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9)-당신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이승하 시인의 교과서에 실려야 할 옛 시조 30편(29)-당신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 이승하
  • 승인 2022.12.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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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당신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ᄃᆞ리 우희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서거라, 너 가ᄂᆞᆫ 듸 무러보자

손으로 흰 구름 ᄀᆞ르치고 말 아니코 간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로 스님 보이네

저 스님 거기 멈추시오 그대 가는 곳 물어보니

손으로 흰 구름 가리키고 말 안 하고 가네)

 

시조의 세계에는 이렇게 이라는 게 있다. 불가의 성직자를 스님이 아닌 중으로 부르는 것에서도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조의 화자는 낚시꾼인지 다리 밑에서 물을 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보이기에 고개를 드니 스님 한 분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낚시꾼은 이 고장에서 처음 보는 스님인지라 어느 절 소속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어디를 그렇게 열심히 가고 있냐고 소리쳐 물어본다. 스님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의 구름을 가리키고는 다른 말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집에 돌아온 낚시꾼은 낮에 겪었던 일이 재미있어 이 시조를 썼다. 작가 미상, 연대 미상이다. 하지만 이 한 편의 시조는 동양의 유현幽玄한 세계요, 한국의 절묘한 시조요, 불가의 묘한 선문답 같다. 세속적 삶에 지친 현대인, 특히나 입시 준비에 지쳐 있는 수험생들에게 이런 시조 한 수를 읽게 한다면 영혼의 한쪽이 박하사탕 먹었을 때처럼 환해지지 않을까.

시조는 36, 짧다면 무척 짧다. 그러나 일본의 하이쿠(俳句)에 비하면 세 배는 되는 분량이다. 하이쿠 예찬론자인 에즈라 파운드나 롤랑 바르트가 영역된(불역된) 이 시조를 읽었다면 틀림없이 감탄사를 터뜨렸을 것이다. 시조는 기-승ㆍ전-결의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 구조는 하이쿠보다 훨씬 튼튼하고 문학적이다. 이상한 광고 카피 같은 하이쿠는 전 세계에 알려져 있는데 우리 시조는 바다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이 한 수를 잘만 번역하면 일본의 하이쿠나 단카, 렌카보다 더욱더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사진=이승하시인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인산시조평론상, 유심작품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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