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54) / 미국에서 살다 보니 성이 바뀐다―전희진의 ‘이사’
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 (54) / 미국에서 살다 보니 성이 바뀐다―전희진의 ‘이사’
  • 이승하
  • 승인 2023.02.2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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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민우
사진=이민우

이사

전희진 

포기한다
이 집에 머물러 있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자마자 집에 스패니쉬 일꾼들이
와 있다
낯선 사람이 낯익은 공간에 낯이라는 민감한 기후에

문득 내가 낯선 사람이 되고 만다

친숙한 땅을 포기하고
한국인의 국적을 포기하고 
포기가 어린 배추
포기만 할 때
태평양 이쪽에서 저쪽으로
먼바다를 사이에 두고
밤과 낮을 머리맡에 두고
일란성 우리는 좁은 잠을 늘려갔지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김 씨를 포기하고 
결혼해 행복한 전 씨 일가를 이루었을 때
포기라는 말보다 청춘이란 말이 더 매력적일 때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포기가 나를 사로잡았는지
얼마나 많은 포기를 이루었는지
왜 그동안 포기를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는지

이십 년 차곡차곡 알차고 때 묻은 살림살이처럼 
나는
거실에 우뚝 서 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색이 이 여인을 안도한다
여인의 찰나가 기른 낯선 공간

―『미주문학』(2022년 겨울호)에서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사진=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포기한다”는 선언에서 시작하는 시다. 포기(抛棄, abandonment)라는 말이 10번이나 나온다. “포기가 어린 배추”에서는 풀이나 나무의 낱개를 뜻하는 포기(root)를 쓰기도 하지만 미국으로 이사를 하면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십분 느꼈기에 첫 번째 문장을 “포기한다”로 했을 것이다. 미국 내에서의 이사는 의미가 또 다르다. 미국은 거의 인종 박물관이다. 그리고 이 주에서 저 주로 이사하면 법이 바뀐다. 

이 시의 화자는 친숙한 땅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그랬더니 남편의 성을 따라 전 씨 성으로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김 씨로 수십 년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전 씨로 바뀌는 세상이 미국이다. 미국은 성을 포기하게끔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하게 한다. 여기서도 이삿짐을 싸면 낯익은 공간이 낯선 공간이 된다. 미국 생활 이십 년 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알차고 때 묻은 살림살이’도 버려야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왔는데 미국 내에서 이사할 때에도 포기, 포기,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인간은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미국 생활에 적응했듯이 미국 내에서 이사 간 곳에서 또 적응을 잘할 것이다. 내 비록 지금은 이곳에서 낯선 사람이지만 이 공간에서 살다 보면 낯익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이웃들도 나를 낯설어하지 않을 것이다. 560쪽에 이르는 『미주문학』 101호. 태평양 저쪽에서도 열심히 글 쓰는 사람들이 많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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