나라때 강성하고, 유교나 도교와 달리, 한나라때 율령이 반포되어 이후 동아시아에 유교와 별도의 성격으로 국가통치에 활용됨).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윤진한 2021-11-17 04:17:42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 유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동아시아는 수천년 유교사회입니다. 공자님 이전의 始原유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님 이전의 구약성서 시대에 해당됩니다. 하

윤진한 2021-11-17 04:17:10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

윤진한 2021-11-17 04:16:36
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철학.민속적으로만 접근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윤진한 2021-11-17 04:15:52
역사서의 정사, 유교경전, 가톨릭경전,교과서등은, 소설.야담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의 종교인 수천년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의 정체성을 확실히하고, 하느님과 별개의 철학인 도교,불교를 이해하는것도 어느정도 필요합니다.도교는 유교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天生蒸民)하신 점에 주안을 두지 않고, 후대에 갈수록 불교의 보살같은 용어도 사용하여,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수천년 이어진 유교의 하느님(天).공자님과 맞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원래부터 창조신 브라만에 항거하여 부처가 새로 만든 후발신앙으로 브라만을 섬겨온 인도에서도 다시 배척받게 된 인도발 신앙입니다. 창조신보다 높다는 Chimpanzee류의 부처를 받드는 무신론적 Monkey철학임을 염두에 두고, 불교와 섞인 후대의 중국 도교도 그런 위험을 가지고 있는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