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7)-​​​​​​​억울하게 누명 쓰고 귀양을 가면서
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7)-​​​​​​​억울하게 누명 쓰고 귀양을 가면서
  • 이승하
  • 승인 2022.12.2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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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억울하게 누명 쓰고 귀양을 가면서

 

철령鐵嶺 노픈 봉에 쉬여 넘ᄂᆞᆫ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冤淚를 비 사마 씌여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엇ᄃᆞ리

 

(철령의 높은 봉우리를 쉬어 넘는 저 구름아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오성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귀양 가면서 쓴 시조다. 40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면서 그는 어느 당의 일원으로 반대당과 싸우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일 처리를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 그는 조정자 내지는 중재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또한 귀양을 가야만 했다. 환갑 넘은 나이에 귀양을 갔기에 그만 귀양지에서 숨을 거뒀다.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갔기에 철령을 넘어가야 했다. 철령 고개 위에 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이항복은 구름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에 비를 뿌리지 말고 임금님이 계신 대궐 깊숙한 곳에 비를 내려 내 이 억울한 심사를 전해 달라고.

임진왜란 때 외교관으로 세운 공로는 차치하고, 1608년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등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배향을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捲堂: 동맹휴학)하는 사태가 생기자 이항복이 광해군을 설득, 잘 무마해 해결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인홍 파의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西宮: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온건파였기에 누구를 두둔하고 보호하는 일에 늘 앞장을 섰지만 그게 화를 불러온 것이었다.

반대파였던 정인홍도 억울하게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자 정인홍은 폐모론을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된 지 5일 만에 처형되었다. 죽기 전 그는 폐모론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강변했으나 허사였다. 사직 한 상태였으나 명목상 영의정이었고, 또 이이첨李爾瞻이 직권을 도용해 광해군 시절의 어지러운 정치를 부채질했기 때문에 그 역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인홍은 세상을 뜬 지 280여 년이 지난 1908(순종 2)에야 반역죄가 벗겨지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권력이 무상함을 현재의 집권여당도 야당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모든 정권이 영원히 갈 듯 칼을 막 휘두르니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다.

 

사진=이승하시인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인산시조평론상, 유심작품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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