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한용운
이 작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야
너는 썩은 쥐인지 만두인지 분간을 못하는 더러운 파리다.
너의 흰옷에는 검은 똥칠을 하고
검은 옷에는 흰 똥칠을 한다
너는 더위에 시달려서 자는 사람의 단꿈을 깨워놓는다.
너는 이 세상에 없어도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다.
너는 한 눈 깜짝할 새에 파리채에 피칠하는 작은 생명이다.
그렇다. 나는 적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요, 너는 고귀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어여쁜 여왕의 입술에 똥칠을 한다.
나는 황금을 짓밟고 탁주에 발을 씻는다.
세상에 보검이 산같이 있어도 나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
나는 설렁탕 집으로 궁중연회에까지 상빈(上賓)이 되어서 술도 먹고 노래도 부른다.
세상 사람은 나를 위하여 궁전도 짓고 음식도 만든다.
사람은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파리를 위하여 생긴 것이다.
너희는 나를 더럽다고 하지마는
너희들의 마음이야말로 나보다도 더욱 더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이 없는 죽은 사람을 좋아한다.

<해설>
한용운의 시가 『님의 침묵』에만 실려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 시집에 실려 있지 않은 시 21편, 시조 21편, 한시 139수를 남겼다. 동시도 3편이 발굴되었다. 『박명』 『철혈미인』 『죽음』 같은 장편소설도 썼다. 시 중에 특이하게도 현실풍자시가 보인다. 쥐, 모기, 파리가 나오는 시 가운데 파리를 다룬 시를 위에 예시하였다.
제1연에서는 화자인 사람이 파리가 왜 더럽고 밉살스러운 곤충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에 도움을 조금도 안 주는 곤충이라면서 화자는 파리를 경멸해 마지않는다. 제2연에 가서 화자가 파리로 바뀐다.
파리에 대한 사람들의 모진 평가에 대해 파리는 대체로 다 수긍한다. 그러나 시가 진행될수록 파리는 자기 자랑에 나선다. “황금을 짓밟고”는 황금에 연연하는 사람과는 다름을, 궁중연회에서 상빈(고관대작)이 되어 술도 먹고 노래도 부른다는 것은 사람보다 훨씬 자유롭게 살아감을 말하는 것이므로 파리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은근히 빈정대는 내용이다. 화자인 파리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온갖 물건들을 마음껏 사용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으니, 사람이 우리를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모종의 역습을 하고 있다.
사람에 대한 파리의 빈정댐이 극에 달하면서 시는 끝난다. 파리가 똥밭에서 놀기에 사람인 너희는 나를 더럽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나보다 훨씬 더럽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 파리의 결론이다. 그래서 파리는 마음이 없는, 죽은 사람이 좋다는 것이다. 한용운은 이렇듯 파리를 등장시켜 매일매일 욕망 추구에 급급해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을 풍자하였다.
한용운의 눈에 제일 꼴 보기 싫었던 인간이 친일파 족속이었다. 어떻게 하든 비판하고 싶었지만 대놓고 욕할 수 없어서 이런 시를 썼다고 본다. 삼일운동 직후 투옥되어 3년 형을 살면서 불자들이 찾아와서 사식을 넣어 드리겠다, 변호사를 써 석방운동을 펴겠다, 보석을 신청하겠다는 것을 다 거절하고 3년 형을 채우고 나왔다. 이 땅에 이런 꼿꼿한 어른이 있으면 존경할 것이다. 한용운 시인이 입적한 지 80년이 다 되어간다. 참 대단한 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