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16) / 시로 쓴 시론 – 이규보의 ‘논시’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16) / 시로 쓴 시론 – 이규보의 ‘논시’
  • 이승하
  • 승인 2023.01.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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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송희에디터
사진=한송희에디터

 

논시論詩

이규보 


作詩尤所難 시 짓기가 무엇보다도 어려우니
語意得雙美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含蓄意荀深 함축된 뜻이 진실로 깊어야
詛嚼味愈粹 음미할수록 맛이 더욱 알차다네.
意立語不圓 뜻이 서도 말이 원만하지 못하면
澁莫行其意 난삽하여 뜻을 전하기 어렵다네.
就中所可後 그 중 뒤로 미뤄도 될 것은
雕刻華艶耳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라네.
華艶豈必排 화려한 문장을 굳이 배제하겠는가마는
頗亦費精思 모름지기 정신을 쏟아야 마땅하네.
欖華遺其實 꽃만 붙잡고 그 열매를 버린다면
所以失詩旨 시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되네.
邇來作者輩 요즈음의 글 짓는 이들은
不思風雅義 풍아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外飾假丹靑 겉꾸미기로 미사여구 늘어놓아
求中一時嗜 한때의 기호에만 맞추려 드네.
意本得於天 뜻이란 본래 하늘에서 얻느니
難可率爾致 쉽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네.
自椯得之難 스스로 어려운 줄 알고 있기에
因之事綺靡 그리하여 더욱 화려하게만 하여
以此眩諸人 이것으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켜
欲庵意所匱 깊은 뜻 없는 것을 엄폐하려 하네.
此俗寢己成 이런 풍속이 점차 일반화 되어
斯文垂墮之 문학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네.
李杜不復生 이백 두보가 다시 나지 아니하니
誰與辨眞僞 누구와 더불어 참과 거짓 구별하랴.
我欲築頹基 나는 무너진 터전을 다시 쌓으려 하나
無人助一簣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이 없네.
誦詩三百篇 시 삼백 편을 외운다 해도
何處補諷刺 어느 곳을 풍자하여 보충하겠는가.
自行亦云可 스스로 행하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孤唱人必戱 사람들은 반드시 비웃을 것을.

ㅡ『동국이상국집 후집』 권제1에서

사진=한송희 데이터
사진=한송희 데이터

 

사진=한송희데이터
사진=한송희데이터
사진=한송희데이터
사진=한송희데이터

 

<해설>

이규보가 쓴 한시를 옥편을 찾아가며 한글로 번역해 보았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시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논한 이 시는 이규보의 생몰년 1168〜1241년을 생각해보면 1230년 정도에 창작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근 800년 전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한시가 내게 가르친 것이 적지 않다. 

이규보는 젊은 날에 장원급제를 두 번이나 했지만 마흔이 되도록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무신정권의 시대라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최충헌이 베푼 연회에 불려온 선비들이 써낸 시의 시제가 최충헌을 칭송하는 것이었으니 굴욕적인 시 쓰기였다. 그중 최충헌이 마음에 들게 쓴 시라서 뽑혀 벼슬을 하게 되었지만 동료의 비방으로 1년 4개월 만에 파직된다. 마흔여덟이 돼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벼슬을 시작하게 된다. 무신들이 정치를 한다면 몽고의 침략을 막아야 하는데 전혀 그러질 못했다. 이규보가 평생 주로 한 일이 몽고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다루는 일이었다. 국난극복의 일등공신이었다. 

열여섯 살이 많은 이인로가 우리가 시를 잘 쓰려면 중국 시를 열심히 공부해 응용을 잘해야 한다는 ‘용사用事’ 시론을 주장한다. 그러자 이규보는 이에 반대하는 ‘신의新意’ 시론을 편다. 화가가 되려면 모범작을 잘 본따 그리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시는 자신의 새로운 창작방법론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자기만의 독특한 생각과 새로운 표현 기법이 중요하다면서 문학적 사대주의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이규보가 노년에 이르러 자기 시론에 ‘정신’을 추가한다. 함축된 뜻이 깊어야 시의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문장을 화려하게 꾸밀 것이 아니라 ‘풍아'(風雅, 고상하고 멋이 있다)를 시에 담아야 한다고. 아아, 나는 언제 이런 이런 시를 쓸 수 있으랴. 기교의 시가 아닌 정신의 시를 쓰되 창의적으로 써야 한다는 이규보의 시론 앞에서 오늘도 나는 무릎을 꿇는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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