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37) / 남자들이 아주 나빴다 – 나혜석의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37) / 남자들이 아주 나빴다 – 나혜석의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 이승하
  • 승인 2023.02.0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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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나혜석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애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애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공진호 엮음,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아티초크, 2016)에서

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해설>

나혜석(1896〜1946)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일본 유학을 하고 온 신여성이었고 여성의 권익을 부르짖은 페미니스트였다. 일본 유학 도중 방학이 되어 들른 서울 집에 오빠의 친구가 놀러 왔으니, 상처한 지 2년 되는 변호사 김우영이었다. 김우영의 청혼이 있자 오빠가 권유하기도 해 결혼을 한다. 네 자녀를 낳고 평범하게 살던 나혜석은 유럽 여행에 나섰다가 운명이 바뀐다. 일본 정부의 외교관 대우를 받고 있었고 갑부인 김우영은 그 엄혹한 시대에 부부 동반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때마침 그 당시 세계 화단에 야수파 열풍이 불어 파리에 온 김에 그 화풍을 배우고 가겠다고 나혜석이 간청하자 김우영은 허락하고는 법률 공부를 하러 독일로 떠난다. 그때 유럽을 순방 중이던 최린은 천도교의 지도자로 역시 친일 귀족이었다. 최린은 나혜석에게 파리 시내 안내를 부탁하였고 두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데이트를 한다.
나중에 조선에 온 김우영이 목격자의 증언을 제시하며 아내의 밀회를 추궁하자 그게 무슨 죄가 되느냐, 호감을 좀 갖고서 데이트 몇 번 한 정도였지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해명한다. 이 해명을 용납하지 않고 이혼을 요구한 김우영은 아이들도 못 만나게 하고 위자료도 주지 않고 이혼을 단행한다. 당시 사회는 나혜석에서 ‘화냥년’이라며 낙인을 찍는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구명과 생활비를 부탁하지만 최린이 이를 거절해 혜석이 소송을 건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래서 쓴 것이 이 시다. 사남매 아이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으로 쓴 시는 당시의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었다. 자신을 과도기의 선각자로, 또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로 간주하였다. 
이혼 이후 아이들을 볼 수 없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암자를 전전하면서 연명하다가 서울 자혜병원 무연고자로 발견된 한 구의 시체가 바로 나혜석의 최후였다. 이 시는 사실 절규다. 나혜석이 죽은 지 77년이 되었는데 지금 이 땅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는가?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나를 포함한 남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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