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쓰기는 어렵다. 기사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모든 글쓰기는 어렵다.
특히 시를 쓰는 일은 특히나 더욱 까다롭다. 시는 산문이 아닌 운문이며, 짤막짤막한 단어와 운율 속에 시인의 감정과 의도를 함축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를 읽고 그 ‘느낌’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그런 느낌을 주는지, 시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어와 어미 사이에서 행간을 읽고 압축된 텍스트를 풀어내는 과정은, 마치 첨단 IT 기기를 분해하고 그 구조와 성능을 파악하는 작업과도 유사하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오민석 작가가 펴낸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시인동네) 역시도 글쓰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시인들은 시를 쓰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대답한다.
“문학의 힘은 유토피아 정신에서 온다. 문학의 눈으로 볼 때, 모든 것은 결핍이고, 수준 이하이며, 아직 멀었고, 형편없는 것들이다...(중략)...문학은 최상의 순간에 그것에서 빠져나와 더 나은 것을 꿈꾼다.”
“더 나은 것 위에는 항상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 문학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돌진한다. 그 미래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꿈꾸어온 것이므로 말 그대로 ‘오래된 미래’이다. 먼 고대의 음유 시인들이 꿈꾸었던 미래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가능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혹자는 말한다. 인류는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며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지만, 발전된 기술에 비해 인간의 정신적 성숙이 더디다고 한다. 화석연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기후위기, 자연의 파괴, 인간의 얼굴을 잃어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면 등이 바로 그 문제라고 거론된다.
오민석 작가의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에서는, 박경리, 밥 딜런, 포루그 파로흐자드 등, 고통과 외로움, 자연을 노래한 작가들의 시들을 거론한다. 또한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각종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와 대입하며 분석하고 있다.
불안한 현대 사회, 말 그대로 황량한 날의 글쓰기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