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23) / 우리는 모두 새해에 – 구상의 ‘새해 펜을 위한 기원’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23) / 우리는 모두 새해에 – 구상의 ‘새해 펜을 위한 기원’
  • 이승하
  • 승인 2023.01.2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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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펜을 위한 기원 

구상 

펜 한 자루로
새해를 맞습니다.
백결선생의 가난을 떠올리며
감사히 맞습니다.

올해는 당신의 영능(靈能)으로
저의 펜을 축복하시어 쓰는 글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담기고
흰눈같이 맑은 이성에 빛나고
옹달샘같이 솟구치는 감성을 지니며
어린 잡초의 짓밟힘에도
눈물짓는
사랑이 되게 하옵소서.

올해는 제발 저의 펜을
당신의 연모로 쓰시어 쓰는 글마다
모든 이들의 삶의 뿌리를 비추고
모든 이들의 삶의 용기를 북돋고
모든 이들의 쓰라림에 위안을 주며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옵소서.

펜 한 자루로 새해를 맞는
저의 가난한 헌신을 어여삐 보사
저의 무아(無我)의 염원을 이뤄주소서.

―『말씀의 실상』(성바오로출판사, 1980)에서

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해설>

오늘은 설날 다음날입니다. 모두 간밤에 좋은 꿈 꿨습니까? 좋은 돼지꿈을 꿨으니 로또복권을 사겠다고요? 하하, 농담했습니다. 이 아침에 저는 은사이신 고 구상 선생님의 시를 읽습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종종 ‘기어(綺語,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의 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본 니혼대학 종교학과에 유학 갔을 때 교수님 한 분이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살아생전에 기어의 죄를 범하면 무간지옥에 빠져 고통을 받는데, 사이비 종교지도자와 문인이 그 죄를 제일 많이 범해 무간지옥에 상당수 가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스승은 이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시인은 언어유희를 일삼는 자로서 진정성 없이 말의 치장만 그럴듯하게, 말의 분장만 화려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니 늘 주의하라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새해를 맞는 스승의 각오가 느껴지는 시입니다. 시를 쓸 때 하느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흰눈같이 맑은 이성과 옹달샘같이 솟구치는 감성을 갖게 해달라고, 또한 어린 잡초가 짓밟히는 고통을 느끼고 눈물짓는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제3연에 나오는 ‘연모’는 물건을 만드는 데 쓰는 기구를 뜻하지 이성을 그리워하는 그 연모는 아닐 것입니다. 당신의 글이 사람들의 삶의 뿌리에까지 비출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안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쓰는 시가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꽃피울 수 있는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시가 너무 주제에 치우치면 미학적 완성도를 소홀히 할 수 있기에 무의미 시론을 주장한 시인도 있었지만 공자가 말한 ‘사무사(思無邪)’가 그렇듯 주제의 깊이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스승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진지하게, 진중하게 해야 할 텐데, 과연 올해 그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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