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32) / 사랑한다고 언제 말했던가 - 진은영의 ‘사랑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32) / 사랑한다고 언제 말했던가 - 진은영의 ‘사랑합니다’
  • 이승하
  • 승인 2023.02.01 14:23
  • 댓글 0
  • 조회수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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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진은영  

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
너는 말했다
남색과 노랑의 대비처럼

사막을 걷는 중이라고
너는 말했다
환상의 바다를 쏟으면서

너는 말했다
시간은 가득한 거야
달콤한 과일 속에 검은 벌레들로

내 심장은 밀랍사과
약속의 심지가
네가 뱉은 모래의 입속에서 타오른다

너는 말했다
아름다운 밤들이 모래처럼 쌓인
사막이 있을 거야

밤이 에나멜 구두처럼 반짝거렸다
맨발로 어디든ㅡ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 2022)에서

사진=한송희에디터
사진=한송희에디터

 

<해설>

외국 여행을 하면서 당신은 느꼈을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란 말을 많이 하는구나. 어느 신문사의 요청을 받고 모 기관에서 7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사랑합니다’란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아내한테도 연애할 때 몇 번 했지만 결혼한 이후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자식한테도 그 누구한테도 내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사랑합니다’란 말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을 많은 사람이 후회하고 있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까지 좋게 보인다. 실수까지 귀엽게 보인다. 남색과 노랑이 잘 안 어울릴지라도 사랑하니까 마음에 든다. 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 네가 말해주니 정말 살맛이 난다. 제2연에서 너는 자신의 고충을 내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랭보의 말마따나 상처 없는 영혼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시간은 우리를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언제나 가득한 것 같지만 달콤한 과일 속이 검은 벌레들로 차게 하는 것이 시간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된다. 

바보, 바보, 내 심장은 밀랍사과여서 과일 속이 자연스럽게 썩어가도록 두지도 않았던 거야. 약속의 심지가 네가 뱉은 모래의 입속에서 다 타오르게 내버려두다니. 하지만 아아, 다행이다. 네가 먼저 말해주니. 아름다운 밤들이 모래처럼 쌓인 사막이 있을 거라고. 내가 망설이고 있는 때 네가 불쑥 말한 그 사랑 고백. 

난 이제 맨발로 사막이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 내 오늘은 꼭 말하리라, 그 사람에게. ‘사랑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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