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해변으로
-이혜미
바다를 잠글 수 있다면 무한히 깊어지는 방을 만들어 그 안에 물비늘과 안개를 풀어놓을 거야. 배웅과 마중을 반복하는 놀이를 해야지. 파도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고 형광등 켜는 법도 알려줄 거야. 우리의 몸 안쪽에도 해변과 조수간만이 있다고, 태양이 뜨고 지는 시간이 정확하지 않으며 폐수가 쏟아지는 오염지대는 주의해야 하고 기분을 만들어내는 맷돌이 바다 밑에서 끝없이 돌아간다는 것. 우주보다 넓어졌다가 작은 반지 상자 크기로 수축하기를 반복한다는 것. 사실은……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흔적없이 무너지고 말줄임표들만 남아 흘러가는 해변이 있다는 것. 파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순하게 인간의 고백과 거짓말을 배우겠지. 아름다움 속에 깃든 영원한 그늘을. 파도와 나는 눈을 감는다. 몸 안에 잠들어 있는 해변으로 가려고. 꿈과 밤의 밀물과 썰물 사이에 거대한 침묵의 성을 쌓아야지. 새로 지은 그림자에 깃들어 파도의 말을 배워야지. 출렁이는 물의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래를 그러모으는 거야. 비밀이 품은 고요의 입자들을.
<시작 노트>
오늘 제가 본 것은 오래전 사라졌던 새로운 빛, 처음 보는 빛의 연두색이었습니다. 낯설고도 아름다운 빛의 이 연두는 오래 메말랐던 행성의 침묵을 깨트리고 작지만 환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예감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약속일까요? 길고 길었던 메마름과 슬픔, 어두움, 낡아가는 성에 드리워진 지독한 패배의 기운을 거둬가고자 하는 의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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