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특집]사유의 두께 제3부-한국적 가치, 한국적 사유는 어티케 개화되었나
[김수영특집]사유의 두께 제3부-한국적 가치, 한국적 사유는 어티케 개화되었나
  • 김상천
  • 승인 2022.05.0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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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송희 에디터 작업
사진= 한송희 에디터 작업

 

서언

 

가치는 그 무엇이 옳다, 좋다, 바람직하다 할 때에 있어서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관념적 실체입니다. 절대적인 가치와 주관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가치는 더불어 나오는 것이지 혼자 나올 수 없는 것이 사회적 모럴로서의 가치의 기본 특징입니다. 그런데 ‘한국적’이라 하먼 가령 한국의 대표 음식Korean staple food인 김치를 말할 때처럼 한국 사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요소를 지닌 것을 의미하는 만큼 우리가 '한국적 가치The Korean Value'를 논하고자 하먼 먼저 몸과 마음이 둘 일 수 없는 것처럼 오늘의 한국정신은 어티케 탄생하였는지 한국 근대의 기원과 함께 논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렇다먼 오늘 한국적 가치로 통용되고 있는 '그것it'은 무엇인지 보것습니다. 오늘 한국적 가치의 형태로 의식, 무의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보편적이고 공적으로 합의된 가치는 바로 국가의 최고법이자 이념으로서의‘대한민국헌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정신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a clue를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헌법, 그중에서도 특히 당대의 민의를 반영한 전문(1987. 10. 29 전부 개정)은 그 대강과 요지를 담고 있는 부분으로 한국적 가치의 대의를 잘 적시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것은 한국의 실체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대한민국의 법통과 한국은 그 무엇을 정신의 질료로 하고 있는지 대한민국의 이념을 제시한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헌법 전문의 서두는 우리의 존재 근거와 정체성을 핵심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분하먼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둘째,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 내가 여기에 서 있는 존립의 근거가 3.1 운동과 4.19 정신임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3.1 운동은 일제의 압제에 항거한 거족적인 민족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또한 4. 19 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의 불의에 항거한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늘 여기 한국적 가치의 핵심이 '민족주의nation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임을 귀납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들과 더불어 나 또한 쿵쾅거리는 세계사의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부심을 지닌 한국인으로서 한국적 가치의 핵심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이니, 우리는 이런 가치와 이념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런 가치와 이념을 우리들은 어떻게 다듬고 표현해 왔는지, 그리하여 오늘에도 여전히 퇴색하지 않고 그 빛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우리의 선배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을 샅샅이 톺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사는 '집단'과 '개인'이 부딪치며 싸워온 모순과 길항stand against의 역사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제의식의 일단을 짚어보것습니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통해 우리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한국 정신의 두 기둥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 해보먼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상호 모순되는 개념입니다. 법이론1)으로도 몽테스키외로 대변되는‘국민nation주권론’과 루소로 대표되는‘인민people주권론’은 대칭되는 개념입니다. 왜냐하먼 민족주의는 공동의 운명에 기본을 두고 있고, 민주주의는 개별적 가치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철학적으로도 ‘보편자’와 ‘개별자’로 상호 대립해 있는 가치입니다. 인류사는 실로 보편자와 개별자, 집단과 개인의 길항stand against의 역사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가톨릭이니 프로테스탄트니, 실재론이니 유명론이니, 우리의 경우만 하더라도 주리파主理派니 주기파主氣派니, 성리학이니 실학이니, 형식에 있어서도 노래와 이야기, 시와 소설 등...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집단’과 ‘개인’에 대한 모순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공동체와 개인, 보편자와 개별자, 시와 소설은 가장 일반적이고 모순된 개념지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어티케 결합, 원만한 조화를 이룰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역사발전 상의 보편적 모순입니다.

 

“근대국가의 본질은 공동적인 것이 특수성의 완전한 자유와 개인의 행복으로 결합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 따라서 가족과 시민사회의 이익이 국가에 총괄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목적의 보편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보존하지 않을 수 없는 특수한 존재의 독자적인 지와 의욕 없이는 전진할 수 없다는 것, 바로 이 점에 잇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것은 실현되어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성도 활력에 넘치는 발전을 해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두 요소가 든든한 바탕 위에 존속함으로써만 비로소 국가는 각 부분이 조직화한, 참으로 유기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G.W.F.헤겔, <법철학>, 임석진, 한길사

 

여기, 헤겔의 진술은 공동적인 것, 곧 국가를 우선하는 철학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합니다. 대체 가족이 먼저 있어야 내가 있는 것처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모럴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겔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근대는 식민의 역사를 지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근대국가를 형성해야 하는 사명과 식민의 역사를 청산해 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지닌 것이 바로 우리의 근대국가형성(사)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민족주의를 그 생존의 제일의 화두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3.1 운동이 바로 이것이요,‘조선학’도 그 중의 하나이고, ‘민족문학’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공동운명체의 집단적 가치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분단이 되어 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또한 우리는 민족주의와 더불어 개인적 윤리를 우선하는 민주주의를 중요한 시대의 지표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제일 분수령을 이룬 것이 바로 4.19 혁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국정신의 내재적 기원을 대변하는 위대한 정신적 문화유산으로 집단적 가치를 상징하는 민족주의 시인 신동엽과 더불어 개인적 윤리를 대변하는 민주주의 시인 김수영을 지금, 여기라는 크로노토포스한 역사의 장과 사유의 무대로 호명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1, 한국근대민족주의의 내재적 기원과 동학, 신동엽의 서사시

 

그렇지만 우리는 김수영을 논하기 전에 한국시단의 거벽 신동엽을 먼저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또한 한국정신의 수많은 성운 가운데 김수영과 쌍벽을 이루며 어두운 시대의 밤하늘을 수놓았던 큰 별이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김수영과 신동엽은 1960년대 4.19 정신과 한국학(또는 한국문학)의 열풍을 상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화인으로 한 시대를 지탱해왔던 한국문학의 빛나는 쌍두마차이자 한국사상사의 거대한 두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동엽이 내셔널national했던 반면에 김수영은 파퓰러popular했습니다. 두 시인 모두 60년대를 상징하는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미적 규범an aesthetic norm상으로 볼 때에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그 혁신적인 면모에서나 혁명적 의의를 지닌 '자생적인'-‘전경인정신全耕人精神’2)을 모토로 하는 신동엽 시정신의 연원이 동학이고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에 닿아있고,‘온몸의 시론’을 내걸고 있는 김수영 시맥의 뿌리가 조선적 리얼리즘으로 박지원, 임화3)에 닿아있다는 관점에서-민족적 민중시인들이었습니다.

 

유민 의식을 지녔던 신동엽과 토박이 의식이 강했던 김수영...

 

또한 백제 유민遺民의 아들로 태어나 동학에 젖줄을 대고 있는 신동엽이 민족적이고 종교적4)이었다먼, 서울 종로 토박이로 동서양의 철학과 고유의 민중적 전통에 뿌리가 닿아 있는 김수영은 세계적이고 철학적이었습니다. 여기, 이 나라의 대표 시인들이 하나의 증상symptom5)을 지니고 있었다먼‘백제의 유민遺民’이니, ‘종로 토박이’니 하는 말은 분명 하나의 뿌리 강박a root obsession을 드러내는 이데올로기 기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원형심상임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먼 이것이 하나의 무의식으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서는 마치 죽은 귀신이 눌러 붙어 떨어지지 않고 나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외세에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이라는 ‘유민 의식’을 지녔던 신동엽에게는 그것이 끝내 <금강>이라는 대서사시를 통한 장엄한 역사의 복원의식으로, 종로에서 태어났다는 남다른 ‘토박이 의식’을 지녔던 김수영에게는“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거대한 뿌리’)으로 기어코 거대한 자부심으로 분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농촌을 본으로 하는 신동엽이 자연적이고 원시적인 그 순수한 본연의 시적 감수성을 지녔다먼, 도시의 아들인 김수영은 문명적이고 지적인 소양을 지닌 교양인의 태도를 지녔습니다. 신동엽의 서사시에 순수 이미지로서의 상징이 빈출하고, 김수영의 산문시에 자의적으로 덧칠해진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지와 상징은 동화의 언어이고, 개념은 이화의 언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신동엽이 분명 고대적 특성과 원칙적이먼서도 원융한 품성을 지닌 리얼리스트 시인이요, 김수영은 근대적 성격과 어덥터블한 가운데서도 까다로운 성깔을 지닌 모더니스트 시인임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고 걸작‘껍데기는 가라’와 천고의 장편서사시 <금강>의 신동엽이 민족적인 색채를 지닌 시인이었다먼, 그야말로‘거대한 뿌리’와 ‘풀’의 김수영은 보다 민중적인 색깔을 지닌 시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백제,

옛부터 이곳은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만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오늘, 너와 나는 어디서 비롯되었나. 우리들의 기원6)을 다시 캐묻는 것은 하나의 K-철학으로 한국철학은 지금, 여기의 확실한 좌표축으로서의 크로노토포스한 나의 존재 근거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로 여기, '백제'와 '금강'은 불사不死의 민족정신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백제와 금강은 단순한 백제와 금강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인 고조선과 고구려의 피를 이은 백제는 나당연합군이라는 외세에 대항하다 망한 민족을 상징하고, 금강 또한 이른바 저 '우금치'로 일컫는 반제동학혁명으로 외세에 굴하지 않고 치솟았던 드높은 민족 의기를 나타내는 시적 코노테이션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백제는 비록 망한지 오래되어 썩었으나 거름을 남겼고, 동학농민혁명 또한 실패해서 썩었으나 정신을 남겼다고 보았습니다. 잿불처럼, 아니 불사조처럼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남아 바람버섯이 되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 '-ㄴ다'는 영원한 현재를 가리키는 시적 형이상학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된다’는 하나의 신념이자 의지이고 철학이자 역사입니다. 이것은 저 금강처럼 맑고 유유히 굽이쳐나갈 우리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민족사의 강물을 말하지 않것는가. 그리하여 '궁궁을을 시호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뭐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아 씨파! 다시 못 올 그때가 아닌가. 그러니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하다 병신되먼 못 간다니...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어느 시인7)의 말대로 곧 죽음의 길이 아니었던가.

 

죽창 들고 조선낫 들고/꿈틀꿈틀 기치창검 하늘 찌르네/얼어 죽고, 굶어 죽고/죄 없는 처자식 맞아 죽고/살 길은 일자무식 오직 죽는 수밖에 없는/핏빛 샛길,

 

이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우리의 시인은 이렇게 하나의 구심점으로 민족종교 동학에서 발원한 민족의 정신은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숭고한 이념을 시의 빗돌에 새겨 넣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낳을 새 씨라고...시인의 말대로, 민족의 정신은 과연 죽지 않고 바람버섯이 되어 날아가 새 씨가 되어서는 천도교로 기적적으로 부활8), 3.1민족혁명으로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3.1반제민족혁명에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의 정신에는 이렇게 불사조처럼 잿불 속에서 죽지 않고 날아오르는, 아니 저 금강의 화려한 금빛노을과도 같이(사진가, 김석종 작)장엄하게 빛나는 동학혁명의 주체적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동학개미를 비롯 너와 나에게 이어진 나라 사랑의 뜨겁고 붉은 애국정신이라니, 아니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으로서의 우국충정의 애타는 정서가 이 아닌가...뭐 타는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니...바람버섯도 그렇다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여기, '도'는 하나의 실증이고, 과학이 아닌가. 뭐 산천초목이 증명하는 사실이 아닌가 라고 신동엽의 시정신에는 이렇게 매우 자연적이고 종교적이며, 그 아아로운 민족정신에 불꽃같은 뜨거운 심지가 박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시인은 갔지만은 우리는 어찌 그를 보낼 수 있것는가. 그리하여 여기, 죽지 않는 영원회귀의 정신과 철학이 오늘 부정할 수 없는 너와 나의 민족사의 강물로, 내 가심 속의 뜨거운 그 무엇으로 끝없이 흐르고 또 흘러갈 것이 아니것는가...나는 그렇게 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신동엽의 민족정신의 깃발이 아직도 이렇게 그 큰 의의를 잃고 있지 않은 가운데서도‘민족문학작가회의’가‘한국작가회의’로 개칭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민족문학이 갖는 폐쇄적 어감’9)이 없지 않은 데에도 그 이유가 없지 않지만 순정한 민족정신이 변질되어 민족의 개념은 오늘 적지 않게 낡은 이념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론 오늘 민족의 이념이 서구근대정치문화의 산물이고, 또한 근대제국주의의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는 민족감정과 영토의식, 언어주권 등 에스니ethnies한 페이소스에 기반한 배타적이고 좁직한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utues’10) 문화의 산물이라는 시각이 시대적 합의를 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신동엽의 서사시적 성취로서의 민족문학의 유산이 그 태산과 같은 빛나는 의의를 지니고 있는 가운데서 민족문학의 가치가 퇴색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근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거니와, 환경문제는 무론 모든 것을 지구촌 사회 중심으로 전제하지 않으먼 살아갈 수 없는‘상호성’이 중시되고 있는 글로벌화한 사회에서‘민족nation’이라는 배타적 이념은 현실적인 영토적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효 만료된expired 기호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사실 날카로운 비평의 눈을 달고 있던 김수영에 의해서도 염려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바의 것이기도11)합니다.

 

또한 동학에 젖줄을 대고 있는 신동엽의 민족적 에스니에 기반한 시적 에토스는‘도교적 종말론’에 말미암은 바 적지 않은 것이니, 그것은 과연 서구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겪은 청나라 민중들의 변화에 대한 염원과 정서를 대변했던 것이요, 그것은 또한 일제와 청일전쟁과 동학란을 겪은 조선 민중들의 염원과 정서를 대변했던 것이니, 그리하여 혁신적인 천도교 기관지 ‘개벽’(1920)이 상징하듯이 이것은 신동엽 시의 본질이 시원적이고 종교적이라는 본인의 주장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민중적인 염원과 민족적인 정서에 닿아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신동엽과 김수영은 상당 부분 일치하먼서도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동엽 시정신의 배경에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동학의 도교적 흐름12)이 중요하게 흐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김수영 시정신의 배경에 또한 이런 도교적 흐름13)이 기저로 흐르고 있는 거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신동엽이 보다 도교적이고 종교적이라먼, 김수영은 보다 도가적이고 철학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동엽이 리얼리즘에 기초한 근대의 민족성을 표상한다먼, 김수영은 로맨티시즘에 기반한 근대의 민중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신동엽의 민족시가 종교적 신비감을 머금고 거대한 숭고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김수영의 산문시는 더러는 모던취에서 벗어나지 모한 시도 적지 않지만 철학적 명료함을 지니며 에세이처럼 읽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시의 어떠함을 대변하는 신동엽의 시가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먼, 김수영의 시는 정치적 무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가 영원한 현재를 다룬다먼, 에세이는 지금, 여기의 시류時流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앞부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전문

 

비교컨대, 같은 하늘이지만  신동엽에게 있어서 하늘은 하나의 도교적 종말론으로 말이 그대로 개벽의 씨가 되기를 바라는‘실재론의 하늘’이고, 김수영에게 있어서의 하늘은 혁명의 배반에 대한 도가적 사유의 개념으로 던져진 ‘유명론의 하늘’입니다. 전자가 거족적인 종교14)의 눈길이라먼, 후자는 철학적인 회의의 눈깔입니다. ‘하늘’은 막연한 상징이고, ‘푸른 하늘’은 명증한 개념입니다. ‘하늘’은 보편적인 색의 세계이고, ‘푸른 하늘’은 개별적인 선의 세계입니다. 색이 감성의 범주라먼, 선은 지성의 경계15)입니다. 그리하여 하늘로 상징되는 신동엽의 민족성향의 시가 구심적 성격을 지닌 서사시 <금강>으로 나아간 것은 따라서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요, 푸른 하늘에 대한 개념에 안다리를 건 시민적 성향의 원심적 성격을 지닌 김수영의 시가 '거대한 뿌리' 등 산문시로 나아간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길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서사시는 본질적으로 고대적 종족의 언어요, 산문시는 소설처럼 근대적 부르주아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조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하는가’에서는 저 아킬레우스 같이 거칠고 솔직하며, 인간적이며 열광적으로 민족의 우상을 섬기려는 서사시다운 뜨거운 열정이 있는가 하먼,‘~되어야 한다’에는 저 오디세우스처럼 신중하고 분별있는, 합리적이고 이지적으로 우상을 타파하려는 산문시다운 차가운 냉정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만큼 신동엽의 시어가 민족적 순수성과 동질성의 회복16)에 닿아있고, 김수영의 시어가 개개 민중의 일상적 삶에 매개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실재론에서 유명론에로, 도교적 신비에서 도가적 사유로 나아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화 천만의 관객을 모은 국민영화‘변호인’에서 “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국가도 만들어진다”는 전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미 ‘국가’가 구성되어 있는 마당-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분단을 극복해야 하고, 이 분단의 원인과 관련하여 외세의 존재를 직시해야 하는 현실 앞에 놓여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고, 이런 사실을 깨치게 하는데 신동엽의 민족서사시가‘개벽’처럼 번쩍하고 빛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에, 그러니까 하루하루 일상을 지탱하며 살아가야 하는 소시민적 삶의 주인공들의 복잡한 심리적 메카니즘과 일상성으로서의 개개인의 미소微小한 생활감정을 담보하기에 민족이라는 거대서사로서의 이념이‘개별’이라는 미시적 주제를 놓치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17)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신동엽이 가장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분단극복’이라는 민족사적 가치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거목으로 그 크고 아름다운 의의를 잃지 않고 있는 가운데서도 빛이 바래고 있는 것은‘목전의 현실’이라는 자본의 괴물에 쫓겨 살아갈 수밖에 없는 너와 나의 꾀죄죄한 소시민적 일상사-‘민족’을 상징하던 동학도 어느새 개인 투자자를 나타내는 ‘동학개미’로 화하고 말았듯이-와 맞물려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3-2, 마침내 도달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철학과 김수영의 산문시

 

4.19혁명은 실로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크나 큰 분수령watershed이었습니다. 장기독재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전체주의 독재정부의 말단적 폐해가 3.15 부정선거로 귀결, 촉발되어 4.19 혁명을 통해 4.26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져 역사의 광장으로 달려 나간 일련의 변화의 물결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의 소중함과‘민중’을 발견하게 했던 역사의 대변혁이었습니다. 김수영에게도 하나의 보편자로서의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묻고 회의하고 시적인 답을 내놓게 하였습니다.

 

예술가들은 변화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날 냉장고가 갑자기 웅! 하고 울기 시작하는 순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처럼, 최인훈의 걸작 <광장> 또한 이런 영향이 없으먼 쓸 수 없었던 저간의 사회역사적 환경이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내건 동학의 2차 봉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알고보먼 이것도 4.19가 그 발화의 계기가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에 존재의 최고 심급으로서의 국가의 필요성을 뜨겁게 노래한 신동엽이 민족주의 시인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니요, 국가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 비판의 눈길을 던진 김수영이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민주주의 시인이 된 게, 그 끝에 거대한 뿌리로서의 '민중'이라는 타자를 발견한 게 또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 또한 궁극적으로는 다만 개인들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18)은 개인이 자신의 특수성을 넘어 너와 결코 다르지 않은 확장된 불이不二의 자아로서 나라는 존재 또한 하나의 '세계-내-존재'로서 그들과 정서적 연대 속에 매개되어 있다는 보다 보편적인 존재로서의 위상을 지닌다고 볼 때, 이것은 그 한국적 형태로서의 또 하나의 공동성으로 국가를 대체할 수 있는 바의 새로운 한국적 시민상의 모습이 아닌가. 김수영이 4.19 이후 국민 개개인의‘일반의지’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인민주권론을 대표하는 루소의 <민약론>을 정독('만시지탄은 있지만')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도대체 민주주의의 본질이 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것은 헤겔의 국가제일주의를 표방한 <법철학>의 정신 또는 저 중세적 왕당파 무리들의 근왕주의를 비판한 것이지 않은가. 이에 우리는 다시 그에게서 유명론적 사실주의자로서의 사유하는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사실이 그러한지 '육법전서와 혁명'을 통해 보것습니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그대들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혁명을---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 28환인데

 

이래도

그대들은 유구한 공서양속(公序良俗) 정신으로

위정자가 다 잘해 줄 줄 알고만 있다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을 내세우는 문인들

투쟁적인 신문들의 보좌를 받고

 

아아 새까맣게 손때 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등에 장을 지져라

4․26 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하기야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문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쓰는 말밖에는 아니 되지만

그보다도 창자가 더 메마른 저들은

더 이상 속이지 말아라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이 시는 4.26 혁명 직후(1960. 5. 25)에 쓴 시입니다. 여기, 4.26 은 바로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을 몰아낸 역사적인 날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인은‘4․26 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고 하먼서 ‘더 이상 속이지 말아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에 대해서도 아니고 백성에 대해서도 아니고 권력에, 국가에, 혁명정부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낸 것이요, 궁핍한 시대의 지식인의 사명을 일깨우는 저 광장의 목소리와도 같은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계몽의 목소리입니다. 이것은 거짓을 폭로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예고하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론입니다. 그러니 김수영의 ‘육법전서와 혁명’은 유명론의 시입니다. 여기, 유명론‘의’시에서, 소유격 조사 ‘의’는 주어로서의 소유격이기도 하고, 목적어로서의 소유격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지금 대상을 찬미하기 위해서 이 시를 쓴 게 아니라 오히려 유명론적 진실의 폭로가 스스로 시인에게 건네주는 시인 동시에 그 시를 받아 이야기하는 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자세히 보것습니다.

 

우선,‘육법전서’는 기성의 도덕과 모럴을 상징하고 ‘혁명’은 전복적 가치를 나타냅니다. 이 육법전서에 따르먼 모든 대한민국의 법은 제1장 총강 제1조 ①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대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개인과 전체, 개별자와 보편자, 그러니까 앞서 말한 바 있는‘국민주권론’과 ‘인민주권론’이 행복한 조화를 이룬 나라입니다. 그러니 불쌍한 백성들은, 아니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만 세우는 문인들은 우리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먼서, 아니 속으먼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딜 대한민국이‘실제로’민주공화국이란 말인가. 혁명은 이루었다만 어디 말뿐이지 않은가. 아직도‘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세상이 아닌가. 그래도 그놈을 우리들의 손으로 끌어내리지 않았나 하고 불쌍한 백성들은 스스로 혁명에 도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의 언어비판의 성격을 지닌 유명론의 날카로운 감각으로 모든 것은 허위이고 속임수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 28환인데

 

라고 말입니다. 이거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금값과 달걀값으로 배부른 그놈들과 불쌍한 백성들의 일상사를 대위법적으로 적시하먼서 경제현실을 가늠하고 정치를 논하고 있는 그를 보니, 그는 적어도 실물경제(학)의 지식을 착실히 구비한 시인이 아닌가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재미있으라고 늘어놓은 단순한 지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배반된 혁명으로서의 혁명의 허구를 그가 올바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육법전서‘의’ 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육법전서’전체를 하나의 개념 단위로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그는 ‘형식적 정의formal justice’가 아니라 ‘실질적 정의real justice’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더 이상 관념적인 언어유희가 아니라 ‘모험’으로서의 실천행위임을 암시합니다. 이 시가 시적 감성보다는 산문적 이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 시를 산문시로 보아도 좋을 또 하나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김수영의 산문시는 한용운의 산문시와 같고 다릅니다. 두 시 모두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용운의 산문시가 망국의 이미지를 환기시키기 위해 ‘님 ’등 상징적 모호함을 특징으로 한다면, 김수영의 산문시는 거짓을 탈은폐시키기 위한 시로 개념적으로 명료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시가 난해시라는 평가는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입니다. 아니 난해시는 커녕 이것은 저 하이네, 랭보, 네루다에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는 매우 수준 높은 하이브로한 저항시입니다. 후일 한국 민중시의 정맥을 잇고 있는 김지하와 김남주의 얼굴이 겹치는 것은 바로 여기에 한국적 민중의식으로서의 허위를 까발리는 유명론적 사실주의로서의 진실의 추구가 오롯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자, 이왕 나온 이야기이니 좀 더 보강을 해 보것습니다.

 

이 시가 하나의 산문시로서 개념적으로 명료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야기story’와 ‘화자teller’가 이중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산문은 간접화법으로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서사적 이중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기호는 사실(소)와 가치(소)로 되어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플라톤(<국가>)의 말대로, 이야기는 자신이 크리세스가 되어 직접 말할 수도 있고 호메로스가, 스토리텔러가 되어 간접적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미메시스mimesis’라 하는 것은 단지 사실만을 모방하고 흉내 낼 뿐이기 때문이고, 후자를 ‘디에게시스diegesis’라 하는 것은 대상을 하나의 가치 차원으로 그 내적 본질을-종차로서의 ‘차이’를 지닌-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가 이중성을 지닌 산문시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원분류(모방적 사실 차원, 서사적 가치 차원)가 가능하다는 뜻이고, 그만큼 성숙하다는 것입니다.

 

1,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모방적 사실 차원;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혁명을 바라는 자가 있다.

 

서사적 가치 차원; 이놈은 ‘바보’다.

 

2,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모방적 사실 차원;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서사적 가치 차원; 소원을 빌고 있는 그대들은 ‘불쌍한’ 자들이다

 

대상과 일정한 개념적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주체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방법이자 모럴입니다. 왜냐하먼 그것은 대상을 자기화하는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자기화, 이것은 하나의 명제를 통해, 그러니까 ‘무엇은 무엇이다’ 라는 규정, 평가로서만 가능한 해석의 세계로 이것은 굴절의 세계이지 모방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저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19)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라는 예술의 본질과도 통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는 이런 사실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름방학 초등학교 교실들 조용하다

한 교실에는

7음계 '파'음이

죽은 풍금이 있다.

그 교실에는

42년 전에 걸어놓은 태극기 액자가 있다.

또 그 교실에는

그 시절

대담한 낙서가 남아 있다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

 

이 작품은 얼마 전 미투 사건으로 생의 고초를 겪은 시인의 작품으로 매우 유니크하고 매혹적인 시입니다. 그도 한때 김수영의 사랑을 받은 한국문학의 기대주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김수영은 호흡이 길지 모하니20) 철학을 해서 대성하라 했다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암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김수영은 대놓고 오입을 하고 마누라에게 얘기하고 자신의 성 경험을 대범하게 시화 했는데 그는 보통의 경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 ‘보통의 경계’란 인위적인 예의범절의 세계인식, 그러니까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유교적 규범으로서의 허위의식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야기하고 시화하는 순간 간접화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니, 그는 분명 한국적 초인으로서의 위버멘쉬입니다.

 

자, 이 시에서 화자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초등학교 교실들’입니다. ‘들’은 여기서 생명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신화적 표지입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교실들이 조용한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괴기적 분위기를 한껏 뿜어내고 있다는데 이 시가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초등학교 교실에 놓인 죽은 풍금이, 태극기 액자가, 무엇보다 교실 뒷벽에 남아 있는 낙서가 화자를 압도하먼서 하나의 ‘거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이미지는 곧 두려움의 출발이고, 이는 종교의 감정과도 통하는 고대적 숭고 이미지입니다. 이 거대한 숭고 이미지의 한가운데 '그것it'이 나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모방적 사실 차원;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

 

다시 말해 여기서 초등학교 교실들과 죽은 풍금, 태극기 액자, 낙서는 절대적인 심급으로 주체가 되어 있고, 화자는 손님처럼 객체로 밀려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화자가 김옥자의 유방에 마귀처럼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haunted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하게 사물에 미신처럼 사로잡혀 있지 않고 미끈덩한 미망의 바다에 풍덩하고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데 시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가 시적 노예의 수사학에, 대상의 찬사에 머무르고 말았다먼 우리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시인은 저 오디세우스가 세이렌siren에게 미혹당하였지만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방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먼 화자는 어티케 해서 김옥자의 유방이라는 거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화자는

 

-서사적 가치 차원;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는)낙서는 ‘대담한’ 표현이다.

 

라며‘거대한’이미지의 세계를 개념적으로‘응축된’세계로 축소시켜 놓았습니다. 참 대담한 표현이라고...순간, 아찔한 욕망을 낚아채 분류의 울타리에 가두고 제어한 것입니다. 마치 저 무시무시한 괴물 폴리페모스를 속이고 냅다 쇠꼬챙이를 눈에 처박은 영리한 오디세우스처럼 그는 무질서한 사물의 세계를 벗어나 일정한 체계를 갖춘 개념의, 사물의, 합리의, 시적 이성인 직관의 세계로의 성숙한 전이transition를 통해 대상을 ‘물끄러미’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그 교실’, ‘그 시절’하며 대상을 과거화, 객화시키고 ‘대담한’ 낙서였다며 개념화시키고, 더구나 마지막 행을 별도의 연으로 처리하는 형식의 묘를 발휘함으로서 비로소 말과 사물의 미신적 융합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미적 거리를 유지하며 중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뭐 시적으로만 보먼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꾸라지와 메기처럼 언어, 이 언어를 다루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끊임없는 미적 길항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철학에서 말과 사물이 일치하는 세계를 ‘고대적 실재론’이라고 하고, 말과 사물이 분리된 세계를 ‘근대적 유명론’이라 합니다. 다시 미학에서는 전자를 ‘리얼리즘’이라 하고, 후자를 ‘모더니즘’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오롯한 의미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근대인의‘분리’ 감정에 기초한 개인주의 모럴에 기초해 있는 유명론적 사고의 일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장점이자 한계입니다. 모더니즘은, 그 분리된 감정으로서의 개인의, 나의, 주어의, 실체의, 근대의 유명론적 자아입니다. 한국시사에서 볼 때, 아마도 한때의 모더니스트 김수영 만큼 ‘나’를 독하게 의식한 시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의 자아의식은 남다른 것입니다. 여기,‘거미’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거미’뿐 아니라 우리가 그의 시를 보먼서 특이하게 느끼게 되는 점 중의 하나는 과연 ‘나’라는 근대적 표지가 너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시에 ‘나’가 벌써 네 번이나 나옵니다. 나는 이미 언어에서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프로이트식 무의식을 소쉬르적 구조 개념과 박치기 시켜 일가를 이룬 정신분석이론가가 자크 라캉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단 하나뿐인 불멸의 저서, <에크리>에서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무의식이 하나의 이드id이자 리비도libido로서 인간의 깊은 심층심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욕망 구조라고 본 것처럼, 꼭 그처럼 그는 다양하고 복잡한 언어가 사실은 하나의 형태라는 소쉬르적 언어구조, 하나의 ‘기호소’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 ‘나’는 바로 하나의 무의식이자 기호소로 김수영 초기시의 구조적 비밀을 간직한 ‘의미소seme’인 것입니다.

 

1954년 10월 이 시를 쓸 당시. 그 때는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전쟁, 폐허, 죽음, 상실, 고아 등 당시는 모두 실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였습니다. 여기저기 시적 먹잇감이 즐비하였습니다. 전쟁고아처럼 버려진 1950년대, 그것은 그야말로 문둥이 같은 시절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말이죠. 김수영도 이런 시대의 열병의 한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야말로 설움이 복받치던 시절이고, 개인으로서는 청춘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를, 특히 서정시를 하나의 근대의 개인의식의 고백의 형식으로 본다먼, 그러니까 여기 시적 화자를 그대로 김수영으로 본다먼 여기서 우리는 그의 설움의 정체가 바로 ‘욕망의 결핍’에 닿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핍은 있지 않음, 부재의 기호입니다. 수용소 이후, 그는 영어교사가 되기도 했다가 영어학원을 차리는가 하면 영어번역 일을 하고, 양계를 하먼서 ‘실 가닥 같은like a thread’ 생계를 겨우 이어 나갑니다. 이런 일련의 스케치는 그의 시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다시 말해 왜 그의 시에 ‘설움’이라는 정서와 거미, 풍뎅이, 도시의 일상, 영어 등 실존적이고 모던적 ‘이미지’, 그리고 ‘나’라는 근대적 표지가 빈번하게 등장하는지, 다시 라캉 식으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언어가 그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해명의 표지가 될 수 있는지, 즉 우리는 강박처럼 반복되고 있는 시적 언어를 통해 그의 의식의 밑바닥 깊은 곳에 불우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모더니즘적 날카로운 자의식이 맷돌처럼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여간 악마의 작업을 통하여서라도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나의 위치이다(‘무제’)

 

그러나 이 자리에 서 있는 존재의 근거인 내가,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내가, 그런 가운데서도 그 무엇을 위하여 도는 것인지 모르고 도는 팽이처럼 “신기하다”('달나라의 장난')는 것, 이것이 바로 그를 슬프고 원통하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그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운명 앞에, 바로 그곳에 불가피하게 마주친 정신의 코기토, 대자적 존재로서의 ‘나’가 있었던 것입니다. 4.19 이후 그의 시가 마치 용암이 솟구치듯 극렬한 감정의 포즈를 취하며 솟구쳐 오른 것도 이렇게 남다른 자의식이 반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김수영이 개인적 모던취의 단계를 지나 그 한국적 의식 형태로서의 '민중'을 발견하는 과정은 우선 관념의 허위를 벗기고 스스로를 무화시키며 자신을 외화시키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습니다. 4.19를 계기로 그의 시적 대상은 나/너에서 우리들/그들로, 불쌍한 백성/그놈들로, 대적 이미지로 다시, 민중으로, 모든 무수한 반동인 거대한 뿌리로, 검은 가지, 풀로 이어지먼서 개념에서 사물화한 이미지로 실뿌리처럼 내려앉습니다. 그러먼서 그는 아프기 시작합니다. 개인적 설움에서 민중의 고통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다시 몸이 아프다//조용한 봄에서부터/조용한 봄으로/다시 내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적들과 함께/적들의 적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아픈 몸이’) 내가 그들로 인해 몸이 아프다는 것은 나와 그들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정서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인자 서서히 이 땅의 무당이 되고, 이 땅의 민중 시인이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국가’와 ‘개인’이라는 보편자와 개별자로서의 서구 근대의 이념이 허구라는 관념의 껍질을 깨고 그 한국적 이념 형태로서의‘민중’이라는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무화시키고 자신을 외화시켜야 했는데, 즉 자신을 외화하여 민중을 근대의 배타적인 타자가 아닌 인크루시브한 두터운 공동운명체로서의 탈근대적 타자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무화無化, nullification’시켜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 김수영에게서 그 한국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전근대의 ‘집단’도 아니고 근대의 ‘개인’도 아닌 포스트 모던한 탈근대성으로서의 ‘민중’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보편자’도 아니고 ‘개별자’도 아닌 ‘사회적 자아’입니다. 나와 그들이 결코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긴밀한 연대로서의 유대의식입니다. 그러니 그들과 한몸이, 아니 온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무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먼 '나'라는 근대의 견고한 성채로서의 데카르트적 유아론唯我論21)을 폭파시키지 않고서는 그들과 결코 하나가, 온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온몸'은 바로 이성(머리) 중심의 근대적 헤겔주의의 모더니즘에 대한 본원적 비판, 회의가 아닌가. 이것은 그대로 나와 너는 둘이 아니라는 저 원효의 민중사상인 불이사상不二思想22)과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은 김수영의 시정신을 이루는 기조가 그 자신의 말("여태껏 시를 긁적거리게 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가 농사를 짓는 것 이외에 불교를 믿고 있다는 것이 또한 무언중에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반시론')대로 불교에서 연원淵源하고 있거니와, 그는 다음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의‘무無’23)사상에 영향을 받은 니체와 하이데거 등 서구적 실체를 부정하고 있는 전래의 불교의 무아無我철학과 도가의 무위無爲사상에서 강물을 길어와 그 고유한 한국적 민중사상으로서의 '무성nullity'을 자기화, 시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백성들이

머리가 있어 산다든가

그처럼 나도

머리가 다 비어도

인제는 산단다

오히려 더

착실하게

온몸으로 살지

발톱 끝으로부터의

하극상이란다

 

넓적다리 뒷살에

넓적다리 뒷살에

알이 배라지

손에서는

손에서는

불이 나라지

온몸에

온몸에

힘이 없듯이

머리는

내일 아침 새벽까지도

아주 내처

비어 있으라지......

 

-'쌀난리' 중에서 1961.1.28

 

여기, '온몸의 시학'('시여, 침을 뱉어라')으로 완성되고 있는 김수영의 시정신이 ‘비어있음’으로서의 무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김수영의 시를 가로지르는 철학이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그‘무성nullity’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적 성취가 실존적이고 개인적이며, 동시에 노장사상과도 유사함을 암시합니다. 노장사상은 현대의 실존철학입니다. 두 사상 모두 난세라는, 생명의 위기에서 탄생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은 국가에 대한, 허울 좋은 명분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으로서 모두 무명론이고 또한 유명론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도 마찬가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도연명의 시인지 김수영의 시인지 모를 졸박한 전원취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孟夏草木長  초여름 초목 자라나니

繞屋樹扶疎  집을 둘러싼 나무 울창하네.

衆鳥欣有託  새들이 몸 의탁할 곳 있음 기뻐하듯

吾亦愛吾廬  나도 역시 내 움막 사랑하네.

旣耕亦已種  밭 갈고 또 씨 뿌리고 나서는

時還讀我書  때때로 또 내 책을 읽네.

窮巷隔深轍  깊숙한 골목길은 관리들의 발길 멀리 하지만

頗廻故人車  친구들 수레조차도 멀리 우회시키네.

歡言酌春酒  즐거이 얘기하며 봄 술 따르다

摘我園中蔬  우리 뜰 안 채소를 뜯기도 하네.

微雨從東來  부슬비 동녘으로부터 몰려오면

好風與之俱  시원한 바람도 함께 실려오네.

汎覽周王傳  그러면 목천자전을 뒤적이다가

流觀山海圖  산해경 그림을 들추어보기도 하네.

俯仰終宇宙  잠깐 동안에 우주를 다 돌아보게 되니

不樂復何如  이것이 즐겁지 않다면 또 어찌하겠는가?

 

-'독산해경', <도연명 시집>, 김학주 역주, 민음사, 1975

 

여기, 도연명의 '도잠陶潛'은 도연명의 본명이지만 잠수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은자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잠수는, 뭐 전원생활은 어티케 하는지...그리하여 '독산해경' 연작은 스노비쉬한 속세의 명리를 떠나 술과 책을 벗하며 깨끗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자연의 풍도를, 뭐 도가취를 잘 보여줬거니와, 중요한 것은 이것이 드러븐 세상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현대의 나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전혀 낯설지 않은 현대적 지속성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현대에도 졸졸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동양적 실존의 실개천이 아닌가 말입니다. 도가취가 물씬한 저 실존철학의 비조 하이데거의 횔덜린 사랑이 또한 이것 개인취가 아닌가 말입니다. 거기 드러븐 시상을 전복하것다는 위반으로서의 민중의 꿈과 열망이 하나의 환타지로, 도가의 경전인 <산해경>으로 상징되고 있지 않은가. 거기서 또한 공자가 주물러 놓은 <시경>의 지배 세계에 맞서 하위 장르로서의 중국적 소설이 시작되었다24) 하니, 이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니 우리의 김수영이 왜 한때 이 도잠을 본떠('신귀거래' 연작 9편)잠수를 탔는지. 에잇! 돌아가자歸去來兮! 전원장무호불귀田園將蕪胡不歸라니...전원이 장차 황폐해지려 하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것는가. 이제껏 내 마음 몸 위해 부림 받아 왔거늘 그 무엇 때문에 그대로 고민하며 홀로 슬퍼하는가? 이것은 분명 김수영 개인이 마주친 거룩한 고독의 철학이고 달콤한 실존의 그림자임에 분명합니다. 무론 이것은 정치적 무의식이 강했던 김수영이 도연명을 빌어 그처럼 도피적이고 염세적 사유를 드러낸 직접적인 원인이 5.16 쿠테타로 인한 정치적인 것이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잠수를 통해 오히려 그의 사유가 더욱 풍성해졌다는 점입니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라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팔월의 하늘은 높다

높다는 것도 이렇게 웃음을 자아낸다

 

이것은 아홉 편의 신귀거래 연작 중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기능을 갖는 것은 ‘풍자satire’라는 시어입니다. 그렇게도 심각하고 예민하고 날카로운 의식을 지닌 그가 갑자기 바보가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해학과 다릅니다. 해학이 보다 민중적 요소를 지닌 것이라먼, 그는 어쩔 수 없는 계도적 지식인으로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권력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웃음을 그린 작품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볼 때, 이것은 상당한 변화입니다. 그러나‘에엣, 더러운 시상!’ 하는 실의와 좌절 한가운데 신기하게도 거기서 심리적인 여유가 생기고 비바람 속에서도 풀꽃처럼 견디고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새삼 주목하게 됨을 짐작케 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도가적인 여유와 관대함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풍자를 해탈, 곧 죽음과 등가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시적 전략으로 그는 스트롱 맨과 상대하는 하나의 방법적 트릭을 재인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에코의 <장미의 이름>만 보아도 이것은 명백합니다. <장미의 이름>은 웃음이, 냉소적인 거리두기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해방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근본적인 믿음25)에 기초합니다. 여기, 전체주의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로 독단적인 신화의 화신인, 웃지 않는 가련한 수사 호르헤가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A monk should not laugh. 수사는 웃으먼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먼 하나의 유명론으로 웃음과 풍자는 지배문화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 조롱, 비판하는 약자의 무기임을 그 또한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김수영에게도 마찬가집니다. 대체 사람의 죽음이 왜 우스웠을까요? 저 악명 높은‘인혁당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은 뭐 무소불위의 권력 아래서 죽음은 파리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 죽음은 그리 심각한 게 아니라는 반어적 깨달음이 아닐까요? 이 죽음을 관장하는 자들이 높은 자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우리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체 권력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수영은 이렇게 불온한 시인이었고, 저 아테네의 등에 같은 위험한 철학자가 아니었나 말입니다. 그러니 심각한 죽음을 오히려 조롱하고 있는, 저 일방적인 찬양을 갖다 바친 국가철학의 상징인 시인 호메로스를 비판한 산문정신의 대변자 소크라테스처럼 그 또한 이렇게 아이러니를 쓰지 않았나 말입니다. 하여튼 김수영은 이렇게 해서 그 고유의 무성을 통해 자신을 넘어 낮은 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당파적 근거를 창출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초기에는 모더니즘적 경향의 시를 창작하였으나 4.19 이후 현실 참여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내고 있다는 점도 바로 이런 산문정신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하나의 형식주의로 언어와 더 가깝고, 리얼리즘은 하나의 내용주의로 생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이는 결국 시인 김수영이 모더니즘이라는 현대시의 적통을 이어받았지만 이에 머무르지 않고 탁류 같은 역사의 현실에 부딪치먼서 좌우의 이념을 넘어서, 마치 국제시장에서 모든 것이 얽히고설키면서 만화경을 이루는 것처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라는 양대 지류를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예술적 지평의 세계로, 삼각주 델타지대로 합류시키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예술적 지평의 세계를 제대로 보여준 시는 단연 ‘거대한 뿌리’의 세계입니다.

 

......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光化門)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이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女史)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와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統一)도 중립(中立)도 개좆이다 은밀(隱密)도 심오(深奧)도 학구(學究)도 체면(體面)도 인습(因習)도 치안국(治安局)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 대한민국관리(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無識)쟁이,

 

이 모든 무수(無數)한 반동(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삼인도교(第三人道橋)의 물속에 박은 철근(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거대한 뿌리’, 1964. 5 <사상계>

 

여기, 이 ‘거대한 뿌리’로서의 세계의식의 한가운데에 그러나,‘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근대적 자아로서의‘나’입니다. 그러먼서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無識)쟁이, 이 모든 무수(無數)한 반동(反動)”이, ‘시꺼먼 가지’를 가진 이 땅에 발붙인 거대한 뿌리라는 리좀적 인식에 이르러 김수영은 드디어 ‘나’를 넘어 ‘풀’로 대표되는 이 땅의 빛나는 '타자', 새로운 신성가족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시인 김수영!

 

그는 어티케 ‘나’를 넘어 ‘타자’라는 새로운 신성 가족, 민중을 발견하게 되었나. 그러니까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무수한 반동들에게 그는 어티케 해서 ‘거대한’ 수사의 옷을 입히고, 새로운 해석의 눈을 뜨게 되었나. 그것은 우선, 전통의 재발견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대로 이른바 한국의 현대문학은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지 모했다는, 즉 한국문학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이른바 50년대의 자괴적인‘전통단절론’을 일시에 뛰어넘는 시사적 쾌거가 아닌가 말입니다.

 

버드 비숍여사(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歷史)라도 좋다

 

자, 여기 ‘썩어빠진 대한민국’이라는 거침없는 표현에서 우리는 당시의 대한민국이 어떤 정치적 사회적 부패수준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버드 비숍여사라는 시적 코드입니다. 그는 왜 그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고 오히려 황송하였을까요. 그것은 곧 버드 비숍여사가 나와 타자,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형식과 내용, 대한민국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모순을 일치시키는 어떤 문화적 상징을 내포하는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버드 비숍여사는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자 영국 왕실과 연결된 지체 높은 성직자 집안의 딸로 한국을 네 차례나 방문하여, 이를 기초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에세이를 남긴 세계적인 여행가이자 작가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엘리자베스 시대라는 영국 제국주의가 가장 기승을 부릴 때 세계와 한국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결코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그는 우리를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식민지 약탈에 대한 대속代贖 개념으로, 문명인 대 야만인의 구도로 한국을 보지 않고, 가령 한국의 무속 신앙을 이야기 하먼서 일본의 神道를 연상하게 하고, ‘무당’을 주술사에 비교하고 우리의 밤 문화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등 문화는 그 나름대로 모두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탈근대적이고 래러티브한, 문화상대주의적 다원성이라는 보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에게서 현존재를 발견한 그가 상대주의 문화사학자 비숍에게서는 탈근대성으로서의 문화의 상대적 가치를, 우리 문화의 뿌리의 중요성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리하여,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이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보았을 때 매우 선구적인 인식으로 시인이 당대 현실을 어떻게 껴안을 것인가와 관련하여 그동안 대자적 관점을 유지하며‘썩어빠진’정치 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비판적 지식인의 태도로 볼 때, 이것은 주목할 만한 현실인식의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여기,‘시꺼먼 가지’로 상징되고 있는‘타자’라는 새로운 신성가족, 민중의 발견은 또한 기성질서와 이를 대변하는 가치에 대한 극렬한 적대의식에서, 허상의 껍데기를 벗기는 래디칼한 발본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공통된 그 무엇’으로 상징되는 기성질서와 이를 대변하는 지배담론에 대한 극렬한 적대의식을 대변하는 시적 대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와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統一)도 중립(中立)도 개좆이다 은밀(隱密)도 심오(深奧)도 학구(學究)도 체면(體面)도 인습(因習)도 치안국(治安局)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 대한민국관리(大韓民國官吏),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성질서와 가치를 상징적으로 열거하고 있는 대목에서 우리는 김수영의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리얼리즘과 민족주의에, 뿐만 아니라 관료주의와 일제유산, 아이스크림으로 연상되고 있는 ‘근대적’ 표상들에 대해 매우 극렬한 증오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근대적 ‘권력장치’를 가리키는 기호로, 여린 ‘풀’을 짓밟고 선 힘센 ‘나무’의 세계가 아닌가 말입니다. 자, 그러니 잠시 ‘풀’과 ‘나무’에 대해,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의 막대기를 통해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며 나무로 상징되고 있는 근대 분류학taxology의, 권력의 장치를 현란하게 해석하며 비틀어 놓고 있는 탈근대 철학의 갓돌capstone, 들뢰즈를 통해 보것습니다.

 

잘 알다시피, 데카르트에서 비롯된 근대의 세계는 이성의 가치를 중심으로 돌고 도는 합리적 영토의, 질서의 세계현실이었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은 ‘남여’처럼 ‘분류’라는 이름의 명찰을, ‘진위’처럼 ‘이항대립’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덕체’처럼 ‘질서’라는 나무의 세계로 편입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중심과 변두리, 유식과 무식, 동일성과 차이, 우리와 그들, 타자로 하이어라키하게 계열화, 서열화, 제도화, 가치화, 내면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26)가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그것은 죽음의 서사이지 생명의 서사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중심을 통해, 저 ‘공통적인 그 무엇’을 통해 돌고 돌뿐이지 스스로 돌고 도는 팽이 같은 수많은 나들을, 거대한 뿌리를, 저 무수한 반동들을, 힘없는 풀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의 반-국가주의, 앙띠-플라토니즘으로, 이승만과 자유당과 이후 박정희 정부에 의한 전제적 독재가 횡행하고 있던 당시 ‘해면’ 같고 ‘문어발’ 같은(‘적敵’) 현실에 대한 감정의 격발로, ...와...와...와...도...도...도...다연발 산탄 같은 무차별한 수평의 문자로 마비된 사회의 공기를 뚫고 날아가는 감정의 격발이자 불꽃같은 언어의 조명탄이 아니었는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저 근대의,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주의에 대한 심리적 거부를 넘어 공공연히, 아니 이조차도 넘어 이 모든 이념을 본위로 하는 근대의, 분류의, 나무의, 죽음의 서사에 대해 ‘좆대강이나 빨아라’라고 극혐에 가까운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과연 시인 김수영의 문화 검투사다운 진면모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대체 그의 이렇게 거의 발작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을 래디칼한 문화적 반응은 어디서 나왔더란 말인가요.

 

그것은 그가 6.25를 전후 생사를 넘는 ‘꿈같은 일’을 겪은 포로생활과 이후의 가난 체험,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경험을 통해 추출되어 나온 감정구조로서 어두운 시대의 ‘썩어뻐진’ 우물에서 흘러 나왔다고 볼 수 있지만 일단 이성적으로 보더라도 그의 이런 인식은 거저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 두터운 지식을 쌓은 흔치 않은 문화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실생활이나 문화의 밑바닥의 정밀경精密鏡으로 보면 민족주의는 문화에는 적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언어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요, 그 생활은 민중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자연히 언어가 바뀐다. 전자가 주요, 후자가 종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그러니까, 여기 ‘민족주의’는 문예사조 상으로 근대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마르지 않는 물줄기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뭉치면 산다’는 이승만식 국가독재를 함의하고 있고, ‘공통적인 그 무엇’(‘달나라의 장난’)을 가리키는 기호적 표지입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를 벗어나 민중들의 실생활이나 문화의 밑바닥을 보건대, 거기 제3한강교의 단단하게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처럼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無識)쟁이” 등 뭐‘무수한 반동’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 하나의 주의, 이즘으로서의 이념보다는 생활의 실경을 통해 삶에 기투하고 있는 참여시인으로서의 실제 면모를 보게 되거니와, 그것은 과연 민중의 생활을 중시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민중적 관점을 지닌 그에게 이 삶을 유지하고 지탱시켜주는 무수한 반동들의 세계는 거대한 뿌리의 세계라는 인식이 맘모스와 겹치면서 ‘시꺼먼 가지’를 포착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시꺼먼 가지’로 상징되고 있는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인 민중들은 드디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어둠 속에서 미광微光을 발하게 됩니다.

 

여기! ‘시꺼먼 가지’는 분명 나무줄기가, 기성체제가 아닌 무수한 반동들을 가리키는 변두리의, 차이의, 소외된 자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시적 이마주입니다. 그런데 왜 그 가지는 시꺼먼가. 이것은 ‘거대한’과 더불어 또 하나의 수사이자 해석이지 않은가. 그러나 잘 보먼 아는 일이지만, ‘시꺼먼’ 것은 결코 어두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해석으로“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거대한 개념과 등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무수한 반동들, 이제 다시 고쳐서 하나의 상징으로 시꺼먼 것은 맘모스처럼 거대한 민중인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시인 김수영이 그 ‘공자연孔子然’하던 태도에서 ‘노자연老子然’하는 태도로 시각이 변한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이제 근대적 자아의식에서, 달리말해 유교적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탈근대적 타자의식으로, 그러니까 무수한 반동들에 대한 ‘정서적’ 연대를 통해 도교적 민중의식으로의 자기 변신을 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꺼먼 것은 동양적 사유의 지도리로서 뿐만 아니라 민중종교화한 도교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27)검고 또 검은 것은 모든 묘리와 변화가 나오는 문을 상징합니다. 이 중묘지문을 감당해내는 것이 바로 ‘시꺼먼 가지’라는 데에 우리는 돌고 돌아 저 들뢰즈/가타리의 ‘리좀rhizome’과 놀라운 상사相似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거대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꺼먼 ‘가지’는 나무로 상징되는 죽음의, 근대의 서사에 대한 생명의, 탈근대의 들뢰즈적 서사를 호명시키고 있는 시대적 의미로서 볼 때도 우리는 여기서 왜 ‘김수영과 그의 시대’가 아니고 ‘김수영과 이 시대’인지를 확인하게 되고, 이는 과연 김수영이 ‘죽은 시인a dead poet’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시적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는 크로노토포스한‘문제적 시인a problematic poet’인지 오롯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만일 철학자라먼 그는 분명 한국적 민중의, 을乙의 철학자입니다

 

여기, 김수영의 시적 성취를 넘어 한국적 사유의, 뭐 한국정신의 어떠함을 묻는다 할 때에 있어서 하는 야기지만 우리는 여기 '거대한 뿌리'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정신의 실체로서의 민중적 사상의 세계사적 의의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 마르크스의 말대로 계급의식에 기초한 적대적인 프롤레타리아 의식만도 아니요, 그렇다고 말로만 국민! 국민! 하고 떠들어대는 저 가식적인 국뽕내기들의 가증한 허위의식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과연 김수영이 발견한 고유한 사유이고, 김수영이 이 땅에서 찾아 낸 소중한 철학의 씨앗이 아닌가.

 

자, 그렇다먼 대체 김수영의 사유, 김수영의 철학은 어티케 개화되었나. 그것은 기름심지에 성냥불을 그어대듯이 대상에 의미의 불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고, 특별한 해석을 가하고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대상은 무엇이고 가치는 또 뭐란 말인가 그가 예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주변에서 을마든지 볼 수 있는 주변부 인생들이고 비에 젖어 살아가는 손창섭식 따라지 인생, 잉여인간들입니다.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중요한 것은 이들,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라는 대상에 대한 서술자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결코 어중이떠중이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그들은 그러나,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라는 거 아닌가. 이들이, 좆도 아닌 그들이 결코 좆만한 인간이 아니라 좆뿌리가 가장 중요하듯이 그들이야말로 그 시적 진실과 철학적 진상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결정인determinants’이자 이 땅을 구성하는 ‘기본 핵자sub-stones’로서 그는 이들에 대한 거리낌 없는 애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이들이야말로 이 땅의 '거대한 거대한 뿌리' 라고 거듭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한 그만의 해석의 눈깔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새롭게 부여한 해석학적 인식을 통해 이 땅을 지탱하고 있는 이 모든 무수한 반동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거대한 뿌리임을 제언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마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소신을 넘어 소명을 지닌 이 땅의 위대한 시인을 다시 보게 되거니와, 이것은 참으로 종교적 높이와 철학적 깊이를 지닌 낮은 자들의 철학이, 을乙의 철학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

 

-묘사적 사실 차원; 여기, 이 땅에는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無識)쟁이 같은 무수(無數)한 반동(反動)들이 살아가고 있다.

 

-서사적 가치 차원; 이 모든 무수한 반동들이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다.

 

이렇게 이 땅에서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돌고 도는 근대 민족주의의, 죽음의 영토를 넘어 ‘스스로 돌고 도는’ 주체적이고 다양한 탈근대적, 생명의 영토를 새롭게 발견한 한국의 문제적 시인으로 자신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시인의 시적 도정에서 우리는 뭇별처럼 빛나는 한국현대시문학사의 은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있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있게 자신만의 쟁그러운 시적 표정과 자신있게 자신만의 시적 포즈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의 시적 성취의 조건에서, 행동의 근거로서의 시의 모럴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기, 일상에서 마주친 개별적 언어가, 비어卑語로서도 그대로 피어나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되는 한국어의 발화를 보것습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 원 때문에 十 원 때문에 一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1965 전문

 

온 몸의 시학을 지닌 그는 한 마리 야생사자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한 마리 토끼라도 최선을 다해 질주할 줄 아는 평원의 바람이었습니다. 일상과 시는 그에게로 와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봅니다. 그러먼 우리는 예의 그 청교도의 자세로 자신을 심하게 채찍질하고 있는 도덕적 염도鹽度를 지닌 그를 봅니다. 자신이 점점 소시민이, 쁘티 부르주아가 되어가고 있다고 자학하고, 자신이 점점 옹졸하게 소심해지고 있다고 반성하고, 또 자신이 좀스런 이기심에 젖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고 자신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래디칼하게 자신을 치열하게 반성하고 날카롭게 성찰하고 있지만 기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채찍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 이건 참 아이러니 아닌가. 그리하여 여기,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하는 대목은 김각적 비유가 뿜어내는 참으로 통쾌한 수사의 자유 펀치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하여 비록 저 왕궁 대신에, 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마는 소시민이 되었지만, 그리하여 한번 정정당당하게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환경에 저항하지 모하고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인 태도로 분개하고, 증오하고, 반항할 뿐이지만, 또한 그러한 태도가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권력을, 저 왕궁을, 저 왕궁의 음탕을 유지시켜주는 토양에 알게 모르게 동참하는 줄을 알지만...다시 말해 그 역시 소극적인 성찰에 그치고 자기연민이나 탄식, 불평에 머물고 말지만...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러한 불평을 가식 없이 드러내고 있는 그의 언어에서 신기하게도 극렬한 정서의 쾌감을 맛보고, 시적 카타르시스의 밑창을 확인하며, 일상에서 얻어 터지며 굴러다니고 있는 비어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리하여 여기, "오십원짜리 갈비,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 야경꾼, 옹졸하다, 거즈, 놀리다, 피도 안마른 애놈, 이발쟁이, 땅주인, 모래, 바람, 먼지, 풀..." 등 이 모든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일상 세목들이, 무식한 반동들이 그대로 자기반성과 성찰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쌀알이 밥알이 되는 혁명처럼 일상어가 또 그대로 시적 사유의 날선 비수匕首가 될 수 있음을 봅니다. 한국어는 그에게로 와서 비로소 비근한 일상어가 그대로 시꽃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드디어 시적 바다라는 처녀지에 도달한 그 시,‘풀’을 보게 됩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과 ‘바람’의 변증법적 모순과 지양을 엿볼 수 있는 이 시의 모티브는 의외로 공자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군자의 덕이 바람과 같다면 소인의 덕은 풀과 같은 것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쏠리게 마련이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논어> ‘안연’편) 당시의 관념으로 본다먼 군자는 당연 지배자이고, 소인은 백성들입니다. 힘이 센 지배자를 상징하는 바람이 힘이 약한 백성을 뜻하는 풀 위에 불면 반드시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는 그대로 군자, 곧 지배자는 백성에게 덕을, 곧 올바른 도덕정치를 행하라는 완곡한 주문에 다름 아닙니다.

 

과연 그런지. ‘풀’을 봅니다. 1연에서 풀은 동풍에 나부껴 눕고 우는, 다시 말해 피동적인 피지배자의 모습으로, 운명에 순응하는 이미지로 비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2연에 이르면 풀은 벌써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울고, 일어나는 능동적인 ‘자각’을 한 모습으로, 그 운명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주체적 형상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3연에 이르면 1, 2연의 정과 반의 대립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 변주되고 지양되면서 변증법적 지경을 이룹니다. 다시 말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났다 울었다 웃었다, 다시 눕기를 반복하는 풀과 같이 민초들의 삶과 역사 또한 넘어지고 일어나고, 다시 넘어지고 또 일어나는 일련의 창조적 순환과정을 보여줍니다.

 

‘풀’은 또한 형식과 내용의 아름다운 통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극적인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아내고, 내용은 형식으로 ‘물끄러미’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그대로 김수영의 시적 성취가 그 극에 달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공자의 생활난’을 되새김합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풀’을 통해 비로소 그의 시적 명제가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김수영의 대표시 ‘풀’은 차이와 반복, 생성의 기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릇 모든 생명의 역사가 그렇듯이, 이 시에서 ‘풀’ 또한 하나의 생명으로서 울고, 웃고, 눕고, 일어나고, 다시 울고, 웃고, 눕고, 일어나는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영원회귀eternal return의 법칙을 따르는 자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영원회귀의 니체적 법칙을 따라 ‘이양異樣’과 ‘변양變樣’을 거듭하면서도 거기 무언가 변치 않고 이어가고 있는 생명의 보편적 구조,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도道’를 지닌 삶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이 시는 유교에서 모티브를 취하고 있지만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거듭 반복되고 있는 '풀'과 '동풍東風'과의 상호 모순적인 두 이미지의 변증적 교직과 지양을 하나의 상징으로 하는 생성-소멸-재생의 끊임없는 풀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뿌리로서의 생명의 역사를, 쉽게 물러설 수 없는 도의 작용反者道之動으로서의 민초적 삶의 도가적 패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반복’은 단순한 반복, 억압이 아니고 못난이들의 어설픈 코스프레도 아닙니다. 끊임없는 차이를 생성시키고 있는 다양체로서의 기의적 문맥을 드러내고 있는 반복, 그리하여 풀은 동풍에 의해 눕고, 그러나 다시 일어나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풀의 역사, 풀의 삶을 통해 우리 또한 풀처럼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 나가지 않으먼 안 된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리하여 다시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는 전언은 얼마나 진실한지...아니 ‘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는 것은 을마나 깊은 ‘미적 강도an aesthetic intensity’를 지닌 표현인지...진실은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고, 부엉이처럼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것인지. 그리하여 헛된 꾸밈이 아니라 다시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김수영이 도달한 참으로 기절할만한 거대한 진실의 세계가 아닌지...

 

 

마무리

 

시인 김수영!

 

그는 과연 서구의 합리적 이지와 동양의 고전적 소양, 송곳style같이 날카로운 모던한 감각을 지녔으면서도 고유의 민중적 전통의 뿌리를 깊이 있게 의식했던 한국의 보기 드문 문화 검투사a culturl gladiator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4.19, 5.16 등 거친 탁류의 시대를 ‘온몸으로’ 시를 쓰며 살다 간 김수영의 삶을 재구하고, 그가 이루어 낸 시적 성취를 통해 시적 모럴의 문제, 즉 시인으로서 민중적 삶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자기반성과 노력의 한 예를 구체적으로 적시해 보았습니다. 나아가 그가 보여준 시적 성취가 단순한 문학적 행위를 넘어 거기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서의 사상의 유전자a gene of thought가 무엇인지 밝혀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해 보았습니다.

 

우선, 그가 시인으로 거친 탁류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 또한 그가 범상한 시인이 아니라 한국시단의 ‘야생 사자’ 같은 존재였다는 것, 다시 말해 모두들 저 정글의 하이에나처럼 으르렁거리지만 그가 여전히 쉽게 덤비지 모하는 한국시단의 왕자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 이에 나는 거친 탁류의 물결을 살다 간 김수영의 간단치 않은 삶과 시력詩歷을 통해 그가 왜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이었으며-비록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그의 글에서 어딘가 철이 지난 느낌을 받았다 하더라도28)-그가 오늘 왜 여전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 인문과학적 고뇌가 필요한-인문과학은 지금 비록 ‘죽은 개’ 취급을 받고는 있지만-부리크한 현실에서 여전히 중요한가를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자, 그렇다먼 대체 시인 김수영,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는 진정한 참여시가 없는 반면에 진정한 퍼멀리스트의 절대시나 초월시도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브레히트와 같은 참여시 속에 범용한 포멀리스트가 따라갈 수 없는 기술화된 형태의 축도를 찾아볼 수 있고, 전형적인 포멀리스트의 한 사람인 앙리. 미쇼의 작품에서 예리하고 탁월한 문명비평의 훈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볼 때, 참여시와 포멀리즘과의 관계는 결코 간단하게 구별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고정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중한 시론의 문제는 제쳐놓더라도, [현대시]지의 최소한도의 내용을 가진 김영태, 주문돈, 이수익, 이해령의 작품에서 우리들이 미흡하게 느껴지는 것은 언어적 윤리 이전에 사회적 윤리와 인간적 윤리와의 격투의 자죽이 너무나 희박하다는 것이다.

 

-시월평, ‘새로운 포멀리스트들’

 

시인에게 시를 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가 그냥 써지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시대의 ‘거울’이, ‘문장’이 되어야 하고 시대의 새로운 ‘입법자’가 되어야 할 시인의 소명을 염두 해 두고 볼 때, 아니‘문학은 사회의 공기이자 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 볼 때에 있어서도 그가 숨 쉬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떠나 다만 언어를 간질이는 존재시(순수시=절대시=초월시=관념시=고독시=개인시=몽롱시)만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는 글을 쓴다는 일이 세속사하고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 생활 그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인이었습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노동에 속한 것이었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글쓰기를 하나의 삶의 노동으로 의식한 최초의 시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탁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평생을 직업 없이 매문과 양계로 살았지만 ‘온 몸으로’ 시를 쓴 김수영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은 그가 자기결정적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주체적인 삶의 모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 윤리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아니 쉽게 내다버려서는 안 되는 ‘인문적’ 벼리綱라는 사실을, 시를 쓰는 일은 곧 가치와의 일대 격투를 벌여야 하는 일임을 그가 형상적 인식이라는 무기로 일깨워 줬기 때문입니다.

 

시인 김수영, 우리는 그를 자유의 시인으로, 그것을 불가능케 한 여건들에 대해 노래했던 시인으로 볼 수도 있고(김현), “진정한 아웃사이더로서 한국 모더니즘의 위대한 비판자였으나 세련된 감각의 소시민이요 외국문학의 젖줄을 떼지 못한 도시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민중시학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염무웅)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가에 떠 있는 뜬풀만 살짝 걷어내도 거기 놀라운 물 속 풍경이 펼쳐지듯이, 언어의 거품만 살짝 걷어내어도 우리는 신기한 풀들의 세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풀들이 버티고 서 있는 기둥은 바로 당대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시적 재능 못지않게 당대의 지배적 윤리와 치열하게 격투를 벌일 줄 아는 ‘도덕적’ 용기를 그 정신적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육박전을 치르듯 그의 시가 때로 서정시의 시적 허용의 궤를 벗어나기도 하고, 한국어의 보편 문법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은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먼 그는 무엇인가요. 리얼리스트인가 포멀리스트인가. 그러나 내용이든 형식이든 이건 너무 개인주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요. ‘내용주의’는 하나의 사실 절대주의로서 승리의 서사로서의 부르주아 속물들의 물화적 순응에 빠져있고, ‘형식주의’는 하나의 가치 상대주의로서 현실을 떠난 부르주아 엘리트의 언어적 자홀에 취해 있지 않은가요. 자, 여기! 하나는 현실에 눈이 삐어 있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니 ‘순응順應’과 ‘자홀自惚’을 하나의 범용한 윤리로 볼 수 있을까. 무엇이 옳은가. 대체 이도 저도 아니라먼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그는 시의 감각적 ‘내용’에서도, 시의 구조적 ‘형식’에서도 자유로웠던 걸림 없는 시인이지 않았는가. 그의 화두는 과연 자유가 아닌가. 시를 노래하먼서도 반시를 성찰할 줄 알았던 그, 국가독재를 상징하는 ‘공통된 그 무엇’에 대한 극렬한 거부를 노래하면서도 ‘시꺼먼 가지’에 대한 민중적 연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늘 하나의 쇠우리로서의 근대의 영토를 의식하고, 이를 벗어나려고 시를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인터넷inter-net처럼 시와 현실 ‘사이’에 링크되어 있었지 그 시와 현실에 포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늘 “연결, 접속될 수 있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와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29)었습니다. 그는 중간에 있었습니다. 그의 시는 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과학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도 과학도 아닌, 시와 반시反詩 사이에서 시적으로 거주하먼서 그는 맹렬한 화두를 틀고 산문시의 형식으로 이 땅의 황폐한bleak 현실을 응시하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하나의 고원이자 중심으로, 아니 수많은 중심의 중심, 시적 중심으로, 아니 하나의 투우사로서 당대적 모럴의 중심에 서서 황소들과 힘을 겨뤘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매우 강한 내적 신념을 지닌 사람을 ‘모럴리스트’로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먼, 우리는 또한 진리를 담당한 오랜 사제로서 시와 현실 사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오랜 질문에 대해 인문적 벼리로서의 시적 인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리하여 ‘시를 하나의 닻’이라고 했던 그를 ‘모럴리스트’라 부르는데 굳이 주저할 이유는 없습니다. 떠도는 배(상대적 다양성)를 고정(보편적 도리)시키는 ‘닻’은 하나의 미적 규범으로서의 시적 모럴의 중심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미적 규범으로서의 시적 모럴의 중심에 선 풀뿌리처럼, 꼭 그처럼 진실한 삶과 아름다운 형식을 일치시키고‘미적 리얼리즘aesthetic realism'을 실현시키는 가운데, 거짓과 허위를 맹타하는 폭로의 미학으로서의 '유명론적 사실주의자nominal realist’로서 그는 하나의 신성가족으로서 이 땅의 거대한 뿌리로서의 민중들의 삶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그는 하나의 인간 서곡an overture of human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봅니다.

 

 

1) 성낙인, <헌법학>, 법문사, 2008

2) 신동엽의 시론 ‘시인정신론’을 통해 볼 때, 전경인정신은 온전히 토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존재의 정신을 뜻하는 것으로, 서구 사상이나 외래 문명에 대응해온 신동엽 시인의 민족적 문예철학사상을 상징하는 표지입니다.

3) 김현, 김윤식이 <한국문학사>를 통해 그렇게도 까대는 임화의‘이식문화론’은 전형적인 악성 비평으로 임화는 오히려 일제 강점기 한국문화의 이식문화적 실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이며, 이것은 조선 개화문명 사상과 실증정신의 모태인 박연암의 실사구시의 학풍을 이어받은 역사적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 김수영은 마치 신동엽이 서사시 <금강>을 통해 실존인물 전봉준을 따르는 자신의 분신‘신하늬’를 동학군으로 제시한 것처럼, 그 또한 미완의 장편소설 <의용군>을 통해 거기 임화의 분신인‘임동은’을 따르는 자신의 도플갱어 ‘순오’를 의용군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이남에서 공산주의의 투사들을 생각할 때에는 어디인지 멋진 데가 있다고 동경하고 무한한 동정을 그에게 보냈으며...”이것은 호사가들을 사로잡을 참으로 재미진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신동엽, ‘시인정신론’,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5)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3

6) 한국근대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영,정조기를 주장하는 김현, 김윤식과 병자수호조약(1876)을 기점으로 하자는 백낙청의 주장, 그리고 갑오경장(1894)을 기점으로 하자는 김태준, 임화가 있습니다. 첫째 의견은 봉건적 잔재를 지닌 한계가 있고, 둘째는 강제조약이라는 한계가 있으며, 셋째 의견은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갑오경장이 추진되었고, 이것은 민중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기 때문에 큰 의의를 지닌 주장입니다. “1, 公私文書의 日附에 淸歷을 不用하고 開國紀年을 用함”처럼 갑오경장의 제1조가 중국과의 사대관계 청산이고, 이는 자주적인 근대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라도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신동엽의 동학혁명에 대한 관심, 이를 형상화한 서사시 <금강>의 민족문학사적 가치도 여기에 있습니다.

7) 조재훈, ‘삿대울 굴참나무’, <조재훈 문학선집2>, 솔, 2018

8) 박용규는 <전봉준 최시형 독립유공 서훈의 정당성>(인간과자연사, 2021)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비록 공주 금강의 우금치에서 관군.일본군 연합군에게 패배했지만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재기, 당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동학을 이은 천도교 대표가 15인이었고, 그중 9명은 동학농민혁명군이었음을 고증, 오늘 3.1혁명에서 말미암은 대한민국의 뿌리가 바로 동학혁명의 민족정신이었음을 밝혀내었습니다.

9) 김현문학전집2, ‘민족문학의 의미’, <현대한국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문학과지성사, 1991

10)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도서출판 길, 2018

11) “그(신동엽)의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느끼는 어떤 위구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쇼비니즘으로 흐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참여시의 정리’

12) ‘吾道, 無爲而化矣’, <東經大全>

13)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다는 것이다”, ‘파밭 가에서’

14) 독일의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권위와 위계에 저항해 ‘모두가 사제다’라고 그 근대적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선언했듯이,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독일 민족주의의 역사적 부활이었듯이, 조선 성리학의 권위와 위계에 저항해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그 근대적 자유와 평등 이념을 선언한 동학의 최제우의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역시 한국민족주의의 역사적 부활을 선언과 것과 유사합니다.

15) V. 프리체, <예술사회학>, 온누리, 1986

16) 신경림, ‘역사의식과 순수언어-신동엽의 시에 대해서’,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전예원, 1983/신동엽미발표 시집<꽃같이 그대 쓰러진>, ‘말의 사기사님네께’, 실천문학사, 1988

17) “민족의 지상 과제라는 남북통일보다도 우리들의 돈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시작노트 8, 판문점의 감상’, <김수영전집2>, 민음사, 2020

18) ‘민중民衆’이란 말은 1893년(고종 30) 동학혁명 당시의 사발통문에 처음 등장하는 우리말 한자어입니다.“右와如히檄文을四方에飛傳ᄒᆞ니物論이鼎沸ᄒᆞ얐다每日亂亡를謳歌ᄒᆞ던民衆드른處處에모여서말ᄒᆞ되“낫네낫서亂離ᄀᆞ낫서”“에에참ᄌᆞᆯ되얏지그양이ᄃᆞㅣ로지ᄂᆞㅣ서야百性이ᄒᆞᆫ사ᄅᆞᆷ이나어ᄃᆞㅣᄂᆞ머잇겟ᄂᆞ”(밑줄-글쓴이) 이런 사실은 동학혁명이 외세에 저항한 민족혁명이기 전에 민중들의 들불 같은 뜨거운 지지를 바탕으로 한 반봉건적 거사였음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참고; 조동일 저 <한국문학통사4>, 247~8쪽. 또한 어원적 의미도 중요합니다. <설문해자>를 보건대,‘民’은 싹이 나서 곁가지가 무성해지는 것을 상형한 것이니만큼 그 민중적 복수성을 지닌 연대적 의미를 암시하고, ‘衆’ 또한 눈目과 사람人人人이 많음을 결합한 형성문자이니, 곧 민중은 불사의 정신과 권력에 대한 감시를 뜻합니다. 이것은 증말이지 민중시인 김수영이 발견한 ‘풀’의 이미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19) M.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예전사, 1996

20)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2>, ‘재주’, 1966. 2

21) ‘유아론’은 실재하는 것은 오직 자아(‘나’)와 그의 의식뿐이며, 다른 것은 이 자아의 관념이거나 자아에 대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근대의 이른바 주관적 관념론을 일컫습니다.

22)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贊寧, <宋高僧傳>, 中華書局, 1987

23) 잘 알다시피, 니체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불교의 ‘無’ 사상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반헤겔적 철학서입니다.

24) ‘고대 중국 소설과 도교적 환상’, 송정화, <비평9호>, 생각의 나무, 2002

25)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3

26)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27) 노자, <도덕경> 제1장

28) <김수영의 문학>, 황동규 편, ‘김수영론’(염무웅), 민음사, 1983

29)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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