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18) / 당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 김명원의 ‘21인의 존재 이유’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18) / 당신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 김명원의 ‘21인의 존재 이유’
  • 이승하
  • 승인 2023.01.1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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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인의 존재 이유

김명원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노영호, 53세, KBS 문화부장)
나는 몸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희숙, 46세, 서양화가)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김동호, 68세, 성균관대 명예교수)
나는 환상과 섹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박찬일, 47세, 시인)
나는 상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김백겸, 49세, 원자력연구원 감사)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김영래, 42세, 소설가)
나는 맛있게 먹고 멋있게 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홍순창, 43세, 출판사 ‘빵봉투’ 대표)
나는 질문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황예린, 13세, 중학생)
나는 고통을 통해서만 나는 존재한다.(김정호, 고인, 가수)
나는 질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조연희, 27세, 회사원)
나는 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형권, 43세, 문학평론가)
나는 창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은봉, 47세,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나는 살아있으므로 나는 존재한다.(함기백, 35세, 아주대병원 내과의사)
나는 슬픔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정서린, 57세, 미망인)
나는 마냥 달린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포레스트 검프, 영화 속 주인공)
나는 오르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엄홍길, 43세, 등산가)
나는 나의 존재 이유를 알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정구훈, 50세, 변호사)
나는 아름답기 위해 애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양윤정, 41세, 미용학원 원장)
나는 그리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천수이, 55세, ‘푸른약국’ 약사)
나는 평생 죽고 싶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무명, 거리에서 만난 노숙자)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노신옥, 42세, 가정주부)

가로수 낙엽들이 이를 악물고 있는 도심으로 떨어진다.
21인의 무거운 호명들이 나뒹군다.
존재 이유가 아픈 가을이다.

―『월간 모던포엠』(2021. 11)에서

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해설>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명원 시인의 주변 지인들의 이름이 죽 나열되고 있다. 그들의 성격상의 특징, 직업상의 특징을 잘 파악하여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한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변용하면서 시가 전개된다. 이 말은 인간 보편의 특징을 짚어낸 것이지만 시인은 각 개인의 특징을 한마디 말로 규명해 본다.

주변 인물뿐만이 아니라 가수 김정호, 영화의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 산악인 엄홍길도 나온다.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를 부른 가수 김정호(1952〜1985)는 폐결핵으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래서 “나는 고통을 통해서만 나는 존재한다.”를 그의 명제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사람을 성격이나 특징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의 변용으로 규정짓고 나서 시인은 3행을 덧붙이는데, 도심을 “이를 악물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해보니 각각 또한 이를 악물고 살아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21인의 무거운 호명들이 나뒹군다.”라고 한 것일 터인데 낙엽의 모습이나 각 개인의 모습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마지막 행을 “존재 이유가 아픈 가을이다.”라고 한 것일 테고.

고해苦海라는 어휘가 있다. 인간세상의 고통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파도가 그렇지 않은가. 계속, 줄기차게, 끊임없이 닥치는 이놈의 고통은 죽어서야 끝이 난다. 기독교에서는 진정으로 죄를 참회해야지 구원과 천국을 약속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했다. 불가에서는 정진을 통해서 해탈해야지만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고, 고苦의 업보가 끝난다고 했다. 김명원 시인은 이 세상 사람 21명이 살아가는 모습이 다 다르지만 모두 갈망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 갈망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후회, 후회, 후회를 하면서 살아간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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